>> Aug 3, 2022




>> Feb 19, 2022

The Man Who Walked in Color_Georges Didi-Huberman
부재의 형상과 역사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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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위베르만의 징후, 흔적, 역사, 증언의 이미지론을 사실상 직조하는 것은 부재다. 그러나 디디-위베르만은 세계 속 신의 절대적 부재를 주장하거나 이미지 속의 절대적 부재를 주장한 적이 없다. 앞서 터렐의 작업에서 틀의 이중적 속성에 대한 고찰이 보여주듯, 디디-위베르만은 부재를 현시하게 하는 이미지의 이중적 역량, 이미지의 놀이와 리듬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단순성과 복합성, 모나드의 몽타주가 늘 이미지를 함께 구속한다. 이미지는 아무리 사소한 요소이더라도 제거할 수 없는 전체로 텍스트 속에서 ‘즉각’ 솟아나는 단순성에 구속되고, 언제나 분열된 채 대조되는 ‘사후적’ 복합성에 구속된다. 이는 이미지의 즉각적 단순성이 기억이 필요한 순간 언제나 시간의 몽타주 속에서 ‘변형’된다는 것을 뜻한다.이 몽타주는 벤야민과 프로이트의 변증법적 이미지 내에서, 즉 망각과 상실, 부재의 기반 위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변형하는) ‘구조’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사라진 것은 우리에게 충격을 가하며 즉각 솟아난다. 이미지를 응시하는 일은 이러한 부재의 기억이 ‘나타나도록’ 이미지의 구조를 구상하는 일일 것이다.

디디-위베르만이 소망과 꿈의 이미지를 노스탤지어에 빠진 이미지로 해석하는 대신 비판적 기억의 이미지로 해석하며 변증법적 이미지의 두 가지 의미를 화해시키고자 했다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이미지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이미지는 지나간 시간이 생산했으나 또한 잃은 과정 그 자체를 겨냥하므로 비판적 기억이다. 비판적 기억의 변증법적 사유는 발굴을 위해 ‘벌린’(ouvert) 바닥과 그 바닥에서 끌어 올린 오브제 사이의 ‘갈등’을 획득한다. 특히 디디-위베르만은 벤야민의 변증법이 마르크스, 프루스트, 프로이트의 사유를 경유하여 고안되었음을 분명히 강조한다.


벤야민은 깨어남의 변증법을 소묘하기 위해 세 가지 거대한 모더니티의 형상(figure)을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형상, 이는 꿈 이미지의 고답주의를 ‘해소’하고 이에 이성의 각성을 강제하기 위해 필요하다. 프루스트의 형상, 이는 시적 언어의 비고답적 형식이라는 미래의 새로운 형식 안에 동일한 꿈 이미지를 지양하는 동시에 ‘재소환’하기 위해 필요하다. 마침내 프로이트의 형상, 이는 인간에 관한 미래의 새로운 지식 형식 속에 동일한 꿈 이미지를 지양하는 동시에 이 이미지의 현실성과 구조를 ‘해석’하고 사유하기 위해 필요하다.

디디-위베르만이 초기 저작에서 적극적으로 개진했던 징후 이미지 이론과 2000년 이후 저작에서 개진하는 역사 이미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디디-위베르만이 벤야민과 프로이트를 연결하는 방식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인식의 ‘현-순간’에 진입하는 ‘지난간 시간’을 독해하는 변증법적 이미지를 잔해이자 붕괴의 기호인 꿈의 이미지로 사유하는 방식 말이다. 디디-위베르만은 ‘역사의 눈’ 시리즈의 여러 저작에서 비판적 이미지를 연대기적 해석이나 재현의 이미지와 구별하고, 비판적 이미지를 독해하는 역사가의 임무를 강조하였다. 이때 비판적 이미지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불안을 인지하고 드러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의 사례처럼 상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사태 속에서 “사유는 장애를 겪는”다. 디디-위베르만에 따르면 온전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누락하고 있는 이미지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증언을 수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애를 겪는 사유에 상상할 수 있도록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지는 사유가 중단된 곳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가 몸을 숨기고 찍은 흐릿한 이미지를 읽는 동안 “연약한 시간성”의 이미지의 불안과 결핍이 섬광처럼 나타난다. 진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담지된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의 현시된 이미지가 포함하고 있는 암흑의 지대들, 암흑의 자국들은 신의 도상적 이미지를 훼손하며 다시 요청하는 산마르코 성당 대리석 패널의 하얀 얼룩들, 지각해야 할 구획을 만들면서 구획 속의 공백을 확인하게 하는 터렐의 이중적 틀이 환기하는 부재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지는 무엇을 하는가. 이미지는 증언한다. 이미지는 무엇을 증언하는가. 이미지는 역사를 증언한다. 그러나 이미지가 마주하고 환기하며 증언하고 있는 역사란 불충분한 이미지로서의 역사다. 이미지는 “불충분하지만 필수적인 이미지, 부정확하지만 진짜인 하나의 단순한 이미지. 물론 역설적 진실의 진짜 이미지”로서 역사를 증언한다. 이미지는 마치 발작을 겪고 있는 히스테리 환자처럼 증언한다. 발작을 겪고 있는 환자의 신체처럼 무의식의 모순을 드러내며 증언한다. 이러한 증언은 물론 사료의 객관성이나 충실성을 보증하는 증언과 비교할 때 불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필수 불가결하다. 이미지 역사가는 히스테리 환자의 몸짓과 같은 역사-이미지-증언을 응시하고 경청하는 어려운 숙제를 하는 자다. 역사의 빈틈, 역사의 상실을 상상하며 그는 여기에 있다. 징후의 이미지를 응시하며 여기에 자유로이 사로잡혀 있으려 한다.




>> Feb 18, 2022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 The Apartment with Two Women
-대본 정말 잘 썼을 것 같다.
-영화 곳곳에 박혀있는 공유된 관계의 경험.
-시각적 은유와 환유를 찾는 재미.
-영화에서 빈 어둠이 표현되는 방식이 현대 미술에서 그것을 표현되는 방식과 depth 감도 면에서 다소 다른 것 같다는 느낌. 결국 같은 것에 대한 표현이지만 다른 부분을 더듬고 있는 느낌.
-통역 일 의외로 재밌었다.



>> Jan 30, 2022

a Thought

Going through difficulty with embodying current idea through AR. Not a technical but conceptual one. The smartphone/pad is hitherto an essential platform to present AR tech but it is too smooth/slippery for showing artwork. hard to occur any resistant and critical thinking. All is going perfectly well on the surface of its own world. That is problematic. The surface of Smartphones as an art medium barely brings any resistance. It’s obedient. It’s too positive, comfortable, satisfied, instantly shared, seamless, flawless, and just ‘Like’ for the viewer.

How can we transmit friction and resistance which we feel and perceive from materials in the physical world to the virtual world?
+Uploading the Friction and Refraction of thoughts with it.
+The flatness of the painting has been present in its virtual reality since its first appearance.

-Visual effects acquired from the lack of tech level. An interesting artistic expression or random artistic choice and lazy decision-making?




>> Jan 23, 2022

a Thought

...중략 주절주절...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만큼은 사회성을 요구하는 최후의 공동행위이지 않을까. 음식 그 자체보다는 함께 음식을 먹는 행위, 그것이 사회성, 인간성을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

먹방이라는 장르의 생성도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면서 음식을 함께 먹을 때의 일시적인 공동체 형성을 대리 경험하게 해주는 것일지도.

얼굴을 맞대고 마주하고 짐승처럼 개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맞은편에 함께 앉아 있는 타인의 모습을 의식하고 또한 나의 먹는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는 행위. 보고 보이는 쌍방의 관계. 먹방에서는 이것이 없다. 일방적인 소통의 관계이다. 철저하게 본인의 모습을 숨기는 관음적인 정체성. 그리고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회 시스템. 단절과 관음. 판옵티콘과 역-판옵티콘. 성형수술과 같은, 온라인에서 본인을 어필하는 선택적 프로필. 부정성이 제거된 매끄러운 정체성만 남은 온라인의 세계. 밸런스가 무너진 특이점의 세계.

-음식은 평등한 소비재(일까?)
-일본의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음식의 이미지, 소소한 힐링 느낌
-한국의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음식의 이미지, 다소 전투적으로 ‘먹어 치운다는’ 느낌, 이 둘의 사회 문화적 차이점이 궁금.
-일종의 음식을 통한 위로, 그러나 위로의 방법이 다름. 위로가 필요한 시대




>> Jan 5, 2022

a Thought

Schwarzfahrer/Black Rider (1993)

Silence becomes active silence. (after a certain action. Silence is suspended until action이라고 나는 생각. 침묵 자체가 능동적이라는 해석은 다소 정신승리 아닐까?)
-a question on the reason why only people from certain parts of the world choose silence(talking by not talking) as a strategy of expression of emotions and opinions.
-The possibility of active silence in terms of resistance. It's a matter of tone of speaking/attitude when we face and overcome difficulties.
-not a helpless surrender, nor resignation. active action like sit-in protest.
-the possibility of being creative while encountering violence and absurdity. or we may need to be creative to deal with violence and absurdity.
-Absurdity can be gradually changed from the criticism and insight of the inside, not from the outside. ultimately and productively 라는 생각.

+making a bridge between Wittgenstein’s Silence and Trinh T. Minh-ha’s Silence.




>> Dec 9, 2021

Journal

...중략... 오늘같이 눈 내리는 하늘을 광장에 서서 바라보던 날은 행복이라고만 묘사하기엔 부족한, 어떤 감정이 내 안에 오래 지속된다. 더 좋은 것은 나 혼자 서서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는 것. 나를 포함해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다가 문득 이 광경은 오롯이 나의 눈 말고는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후,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 눈이 흩날리는 광장에 두 손을 점퍼에 쑤셔 넣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서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혹은 멍 때리며-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같은 공간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어떤 만족감과 비슷한 감정을 준다. 다른 이의 행복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연속 작용을 불러일으킨다니. 새삼 놀랍다.




>> Dec 7, 2021

a Thought
while reading 'Steppenwolf',

Der Bürger ist deshalb seinem Wesen nach ein Geschöpf von schwachem Lebensantrieb, ängstlich, jede Preisgabe seiner selbst fürchtend, leicht zu regieren. Er hat darum an Stelle der Macht die Majorität gesetzt, an Stelle der Gewalt das Gesetz, an Stelle der Verantwortung das Abstimmungsverfahren.

문득 민주주의와 투표 시스템은 다수의 평등한 상태 추구를 위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책임감을 덜기 위해 일종의 아웃소싱 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본인의 삶에 크리티컬한 결과를 미치는 사안들을 대리인을 세워서 결정하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일까? 물론 그 분야의 전문가가 있다면 내가 일일이 리서치하고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서비스 비용을 지불하고 권한을 일임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겠지만 투표에 관해서라면, 정치에 관해서라면 전문가가 있다는 게 가능한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라면 이해가 되지만 작금의 정치인들이 과연 그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지 다소 의문이 든다. (올드 한) 퍼포먼스와 (역시 올드 한) 미디어를 통한 - 혹은 이용한 -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조금 이해감. 근데 그것은 배우들이 더 잘하잖아? 앞으로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굳이 정치인들이 필요할까? (약간 유통과정 복잡해서 최종 소비자 가격 올라가는 구조가 연상됨.) 인터넷으로, 핸드폰으로 개개인이 크고 작은 정책, 사안들마다 직접 결정하는 방향은 너무 비현실적인가? 물론 선동당하기 쉬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이런 과정을 귀찮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결과가 의도치 않게 이상하게 나올 수도 있겠지만. 브렉시트처럼. (근데 또 당시엔 브렉시트가 멍청한 국민투표 결과라고 치부되었지만 EU 연합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신의 한 수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염려되는 점은 그럼 다들 너무 이기적으로 변하려나? 아니면 직접 사안을 결정하고 싶은 사람은 인터넷 투표로 직접 결정하고, 대리자를 선임하고 싶은 사람은 정당 같은 그룹에 아웃소싱하는 식의 노선을 2개로 하는 건 어려우려나? 기술적으론 가능할 것 같은데.




>> Dec 4, 2021

Immersive experience 공부 (현실-> 가상)

To create a virtual -for now, mostly game- world that feels realistic to the user, the way virtual objects interact in this virtual world should replicate how they do in real life.

Physics engines; software which provides an approximate simulation of certain real world physical systems and phenomena by running complex calculations. (e.g. forces on an object like gravity, drag -> object’s acceleration due to those forces using F=ma -> object’s velocity -> object’s position -> repeat this process from #1, forever, because the forces are changing moment to moment.)

important points to feel realistic;
-the physical simulations running in real-time. 물리적 시뮬레이션이 실시간으로 실행되야함. No delaying.
-by implementing lots of complex and interesting physics phenomena into virtual reality.
-so requires GPU, fast enough for real-time output

BUT, a new type of Physics engine by Montreal-based research team;
-using a new learning-based method, not running the laws of physics. -> 300 to 5000 times faster
-how? a neural network-based. 훈련 데이터로 스스로 신경망 학습하도록.


© Kaedim

1. Training data X와 Y를 오프라인으로 인풋 -> 각각 Z와 W로 압축.
2. 압축된 Z와 W의 데이터는 neural network를 트레이닝함-> recurrently predicting object’s 압축 상태.
3. 이렇게 훈련된 신경망으로 아웃풋 결과값 얻어서 objects 사이의 interaction 계산-> rendering on the screen.
4. 단점 1; a neural network-based-> 데이터 얻는데 시뮬레이션 시간 오래 걸림. 그치만 한 번만 해 놓으면 됨. + 속도 빠름
5. 단점 2; 신경망 트레이닝 영역에서 못 본 먼 것은 실행 못함. (그치만 여기에 AI를 접목한다면? + 이 방법을 예술 교육에 적용한다면?)

**재밌네, 지금 와선 기술의 실현이 가능한가 문제보다는 보급화가 가능할 가격일지가 관건일 듯. (그래픽카드 가격 장난질이나 좀 사라졌으면)




>> Nov 30, 2021

일기

내 방 창문 코앞엔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 그루는 나무의 둘레와 키를 보니 몇백 년은 넘었을 법하고 다른 한 나무도 비교적 몸통과 가지가 조금 더 가늘고 높이도 낮지만 역시 최소 백 년은 넘었을 것 같다. 근데 재밌는 건 이 오래된 나무들도 매번 비바람에 휘청휘청한다. 4층(우리나라론 5층)에 위치한 내 방에서 보면 나무의 흔들림이 더욱 잘 보인다. 그 커다란 나무들이 사람처럼 좌우로 흔들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물리적 부피가 저렇게 큰 사물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고? 만화에서처럼 진격의 거인이 내 방을 들여다보면 이런 느낌이려나?

동시에 사소한 일로 고민하고 순간의 감정에 휘둘렸던 내 상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저 몇 백 년 넘은 나무들도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데 고작 나 따위가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걸 수도 있겠다 싶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 와중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몇 시간째 고대로 앉아있는 비둘기도 참 대단하다. ㅋㅋ)




>> Nov 29, 2021

a Thought

[flow: starting from heating cost in Germany -> left/right handed users(metonymy) -> society -> new tech]

독일의 전기 요금과 난방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다. 하여 대부분의 독일 거주자들은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어 내 방의 난방의 온도를 낮추니 글을 쓰는 동안 손이 차가워진다. 오른손으로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다 보니 오른손만 차갑다. 문득 왼손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손이 너무 차가워지지 않게 양 손을 번갈아 가면서 쓸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왼손으로 시도를 해보았다. 발로 쓴 것과 같은 수준의 처참한 결과가 나왔다.

[jump]

문득 이 양손 사용 빈도 수의 불균형과 그에 따른 능숙함의 정도가 사회 주요 분야에서 남자의 쓰임과 여자의 쓰임이 다소 한 쪽으로 치중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육체노동이 필요한 곳엔 주로 남성들이 많이 종사하고 배려심과 꼼꼼함이 필요한 곳엔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구분을 넘나드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성의 구별과 그에 따른 능력의 차이로 발생되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생각을 이어가고 싶진 않다. 남성 중심의 사회를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대다수의 남성들이 희생과 책임감의 무게를 감수했으니 그만큼 좀 더 권리를 갖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들이 그것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안쓰러운 감정) 나는 단지 오른손잡이들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왼손잡이들이 어떻게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고 있으며 그들이 이런 사회와 삶에서 오는 마찰을 덜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분명 왼손을 보다 자주 사용하면 오른손만큼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될 텐데. 왜 나는 오른손 잡이로 자라게 되었고 왼손 사용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할 겸 왼손으로 글 쓰는 취미를 가져볼까 생각 중이다. (근데 흥미롭게도 드로잉 할 때는 이 미숙한 왼손만이 그릴 수 있는 선의 맛이 있다.)

덧붙여,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한 쪽 손의 hegemony가 없어진다! 오히려 한 쪽이 없으면 너무 불편하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new technology의 출현을 너무 dystopian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affirmative way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나는 기술이 기존에 존재하던 어떤 종류의 치우침 또는 불균형의 중심추를 한 쪽으로만 기울어지지 않도록 balance를 맞추어 준다고 믿는다. e.g.) Invention of washing machine; liberation of household labor leading more time & chance to explore social/economic activities. 다소 비약이 있지만 같은 맥락에서, embryo의 인공수정, 유전자 가위, artificial womb 등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다수는 윤리적 문제로 꺼려하지만.




>> Oct 28, 2021

일기

독일어 수업 끝. 비자 신청하러 가서 통역사 없이 더듬더듬 설명할 정도는 된 것 같다 ...중략... 분명 잉게마르의 수업은 모두가 만족했다. 고로 학생들을 고양시키는 수업 스킬이 있는 것이다. 그 단계까지 가는 것이 어렵지만 한번 도달하면 수업하기 수월할 것이다. 쉽게 설명하고 중요한 것을 빠르게 알려주고 학생들이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여 시간 낭비하지 않고 수업 중 누구도 뒤처지지 않도록 하는 것. 자기만의 수업 Regel이 있어서 학생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 그러나 질문을 했을 땐 빠르게 요점을 파악하여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 학생들의 혼란을 해결해 주는 것. 강압적이지 않고 차분하지만 빠른 템포의 수업 분위기. 요 정도로 스킬을 요약할 수 있겠다. 좋은 표본이었다 잉게마르.




>> Oct 22, 2021

a Thought

어제 모하메드와 저녁에 한잔하면서 했던 이야기.
-오징어 게임 1화까지만 본 모하메드의 해석: 빚에 대한 독일인과 한국인의 개념이 다른 것 같다고 함. 오징어 게임을 보며 블링블링 컬러감의 childhood 게임을 통해 노동과 빚의 개념을 생각했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라 그런지 나와는 감상의 관점이 달라서 흥미롭다.
-일을 하는 것 = 빚을 갚는 것; 아시아 국가에서 일을 하는 것은 나 자신보다는 좀 더 큰 집단, 사회, 공동체, 혹은 대의를 위해서 인 것 같다고 함.(스토리 상 주인공 엄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 등등) 반면 독일은 전범국이라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국가가 주변 유럽 국가에게 빚을 갚기 위해 엄청나게 일을 해야 했고 이 것이 빚,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근데 오징어 게임을 본 또 다른 친구도 한국 가계부채가 세계 최고라던데 맞냐고 물어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은 이제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나 보다.ㅋㅋ 왜 내 주변 친구들은 다들 오징어 게임을 본 후 잔혹성이나 사회의 양극화 자체보다는 빚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지. 아마 외국에선 빚을 무리하게 내서 무언가를 하는 한국인의 소비패턴이 이상하게 느껴졌나 보다.
-전통이라는 것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인식과 독일인들의 인식이 매우 다른 것 같다고도 함. 전범국가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함. 한국인의 잘려나가버린, 잃어버린 전통/뿌리roots와 독일의 패전 후 스스로 버린 뿌리.

-언어, 러시아어가 사실 그리스 학자가 발명한 것이라는. 그래서 그리스어와 러시아어 둘의 생김새가 비슷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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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관련하여, 중딩 때 캐나다 어학연수하면서 남아메리카 국가들,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에서 온 성인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어렸던 나는 당연히 남미 국가별로 언어가 다를 거라고 생각해서 내 이름을 너희 나라 언어로 좀 써달라고 부탁했었다. 칠레 친구와 아헨 친구였었나? 여하튼 둘 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서 왜 나라가 다른데 같은 언어를 쓰냐고 되물었던 무지한 중딩의 나 ㅋㅋ 스페인의 식민 지배 때문인 걸 알고 난 후 ‘너희 나라는 왜 너희만의 문자와 언어가 없어?’라는 질문을 했던 내 스스로가 상당히 창피하고 그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근데 남아메리카 나라들은 식민지배한 나라에 대한 원망이나 감정이 강하지 않거나 없다는 점이 또 신기한 지점. 한국이나 중국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것에 비하여) 당시의 대화 내용은 어렴풋하지만 미안한 감정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역시 사실보다 감정이 오래 기억된다.




>> Oct 11, 2021

Adorno: Society and Art form

[요약: 사회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논의.
-경제적 토대에 의해 문화적 상부구조가 규정된다는 맑스주의 관념에 대항한 아도르노의 사회적 사실로서의 예술 작품 해석; 예술 작품의 내적 구조는 사회 근저에 존재하는 모나드와 같은 규칙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예술 작품은 사회성의 효과를 갖는다는 주장. 이런 원리는 합리주의 형이상학에서 가져옴.
-예술형식의 총체성 내의 파편적이고 비동일적인 요소들의 위태로운 균형 속에서 작품이 나아간다고 나는 이해함. 이런 이질적 요소들이 많을수록 작품은 위대해짐. -> 예술을 하나의 산물이 아닌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
-아도르노의 형식 개념; 형식을 구성적 종합과 파편화의 상호작용으로 봄.
-아도르노의 미메시스 개념; 단순한 모사의 의미인 플라톤의 전통적 미메시스 의미를 전복. 잔혹성과 결부한 추醜에 반해 화해와 포옹의 미메시스 주장. 밀착하기Anschmiegung-> 이런 미메시스는 사회의 원초적 계기를 드러내고 사회를 예견. 예술적 미메시스는 개념을 벗어나는 것을 통합시킴으로써 개념적 인식을 보완, 즉 미메시스는 정서적, 신체적 반응이 아닌 인식 형태.

**개인적 결론: 아도르노의 예술적 미메시스 과정 전개, 내 작업 설명하기엔 좋은 개념적 무기인 듯. 결국 예술작품 내적으로 정/반-합 과정을 끊임없이 거치면서, 총체성과 비동일성을 위태위태 유지하면서 나아간다고 해석. 그리고 스탈당의 ‘행복의 약속’이라는 말을 빌려 그 부정성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해석.]




>> Oct 8, 2021

Adorno: Benjamin and the industry of culture

[요약: 기술 복제 시대에 이르러 예술 작품의 상실된 아우라 개념과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벤야민의 입장. vs 이에 반해 이를 예술 작품이 아닌 대중문화산업의 욕구이자 상품으로 보는 비판적 태도의 아도르노.]




>> Oct 8, 2021

a Thought

An interesting point while seeing german windows; different types of windows depending on cultures.

in Seoul,
windows are normally designed to be opened horizontally like a sliding door.

in New York,
windows are designed in a vertical way like sliding up and down, which reminds me of guillotine a bit.😏

in Berlin,
windows are opened in three different ways by the handle.
-the handle turned by 90 degrees -> turned horizontally like a normal door.
-the handle pointing downwards-> closed.
-the handle pointing upwards-> the upper part of hinges is detached and only the upper side of the window is tilted towards me! such an amazing function for ventilating and simultaneously saving the warmness of the room. Even on a rainy day, I can open the window without being exposed by raindrops.

In terms of how people perceive nature and the world through windows, it looks interesting to think of the subtle different mindset/culture toward the world which is out there. (This thought might just come from a situation that I recently became too lazy and enjoy nature safely inside at home rather than going into the nature in person.🙃)




>> Oct 6, 2021

Martin Heidegger: The Truth of Art (related to『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Summary: An overview of Heidegger's view of art; art as a means of revealing the world -> Art provides a new perspective on our existence and constituting the world. His mention of the revelation of the world through works of art, not only in the cognitive dimension but also in the ethical dimension. (It does not, however, lead to ethics, but only imply a bit of it by mentioning Rilke's 'The Duino Elegies') Hegel also mentions the special position of language, especially poetry. Heidegger's concept of 'Earth' -> the role of art that calls for endless thought and the trigger of resistance hidden in works of art. His explanation of how a work of art differs from ordinary objects, and what is the criterion for distinguishing works of art from ordinary objects, by the way in which works of art are revealed, that is, by concealing or stepping back themselves. He also mentions the function of art as the ontological protector in the age of object destruction. (I didn't fully understand this concept, but as my understanding, it may be a story that art can restore the part of destruction and loss caused by 'Reason/Rationality' which is natural born destroyer while recognizing object/existence). Agon; as the Greek concept of self-actualization, contention, and struggle-> inner dynamic energy of works of art = tension -> connected to Kant's kinetic concept of aesthetic experience. Hegel also took the idealistic position of interpreting the work of art as a communal phenomenon rather than an individual's inner appreciation or solitary aesthetic experience. -> his thought of work of art, beauty, and aesthetic experience as just ONE of many means of experiencing the truth. As he said, art transcends human solitude and enables the experience of the community rather than existence itself.
*Personal conclusion: I think that beyond recognizing the world through works of art, it provides an opportunity to reflect on oneself, the subject of that perception, and further expands the sense of community. In this respect, wouldn't it be able to rewrite the history of mankind around art?]




>> Sep 20, 2021

Journal

Oculus quest 3 출시 관련 정보 찾다가 오큘러스 2 우동이라는 연관검색어를 발견. 오큘러스 우동이 뭐지? VR 먹방인가 생각하며 클릭한 결과 야동을 우동으로 우회해서 표현한 것.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정말 절실한 사용자들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구나. 이런 창의적 표현법 너무 유쾌함. 뭔가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의 신선하고도 발랄한 표현의 발견 같음. 👍




>> Sep 18, 2021

Journal

...중략... 신기한 경험. 음악을 감상할 때 연주자의 문화적 배경이나 해석 스타일만 음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플레이 되는 장소, 공간의 맥락과도 연관이 있다는 지점이 흥미롭다.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 당연함을 새로이 경험. 물론 날씨나 자연, 그날의 분위기와 더 혹은 덜 어울리는 음악이 있긴 하지만 한 나라, 한 도시의 고유한 거리 풍경과 특정 음악 장르가 만나 시너지 효과가 더욱 발현된다는 점은 새롭게 몸으로 체험한 지점. 그런 점에서 베를린은 확실히 클래식 음악과 도시 풍경이 매우 잘 맞는다. (아마도 클래식의 본고장인 다른 국가들도 비슷할 것 같지만) 가끔 걸으면서 케이팝이나 다른 팝음악 장르도 듣는데 베를린의 거리 풍경과 이질감은 크게 없지만 뭐랄까 단지 내 안에만, 나 혼자에만 좀 더 몰두하게 된다. 음악을 들으면서 주변을 관찰하거나, 도시 환경과 완벽하게 호흡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묘한 단차가 발생하는 느낌. (클래식처럼 가사가 없는 음악을 들어도 이 경험은 비슷했는데, 뭐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을 듯) 대신 팝음악에서는 기분을 순간 로켓처럼 업 시켜주는 놀라운 효능?은 경험했다. (요즘 지칠 땐 오마이걸 노래를 자주 들음, 컨셉 장인들) 여러모로 음악은 참 대단한 것 같다. 시각 예술과는 또 다른, 계속 탐구해야 할 분야. ...중략...




>> Sep 16, 2021

Quot.
"Stop making art. Do everything else which can be art. Do it mindfully with passion and compassion. but you don’t have to make art to do that you can make better than art."



>> Sep 15, 2021

(다소 늦은 감이 있는) Oculus Quest 2 VR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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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듯이 새로운 영상 작품 감상 플랫폼이 될 것. 시각예술 전시에서 빔 프로젝터나 모니터를 대체할.
-wireless라서 편함.
-내러티브와 경험을 전달하는데 효과적
-음향도 기기에 설치돼서 한 번에 해결(의외로 오큘러스 사운드 음질이나 서라운드? 느낌이 좋아서 놀람)
-감각 전달 측면-> 가장 오래되었지만 최고의 수단인 언어, 네러티브로 온도까지 전달 가능. 오히려 온도도 느낄 수 있게 하면 너무 직접적이라서 작업이 촌스러워질 듯 - 하지만 최근 일본의 뇌연구 랩에서 전자 자극으로 온도를 인지하는 뇌의 부분을 찾았다는 뉴스를 봐서 곧 적용 가능할 수도.
-단지 시각이나 텍스트를 넘어 경험의 공유, 전달 측면에서 굉장한 플랫폼
-요 몇 년 동안 내가 사용해 봤던 VR 기기들의 퀄리티는 너무 낮아서 빔프로젝터나 모니터의 퀄리티보다 더 떨어졌지만, 이 정도면 전시장에서 주로 사용하는 영상기기들을 대체할 수 있는 매체라는 생각이 듦. 심지어 프로젝터보다도 싸다.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아바타를 체험한 느낌. 영화 아바타 처음 나왔을 때 시각에서 느껴지는 감각의 초월이 이 VR 기기에서도 느껴짐. (키 큰 사람의 시선과 공간감이 나와는 이렇게나 다르구나 느낌 ㅋㅋ)

단점은
-시각의 정확한 초점이 해상도와 감도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그 초점을 개개인에게 맞추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림. 안경처럼 한 사람이 그 기기를 여러 번 사용할 거라면 초반에 사용자에게 딱 맞는 초점을 customized 하는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지만 미술 전시장처럼 여러 사람이 한 번만 경험하는 상황에서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제한된 관람객만 감상이 가능할 수도 있음. +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도우미가 필요하고-> 이는 인건비 상승을 의미함.
-그리고 VR 기기가 1시간을 넘어가면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얼굴이 꽉 조이는 압박감 느낌이 강함. 근데 그 압박감은 기기와 얼굴의 밀착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 왜냐하면 해상도/초점과 직결되기 때문. 그리고 화장한 여성 관람객들은 꺼려 할 것. 헤어와 메이크업이 망가지니까. 그래서 전시장이 아니라 집같이 혼자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감상하는 것이 한국에선 더 먹힐 듯. 여기 베를린은 화장 잘 안 하니까 전시장에서 사용해도 괜찮음. +밀착 스펀지 부분 탈착 및 세척 가능-> 위생, 방역 대책 세울 수 있음.
-근데 내가 만족할 수준의 하이퀄리티의 영상작품을 제작하려면 다소 비용이 많이 들 듯 (준 보급형 3D 카메라만 최소 2,000만원이 넘음, 고로 펀딩 필수+영상 길이 10분 안으로)
-녹화하면 해상도 높은 만큼 용량이 어마어마해짐. 예) 20분짜리 하이퀄리티 vr영상 페북으로 업로드하는 데 1시간 걸림. 케이블로는 맥북으로 안 옮겨짐. 윈도우만 가능. what the fuck.
-그리고 오큘러스는 애플이나 구글이 아니라 페북이랑 붙어먹어서 조금 불편함. 걍 애플 글래스를 기다려야 하나?
-전시장에서 사용 시 영상을 함께 감상할 때 형성되는 일시적 공동체 형성이 안됨. 흡사 영화관 vs 넷플릭스
-물론 기기를 사용하는 사람의 뷰를 미러링으로 다른 화면을 통해 공유할 수 있지만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뿐 감각의 공유가 안됨. 대신 관람객 개개인은 영상 감상에 방해 안 받고 초집중 가능. 근데 또 기존 방식, 전시장에서 프로젝팅된 영상작품도 영화관처럼 함께 감상을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독립적으로 감상하니까 그닥 크게 영향을 주진 않을지도.

미래성
-아이폰 초반에 비싼 가격 및 약한 내구성 등 단점이 많았지만 결국 지금 대세 플랫폼이 되었듯이 VR 기기도 보편화되고 대중화될 듯. 그 안에 채워질 컨텐츠들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 초반 아이폰 앱을 애플이 아닌 다양한 사용자들이 만들었듯이 여유 되면 지금 VR컨텐츠 얼른 미리 만들어 놔야 함. 유튜브 초반처럼 곧 컨텐츠 수요 폭발할 듯. 큰 영상 회사들이 제작하는 컨텐츠는 다양성에서 한계가 있음. (물론 나는 내 작업 외에 오락용 영상 제작엔 관심 없음)
-나에게 오큘러스 UX 인터페이스는 직관적이고 쉬워서 적응이라고 할 시간도 필요 없었음. 노트북 쓰듯 원하는 대로 바로 사용. 근데 고령층 관람객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음. 감도 조절이나 커서 스피드 컨트롤을 어려워할 수도 있을 것 같음. 예를 들어 아이폰은 고령층에겐 다소 어려움. 그래서 고령층으로 갈수록 삼성 갤럭시를 더 많이 씀. 갤럭시는 촌스럽지만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사용하기 쉬움. 이런 면에서 오큘러스는 촌스럽지도 않고 직관적인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듯. 근데 주관적 견해라서 나중에 아빠한테 실험을 좀 해봐야겠음.




>> Sep 12, 2021

Journal

한국 밖에서 한국인을 마주치면 순간 느껴지는 애매모호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중략... 한국어로 대화하면 나에게서 무의식적으로 유교사상이 주입된 행동과 말투가 나타난다. 영어로 대화할 땐 동등한 관계로 대화하는 것 같은데 한국어로 대화하면 미묘한 Hierarchy가 생긴다. 상대방의 나이나 성별 등에 따라서 말 표현도 더 조심하게 되고 나의 본 모습을 조금은 숨기게 되는 느낌이다. 아주 가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 고작 몇 개의 단어나 인사말 정도를 할 줄 아는 -을 만나도 순간 흠칫 놀라며 유교적으로 반응하게 된다.ㅋㅋ 그렇지만 또 한 번 가까워지면 순식간에 가족이 되어버린다. 뭐지 이 한국어 사용자들을 만날 때 형성되는 미묘한 관계는?




>> Sep 12, 2021

Sandstrum - And Then There Was Dust
Galerie im Körnerpark

Rotor, video work, 2020 _ Kerem Ozan Bayraktar

-Particle, 먼지 dust 에 대한 여러가지 단상들( 사하라 사막-> 아마존으로 대서양을 넘어서 날아가는 먼지들, 미군폭격으로 인한 먼지 입자.
-Violence를 입자로 1700년대의 프린팅 기법 aquatint으로 캡쳐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이 흥미로움 ->개념을 물질로 변환하는 부분에서.
-‘The body now exists as a spaghetti in a circular space, not a singular’ point. 요 부분도 초끈이론 연상시켜서 좀 흥미로움.
-편집, 이미지 구성, 가독성이 떨어지는 텍스트가 조금 아쉽지만 내용이 상쇄함.

그 외 기타 작품들
AI-Mashoof, 2020_ Tehran Platform (Mehran Davari, Nilooffar Najafi, Elmira Shirvani)

Fields on Fire, Urfa (North Mesopotamia), 2015_ Sinem Disli

Sandsturm Netzwerk, 2020_Elisabeth Deàk und Sarah Maske

Tehran Monoxide Project Photographs_Negar Farajiani



>> Sep 12, 2021

Journal

I’ve recently found myself telling friends this often.
"The number of friends doesn’t matter. The quality of friends matters.” 너무 늙다구리처럼 들리려나? 근데 사실인 걸.




>> Sep 10, 2021

Nietzsche: philosophical Aestheticism / 철학의 심미화
[요약: 철학의 심미화-> 자아의 심미화까지 가능하다고 봄. 이미 쫑난 칸트의 취미개념 재도입. 그리고 이런 취미 개념 재도입의 개념적 구멍들(feat.하버마스의 비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미학에서 새롭게 이룩한 부분 설명. 그리고 곧바로 이런 니체 주장은 2가지 이유로 공격 당함-> 1) 신칸트주의 관점에선 미학이 더 엄밀하게 규정되어 철학의 하위 분야에 머물러야한다고 주장. 2) 개인화된 자아의 심미화는 예술을 통한 더 큰 사회적 공통체 경험 제공을 더이상 어렵게 만듦. (예전 부르주아사회의 개인주의 역사적 사례로 니체 까버림)]




>> Sep 9, 2021

Nietzsche: Positivism transition / 실증주의적 과도기

[Summary: Nietzsche's Changed Perspective on aesthetics and fine arts=> The role and the task of aesthetics that search for philosophical truth in fine art were changed by breaking up with fine art. Transition to find beautiful aspects(kind of aestheticization?) in all other philosophical fields, rather than finding aesthetics within fine art. is it like making philosophy itself an artwork without going through a work of art?]




>> Sep 5, 2021

Nietzsche: The Birth of Tragedy / 비극의 탄생

[summary: While going through Positivism, Nietzsche went beyond the connection between Art philosophy(Aesthetics) and fine art. Even he moved beyond fine art toward a broader concept, culture. His book, 'The Birth of Tragedy' encompassed Nietzsche's early thoughts on art philosophy and aesthetics. By comparing the Apollonian and the Dionysian, he found the meaning of art in the latter. *Personal Conclusion: kind of rethinking the reason why I should continue doing my work and art.]




>> Sep 3, 2021

Journal

My current german teacher seemed a bit confused to call my name ‘Jiwoon’ so I said, if you call my name really fast it sounds like June so you can call me ‘June’ instead of ‘Ji ōōōōōōn’. (which is also interesting b/c June is exactly my father’s name)

Yesterday’s class, she started calling me Yune, which sounds like my last name, ‘Yoon’. I was a bit confused and thought like ‘is she calling my last name? und warum?’

I got to this conclusion. J in german pronounces like Y in English so it may be the reason why she pronounced June as Yune.

So in a nutshell,
Ji Woon -> Jiwoon -> June -> Yune
(그럼 독일에서 내 풀네임 발음은 윤 윤이 되는건가?ㅋㅋ)

to correct this, should I suggest another name?
like Gun or Zun. Or I can just use Jun+g like Carl Jung and pretend to have some relation to the german in my family tree. 😏





>> Sep 2, 2021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식물학의 아버지
1493 목판화. Source: Nuremberg Chronicle. Public domain.
색칠을 누가 저따위로 한거냐



>> Aug 31, 2021

Kierkegaard

[Summary: Attempts to link art and ethics with aesthetics as a way of existence were laudable, but the process and results were terribly bad. The author of this book is very critical of Kierkegaard. Perhaps it is because the author is an idealist. Seemed like he added Kierkegaard chapter in order to explain Nietzsche in the next chapter. Despite the title of the father of existentialism, he is almost like a hidden antagonist in aesthetics. He deserves thanks from the idealist. e.g. in soccer play, it's like scoring a suicide goal. **Personal Conclusion; if you focus too much on indoctrinated religion, your genius potential can be shrunk. Wasted time reading this whole chapter, but Kierkegaard is, at least, good-looking, so I forgive him.]




>> Aug 31, 2021

일기

카톡으로 생존신고 통화 중

나: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교육 체계가 나랑 너무 안 맞았던 것 같아.
엄마: 한국 사람들은 다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

엄마한테 팩트로 뼈 맞고 정신 차림.




>> Aug 28, 2021

a Thought

정말 자본력 없이는 좋은 예술이 나올 가능성이 낮을까?
이 질문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질문은 무엇이 좋은 예술, 좋은 작품인지 정의 내려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좋은 예술로 정의된 작품의 전시 및 출현의 빈도수를 지역, 나라별로 조사하고 그 후에 국가 혹은 기업의 자본력과의 연관성을 연구해보아야 한다.

그 뒤 후행 연구로는 역사적 시대별 자본의 축적, 자본력과 좋은 작품의 출현과의 연관성도 흥미로운 연구주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무엇이 좋은 작품으로 결정지을까? 가치판단은 주관의 영역이지만 분명히 공통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좋은 작품의 조건이 있다. 통계학적으로 접근하면 따분해질 테지만 그래도 수치와 글자로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날씨나 주식을 예측하고 컨트롤하는 느낌이랄까.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은 가능한.

가능할까?




>> Aug 27, 2021

a Thought

아트는 없고 아트마케팅만 남겠구나.
emerging 아티스트는 영원히 emerging으로만 남을테고.

라틴은 라틴끼리 블랙 아메리칸은 블랙 아메리칸, 블랙 아프리칸까지 포섭하고 뭉치는데 아시아는 왜 죄다 분열돼서 각자도생하는걸까.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모두 함께 커뮤니티를 더 활발하게 형성해야하는 거 아닐까?

이러다 아시아 작가들은 좋은 스팟 다 뺏기고 중간 인터벌에만 잠깐씩 비추는 포지션에 영영 머물게 될까 다소 염려스럽다.




>> Aug 25, 2021

Schopenhauer: From architecture to music

[요약: 예술형식의 체계 중 건축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 예술형식의 위계=자연의 위계, 음악을 예술의 위계에서 최고로 봄. 이유: 의지를 매개없이 객관화하고 그 의지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 칸트와 완전 반대. 칸트의 예술 위계를 전복시킴. 그는 음악이 개념으로 전환될 수 있다면 진정한 철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함. 쇼펜하우어의 미학은 헤겔과 같은 관념론자들의 미학과 정반대. 공동체 전체의 일부로서의 개인의 기여보다 개인의 경험 자체를 강조(라고 나는 이해함)]




>> Aug 24, 2021

Schopenhauer: the objective genius's point of view

[요약: 미적 경험이 가능한 필요조건-이념의 인식, 의지로부터의 해방, 미- 과 그 미적 경험을 매개하는 예술 작품. 그 제대로 된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건 천재만 가능. 예술 창작+수용에서 의지 또 강조. 존재론적 관점에서 쇼펜하우어의 견해; 예술이 다른 사물과 다르다고 봄. 그리고 미학에서 예술을 특별한 것으로 보았던 그의 견해와 다시 예술이 그 특권적 위치를 잃어버리게하는 그의 모순된 견해.]





>> Aug 22, 2021

Schopenhauer (1788~1860):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Summary: A brief description of Schopenhauer's metaphysical system = “Nevertheless (as the Will)”. Flipping the Western philosophical traditions of Plato and Descartes, which places 'Reason/Logos' as the first priority. Will>>>>>Reason/Logos. Only one means of accessing both the Reason and the Will = Art. Philosophy guides the way to the awareness of these Reason and Will, but only aesthetic contemplation can achieve it. Art as an alleviation of pain. Separation of Ideology and Concept. In the end, he also sees Art as episteme -> falls into the contradiction that leads to the following question; which one precedes out between sensation and perception. (Infinite retroactivity). The big hole in his thesis = fails to explain exactly what the art of aesthetic experience functions.]




>> Aug 21, 2021

a Thought
Maududi(provided the ideological and systemic back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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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opinion
-At least shouldn't the British feel a little bit of the responsibility about this issue? as descendants of the British Empire, who established a colonial business in India.
-Felt like the early independence process of India developed in a similar pattern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political turmoil that occurred after liberation. It feels a bit like Maududi is playing the role of Kim Il-sung and Jamiat like Kim Gu. (In terms of Pakistan-Indian Relations)
-Although there is a slight difference, I think that what Catholicism or Christianity had done in Middle-Modern Western Europe seems to be happening inside of Islam now.
-The use of religion or doctrine- Regardless of the creator's intentions - seems to depend on the users' intention.
-Because it is difficult to make a living, isn't there a tendency to cling to religion and extremism? Plus, that difficulty in making a living may have stemmed from the colonial rule of the British Empire in the past.
-Understood the ideological and theoretical foundations of the Televan, al-Qaeda, and (possibly including IS) to some extent.
-Here is the next question; Who is funding this fight? It's obvious they have no facilities to make weapons themselves.

Who is financing weapons and money illegally? or legally in the disguise of illegality? Who will get the most benefit through this fight?
-Lessons learned from the mistakes of the US military: making sure to get back every single weapon you've lent.
-extra thing to remember: Pakistan has nuclear weapons.




>> Aug 20, 2021

Hegel: Ugliness in Art
[Summary: ‘The Ugliness’ added to the aesthetic theory. List of numerous references from scholars who studied the Ugliness including Hegel's disciples. The unique function and meaning of Ugliness in art; The Ugliness does not return to the Beauty but moves toward the Comicality. Karl Rosenkrantz's contribution to establishing the independence of 'Aesthetics of Ugliness' departing from Hegelianism.]




>> Aug 19, 2021

a Thought

다수의 사람들이 주로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들, 예를 들어 고흐, 피카소 등등 다소 대중적인 전시를 보고 나서 좋았다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는데, 정확히 어떤 점이 좋았다는 건지 궁금하다. (대체로 감상을 자세히 안 써서 매우 궁금. 그냥 전시가 좋았다고 퉁치지 말고 디테일한 설명을 덧붙이면 좋을 듯) ...중략...
+22/08/2021
헤겔의 예술의 종말 부분 읽은 후, 이해가 좀 된다. 예술에서 진리를 찾던 시기의 예술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일 수도. 헤겔이 선언한 종말, 그 이후의 예술에선 더 이상 예술이 진리를 대변하지 않음.




>> Aug 18, 2021

a Thought

개인 정보에 대한 독일인들의 민감성에 대한 생각. Datenschutz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개인 정보에 민감한 편인 우리나라도 독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여겨질 정도. 얼마 전 그 이유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했었는데, (단기간에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서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남) 암튼 그 배경이 너무 흥미로웠다.

서독 동독 시절, 서로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오가는 스파이가 그렇게 많았고 그러한 역사적 이유로 독일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본인들의 개인 정보를 노출하는 것을 너무 꺼려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페이스북에서도 이름은 그대로 쓰나 성은 가짜로 쓰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북한의 간첩신고와 같은 광고판을 시골같이 외진 곳- 심지어 파주 쪽에서도 본 것 같음- 을 지나가다 보면 가끔 볼 수 있는데, 한국 사회는 이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인 것 같다. 오히려 만화나 영화,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의 흥미로운 소재로 활용되는 것을 보면. thought-provoking 하는 지점이 있어서 글로 남겨 봄.

추가로 여기선 태어난 곳 Geburtsort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아직 이야기를 못해봐서 이유가 궁금함.

+Oct 27, 2021
한국과 다르게 여기선 IT나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다소 거부감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다른 독일인에게 물어본 바; 제조업이 발달한 독일에선 과정을 눈과 손으로 확인할 수 없는 Digitalisierung 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함.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두려움. 그리고 노령화.




>> Aug 18, 2021

말장난/Pun
colorized photos
colonized photos



>> Aug 16, 2021

Hegel: The End of Art?

[요약: 헤겔에 이르러 철학적 진리를 추구하던 수단으로써의 기존 예술이 끝나고 예술의 독립이 시작됨. 단순히 관조적 차원에 머무는 예술을 넘어 결정의 단계로 진입. (개인적으로 요 부분이 현대미술에서 thought-provoking의 면을 암시한 게 아닐까 싶음) 그리고 헤겔의 미학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보충되어야 할 부분; 단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이상의 예술현상, 즉 추와 그로테스크까지 포괄하는 예술로 확장될 필요성 언급. 셸링이 주장한 총체성의 진리가 아니라 -그런 진리는 철학에서 찾는 편이 오히려 적합함- 다면성의 진리, 개개인들 속의 진리, 사회의 인륜성은 예술에서 더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음. 독자의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 철학 명제에 반해, 예술은 작품 내부에 질문과 대답의 해석학적 구조, 즉 관객의 반응을 요구하는 면을 가지고 있음.]




>> Aug 14, 2021

Hegel: Art History and Forms of Art

[Summary: An overview of Hegel's three parts of Aesthetics. / Part 1 is about the form of art. Attempts to connect the art form [Kunstformen] and the historical aspect [Weltanschauungen] -> His thought that the progress in art is a narrative made in history, which in general was moving forward to a climax. / Part 2 develops an art system similar to Schelling's 'Philosophy of Art'. He unfolded the chronology of art in main stages ; symbolic -> classical -> romantic art. Plus, criticism on his omission of art after the Middle Ages. / Part 3 is about the systematic classification of art. Mention painting, music, and poetry as examples of romantic art.]




>> Aug 13, 2021

Zheng Bo: Wanwu Council 萬物社
Gropius Bau, Berlin
The Political Life of Plants 植物的政治生活 1 (2021)

Wanwu Council 萬物社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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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ring human movement with the flexible movement of plants; plant is flexible because its root is fixed to the ground. On the other hand, humans' body is stable because we can move. 사람의 움직임과 식물의 플랙시블한 움직임을 비교; 식물은 땅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이 flexible 함. 반면 인간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몸이 stable 함.
-dialogical life
-Black & White-> 촬영 시간대를 모호하게 보이도록 함. positive/negative로 필름을 반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함.
-이 작업은 사운드가 다했다. 이미지만 보여줬으면 다소 심심했을듯
-식물과 정치를 연결해보려고 한 지점은 흥미로움.
-Interview: “How Do Plants Practice Politics?”
-나갈 때 사운드 아티스트 체크-> Sound design and music: Filip Caranica & Contemporary Sound
-Symbiosis, 식물들의 관계, 서로 죽이기도 함, 그치만 공생관계.
-식물들의 의식여부 cognition of plants
-식물들이 하나로 함께 합쳐져서 자라지 않고 왜 각자 independent로 자랐을까? 그리고 이걸 사람에게 적용하면? 식물의 life-span 을 고려하면,시간의 길이, 진화관점에서, 시간의 속도와 진화, 그리고 생명력 삶의 길이의 관계.
*기타 다른 드로잉 및 설치 작품도 많았는데 그냥 그랬음.




>> Aug 10, 2021

Hegel: The Truth of Nature and the Work of Art

[Summary: Hegel's views and mentions on the Work of Art.
-Putting artistic beauty over natural beauty in terms of the spirit.
-His opinion that the work of art does not include spirit and nature but is located in between the two.
-The difference between the truth of philosophy and the truth of art- remaining only in the senses.
-How the virtual phenomenon of art reveals the essence of the object. And that is one of a kind function of art (but in my view, it still sees art as a tool of manifestation of the spirit).
-The work of art can be reflective, but cannot provide moral standards.
-How Aesthetics is different from Poetics.
-His view that the reflection on the work of art is a philosophical task, as opposed to the romantics' philosophers who thought it should be aesthetic itself.
-Criticism of the concept of mimesis for three reasons.
-Conclusion: The importance of works of art as social beings and of questions and conversations through them.
-My own conclusion: have a long way to get to Adorno.]




>> Aug 7, 2021

Yayoi Kusama: A Retrospective
Gropius Bau in Berlin

-베를린에서 하도 회자가 많이 되길래 운 좋게 취소된 티켓 겟 해서 한번 가 봄.
-숙제 마친 기분. 아휴 홀가분하다.
-나름 회고전인데 이 좋은 공간을 왜 이렇게 밖에 전시 구성을 못했을까. 조금 아쉬움.
-그리고 그로피우스 바우 공간이 좋긴 한데 뭔가 촌스러움이 공존함. 왜 때문일까?





>> Aug 7, 2021

Hegel (1770~1831)

[Summary: Before diving into Hegel's philosophy of art in-depth, a general explanation of the background of the time, his thoughts on the art, and why he came to have such thoughts. Plus, how Hegel's philosophy of art can be regarded as a meaningful way nowadays. (As mentioned before, however, I cannot fully agree with Hegel's thought on the work of art)]




>> Aug 6, 2021

Schelling: Irony

[summary: The traditional concept of irony: a means of subverting literal meaning, and a serious pursuit of knowledge as Socratic's method of communication.
vs
The Concept of romantic irony: no obvious consequences. Lack of potential to capture concepts or truths. Instead, it moves from an unstable and unfinished state to Infinity. The ego fails to reach self-awareness/certainty and remains the object of escaping (romantic) aspirations. Not in a stable position and the continuous subversion. A sense of constant change and the power of its negativity. Philosophy as its description, and art as its practice. The role/recognition function of art through romantic irony-> The foundation of academic truth that reveals the truth. Therefore, art precedes academic truth. Heidegger, Adorno, and Horkheimer defend this tendency to regard art as the manifestation of truth. On the other hand, Hegel feels that this role of art subverts the hierarchy of philosophy and art.]




>> Aug 5, 2021

Schelling: The Philosophy of Art

[Summary: Description of Schelling's changing position on the function and place of art in philosophy. The conclusion; he puts art below religion in the solid union of art and religion; Moving on to Neoplatonism. (Retrogression from my point of view) Schelling's opinion that the interpretation of the art which makes the presence of the religious Infinity being, God is entirely possible only through the philosopher. +Manfred Frank, who raises questions about that, and on the contrast, Hegel, who succeeds and develops this Schelling's thought.]




>> Jul 30, 2021

‘Redemption Now’ _ Yael Bartana
Jüdisches Museum in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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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올해 작품 ‘Malka Germania’랑 2019년 작품 ‘The Undertaker’만 좀 볼만함
-조금만 플로우가 빨랐다면 더 흡입력이 있었을 것 같음
-이스터에그 많음, 역사, 종교, 신화 등 읽을 레이어가 많아서 재밌음
-이질적인 요소들(메시아, 숲속 무용수, 뜬금포 리듬체조, 군인들 어택, 히브리어, 백인남자 운동선수, 해변가, 나치가 지으려고 하던 돔)의 결합으로 어떤 지점을 이야기 하려고 한 건지는 머릿속에서 계속 로딩 중
-뒤로 갈수록 픽션에서 일상으로 돌아옴, 언어도 이제 좀 섞여 나옴, 앞에는 무음성, 사운드만 있음
-메시아가 점점 인간이 되어가고 있나? 사람에 동화되는 느낌
-엔딩을 어떻게 맺을지 궁금
-언어가 모두 독일어에서 히브리어로 바뀌어감
-자연스럽게 엔딩이 시작과 연결되어 루핑됨. 끝과 시작이 모호함.
+8/4, 2021
An article about Yael Bartana’s work, ‘Malka Germania’(2021) --> Link (Thanks to Rola)


*etc.
-The black ceiling inside the building. The white walls. The slightly slanted floor, made of dark gray bumpy stones. -> Formation of strange tension and anxiety. and a well-organized composition of the contrast of the sense of freedom and serenity when you go out to the outdoor sculpture space, which you finally get after going through all these paths of tensions. The first visit from 10 years ago, I felt that it was just an amazing space overwhelming me, but now felt the narrative within it so intense that I could only stay inside the building no longer than 5mins.
-respect Arendt so much.

in Korean

*그외 기타
-건물 내부 천장이 검은색. 벽은 흰색. 기울어진 바닥은 진회색 울퉁불퉁한 돌-> 기묘한 긴장감 형성, 불안감, 그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갔을 때의 해방감 평온함의 대비가 굉장히 잘 구성되어 있음. 10년 전에는 그냥 압도되는 멋있는 공간이다라고만 느꼈는데, 이제 그 안의 내러티브가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건물 내부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음.
-역시 나는 아렌트 덕후.



*+an interesting video work. but there was no caption, so I couldn’t figure out the name of the artist and the work.


*‘Drummerrsss(2020)’, Gilad Ratman - Bird eye view is always interesting.
+8/7, 2021 엥? another Columbia alumni. what a small world.




>> Jul 27, 2021

일기

과거의 나의 잘못을 복기하는 것은 굉장히 괴롭고 자칫하면 자기 파괴의 길로 빠질 수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회피하지 말자.

잘못과 용서, 그리고 화해의 과정을 거친 후의 관계는 더욱더 돈독해진다.




>> Jul 25, 2021

Journal

While having dinner with Gizem, had a chat about the distinction of sex (☝️not the sexual discrimination).

dominant gender in society
obviously, for now, until now, it's Caucasian straight christian male.
diverse depending on countries, cultures, and history though.
power game between genders, which gender will be sitting on the control tower. (might be an old-fashioned controversial theme, but still ongoing)

[jump]

At the very first advent of human life/society(when even they didn't get on their pants or shoes), women's side would probably have a more strong voice on guiding the society/people because women only can spread the gene- of course, now we have enough skills that men can also incubate embryo in their body but that's the other subject to discuss - and production of the human being, which is the main algorithm/coding of men's gene(as well as women)
so here is my question: then because of what, when, which factors did affect the deciding/switching of dominant gender role in society?

[jump]

Biological fact. {heard from Gizem (also she heard from someone else/I'm so lazy to go through a fact check on the Internet so will just spill it out.)}

Women' side: having only X chromosome
Men' side: having two types of sperms, X or Y chromosome
The sex of an embryo is decided by this combination of the number of chromosomes.
but for some reason, at the very first phase of the embryo,
The sex of an embryo could not be settled down on two dominant sexes(fe-/male). and it could remain to stay in the middle zone where there could be other various sexes, which can be revealed after coming out to the world.

[jump]

if we apply this case to the political situation among countries/classes/race/religion or whatever, the world is not existing by two poles. polarization. (or Singularity, or totalitarianism)

[jump]

but most people seem to feel more secure within these simple structures. in a dilemma. hmmm.




>> Jul 24, 2021

Schelling: System of Transcendental Idealism

[Summary: An overview of Schelling's book, ‘The Transcendental Idealism System’. Attempts of the combination of Nature and Transcendence => Totality. An attempt to regain the practice of awareness and the revival of self-reflection from beauty and art. Whether it is possible to educate the sense of beauty to humans. A description of artworks that enable 'Telos' of dimensions unattainable through nature. Fichte-> Artworks as an 'intellectual intuition' that can approach the Absolute. A mention of the importance of Hölderlin's role in this aesthetics thought. A mention of what could be obtained from the artworks through the inner process/logic and ‘the potential of self-intuition’ of the artworks. The direction where art should head to and ‘poetry’ as the acme in this art. Schelling's concept of 'new myth' -> The role of mediating art and social reality/politics.]




>> Jul 23, 2021

Isabelle Schad - FÜR+ROTATIONS + TURNING SOLO 2
Sophiensaele in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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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eter Hartwig

[1st 퍼포머_ AYA TORAIWA and her hair]
-진자운동, 선에서 볼륨으로
-코헤이 나와 또 생각남
-얼굴을 안 보여 줘서 처음엔 인종 알 수 없음
-머리카락의 활용 smart한 선택 (선, 면, 공간 분할)
-티셔츠의 활용, 목 들어가는 hole을 공간 트랜지션으로 활용
-웃옷을 꼭 벗어야 했을까?
-허밍 소리, 사운드, 어린시절 놀이 회상
-키가 작아서 공간 사용감을 넓히려고 머리카락을 신체의 확장으로 사용한 듯(원피스의 고무고무 열매 먹은 마냥)
-크레센도/데크레센도의 반복, 강해지고 약해지고의 반복, -> rotation이 주제긴 하지만 보기만 하는 관객 입장에선 약간 지루함. 차라리 관객도 같이 참여를 해서 practice 했으면.
-같이 본 친구는 너무 신선했다고 한 반면,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져서인지 나는 다소 다음 무브먼트가 예측 가능해서 충격은 없었음


© Dieter Hartwig

[2nd 퍼포머_ CLAUDIA TOMASI]
-손가락에서 시작
-혼란, 뼈다귀
-선, 몸선의 길쭉한 사용
-감각의 위치가 손에 집중
-손에 중력이 있는 듯 신체조건에 따라 다른 공간감을 만들어냄
-질끈 묶었다가 헤드뱅인 한 것 같은 헤어스타일을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아마추어처럼 보임
-공연 끝자락에 dim light 아래에서 슬로우 비디오처럼 몸의 동작들이 딜레이 되는 듯한 순간, 그리고 완전한 암흑으로 덮힌 후 들리는 퍼포머의 숨소리. 요부분만 볼만했음




>> Jul 23, 2021

Schelling (1775~1854)

[Summary: Schelling elevated the role, position, and assessment of art in philosophy. As a representative Romantic philosopher, his attempt to achieve totality in a philosophical system distinct from Aphorism, and a list of other philosophers who, like Schelling, tried to set up the system. Schelling's notion, 'Romantic art that sees art as a medium of cognition'. As a romantic philosophers' precedent, Johann Georg Hamann ('poetic language' -> translation of cognition based on sensitivity). Hölderlin's aesthetics that had the greatest influence on Schelling; including both the Absolute, which cannot be cognitive rationally and the beauty that makes it possible for the experiential realization of that Absolute. Kant's 'Transcendental ability' to perceive miscellaneous senses as one -> Fichte's 'Ego' as a fundamental being -> on the contrary, Schelling+other Romantic philosophers claim that revealing the basis of the existence of this 'Ego' is a function of the work of art. A description of how Schelling's philosophical aesthetic system shifted from subjective idealism to objective idealism.
Anyway, the conclusion is that Schelling set up the 'System of Transcendental Idealism' that built a bridge between philosophy and art, and later it influenced the lineage of philosophy of art that led to Heidegger and Adorno.]




>> Jul 21, 2021

Schiller: Human Aesthetic Education - Social Criticism on the Present
2) Formal Beauty and historical Beauty

[요약: 두 충동 사이의 매개로써 미적 유희충동의 중요성 다시 강조, + 미를 통한 자유 개념에 대한 설명. 이런 미적 경험, 미학 체계를 정치체계의 자유로 연결(중요!), 실러의 아름다움에서 얻는 즐거움=사랑 개념으로 연결 -> 사랑은 또 통일성 개념과 연결, 실러 이전의 사랑 개념 사례 나열을 통해 역사적 편입 시도- 플로티노스, 칼 필립 모리츠. 결론 사랑을 통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공동체적 연대감 가능성.
실러 이후 영향받은 사람들: 횔덜린, 셸링, 헤겔
피히테의 자유관념=교육적(논문 자료로 중요!) 이에 반해 실러는 일반적인 감각교육 대신에 미적 교육을 구상함. 예술vs현실, 미적 가상vs실제-> 별개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
이런 예술vs현실의 구분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실러의 이런 미적 교육에 대한 피히테의 비판
+이후 셸링과 헤겔이 이러한 현실과 예술의 가상의 이원적 분리를 사변적 관념론(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논리적 사고만으로 현실 또는 사물을 인식하려는 일)으로 설득하려고 시도로 이어짐]




>> Jul 20, 2021




>> Jul 18, 2021

Schiller: Human Aesthetic Education - Social Criticism on the Present
1) 충동이론

[요약: 실러의 충동 이론의 설명과 이 이론 형성에 영향을 준 피히테의 욕구 모델. 질료/감각 충동(감각을 통한 외부 정보 인풋) <------유희 충동이 매개-----> 형식 충동(자아형성, 그 인풋을 나름대로 프로세스한 결과로써 행동의 근거인 논리와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함)

예술이 매개할 수 있는 두 개의 대립쌍
1) 자연 국가/인간 vs 이상 국가/인간
:이 대립은 모더니티 비판에서 출발해서 역사에 근거함

2) 감성 vs 이성, 변화vs 초시간성, 순수한 나 vs 경험적 나, 물질 vs 정신, 수동성 vs 능동성, 신체 법칙 vs 도덕법칙
: 이 대립은 인간의 생득적 요소에서 기인했기 때문에 피히테의 사행에 의한 해석으로만 역사적 계기를 설명할 수 있음.

결론: 충동은 인간의 본능이라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 없지만, 모더니티가 초래한 분열된 존재 상태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인간이라면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함. => 고로 다음 챕터에서 이어지는 실러의 과제는 유희 충동 속에서 인간의 자연으로 정해진 운명과 역사적 변화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기능들을 찾아냄으로써 미적 교육론의 역사적 측면과 형식적 측면을 매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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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러의’ 미학 편지’
자연 국가-------미적 국가----이상 국가
자연적 인간----미적 인간----이상적 인간
                            (매개)

이런 미를 통한 자연->이상으로의 이행은 충동 이론에서 더욱 발전됨.
이 이론은 피히테의 욕구 모델에 근거함. 도덕철학의 문맥에서 피히테는 자연 충동과 자유 충동, 즉 “순수 충동”은 제3의 충동인 도덕 충동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 실러는 이 기본 모델을 받아들이지만, 세 충동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는 세 번째 충동(도덕 충동)에 관해서 결정적인 변화를 만듦.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상호 보완적이면서 동시에 대립적인 두 충동의 지배를 받음. 첫 번째 충동= 질료 충동Stofftrieb, = 감각 충동sense drive. 이 것을 규정하는 것은 감각, 지각, 에고에 대한 물질 세계의 선차성. 에고는 감각 인상을 조직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감각 충동의 습격으로 끊임없이 위협당함.(like one's own ego is continually decreasing by exposure to or acceptance of external sensory stimuli?) 감각 충동은 추상화나 일반화를 시도하지 않은 채 감각 자극의 개별 사례에 관여함. 감각 충동의 세계는 아무런 규칙도 예증하지 않는 사례들로 가득 차 있음. 감각 충동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은 개성이 결여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상들의 수용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 (So do less Instagram) 논할 만한 개성이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변경, 시간과 변화의 장난에 종속됨. 이러한 에고에게 자유란 없음 - 이는 칸트, 피히테, 실러 모두가 개진했던 주장인데 - 왜냐하면 자아는 인과성에 종속되므로 이전 단계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이전 단계는 또다시 그 이전 단계에 의해 규정되는 식으로 무한히 소급될 수 있기 때문. 이러한 감각적 에고의 세계는 순수한 물질성임. 즉, 이 세계와 감각적 에고의 관계는 수용성의 관계임. 에고는 물리적 필연성, 즉 자연법칙에 수동적으로 내맡겨져 있음. 하지만 감각적 에고가 질료 및 자연의 힘에 이렇듯 종속된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존 형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삶과 역동성, 그리고 미래성의 원리이기도 함. (This part might be the reason why humans should have experienced/been exposed to diverse materiality as much as we can since we are born, in order to develop the sense of materiality. One of the Korean kids I know (about 1-2grad) even didn’t know what soil/dirt is, because nowadays there is no more soil/dirt in playgrounds or schools in the modern area of Korea. She could be a rare case though.)

다른 한편 형식 충동Formtrieb, form drive은 인간의 변화 불가능한 부분으로부터 생김. 자아의 이 부분은 그 자체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어떠한 외부의 인과관계 속에 자신의 기원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피히테가 순수 에고에 대해 주장했던 것처럼 자신의 근거가 되어야 함. 감각적 에고를 규정하는 것이 감각인 데 반해, 자아는 이성의 원리 아래에서 움직임. 자아는 끊임없는 변화에 대립하여 자신의 초시간성atemporality을 주장하며, 질료에 대립하여 형식을 주장함. 감각 충동이 감각 자료들을 받아들인다면, 형식 충동은 그것들에 형식을 새겨 넣음. 후자를 규정하는 것은 질료적 전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정신임. 하지만 정신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의 원리가 됨. 형식 충동의 필연성은 물리적이지 않고 도덕적이며, 자연법칙이 아닌 이성 법칙에 종속됨. 감각 충동은 자아를 세계에 내맡기는 것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더 많은 새로운 대상을 갈구하는 반면에, 형식 충동은 시간 속에 그 대상을 동결시키는 차가운 성질을 지니며 영원한 변화라는 삶의 원리에 대립하는 영원한 형상을 설정함. (feel like being a surgeon dissecting the inside of the brain.. and finding how it works.)

이들 두 충동은 별개의 영역에 거주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없음. 하지만 두 충동 다 “제한을 필요로 하는데”(편지 14), 왜냐하면 어느 한 충동이 제약 없이 발전한다면 이는 결국 자기 파괴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 (I think the Korean education system is so divided by these two drives- sense drive/form drive. And as the text mentioned, it will eventually lead to self-destruction if only one drive is developed without the restriction of the other drive. The increasing rate of suicide in Korean youth is proof of this theory. I believe art can be a medium to be a bridge between these two drives.) 그러므로 실러는 두 충동을 제어하는 힘으로 의지를 설정하는데, 정확히 어디에서 의지 자체가 생겨나는지는 아주 명확하게 설명되지는 않음. “그러므로 일종의 권력으로서 두 충동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의지이지만, 두 충동 중 어느 것도 저절로 상대방에 맞서는 권력으로 작용할 수 없다.”(편지 19) 그럼에도 의지를 수단으로 두 충동을 제어하기만 해서는 충분치 않음. 인간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두 충동은 매개될 필요가 있음.

실러는 이 매개를 유희 충동Spieltrieb, play drive에서 발견. 이는 시간과 초시간성, 생성과 존재, 변화와 동일성을 통일시킬 수 있음. “유희 충동”이라는 바로 그 표현은 미적 경험에서의 인식능력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칸트의 개념과 피히테의 충동 이론을 참조함으로써 칸트와 피히테의 영향을 결합함. “이성은 초월적 근거에서 다음과 같이 요구함. 즉 질료 충동과 형식 충동 사이에는 하나의 결속, 즉 유희 충동이 있어야 함. 왜냐하면 단지 현실과 형식, 우연성과 필연성, 겪음과 자유의 결합만이 인간성의 개념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편지 15) 하지만 이러한 유희 충동은 정확히 미적 원리라고 할 수 있음. 유희라는 말은 아름다움에 대한 관조를 지칭하는데, 이는 인간을 초시간적 법칙과 감각적 욕구 사이에 놓음으로써 그 둘로부터 해방시킴. 인간은 감각의 즐거움과 도덕법칙의 완전성 둘 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미는 그러한 진지함이 부족함 - 미는 유희의 대상임. 유희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감성과 도덕성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그의 완전한 본성을 표현함. 실러의 유명한 문장처럼 “인간은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인 경우에만 유희하며, 그는 유희하는 한에서만 오로지 온전한 인간이다.”(편지15)
(In a nutshell Homo Ludens?)

자연미이건 예술미이건, 미는 인간 능력의 균형을 복구시킴.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적이고 제한된 인간이 긴장 상태에 있거나 피로 상태에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각각의 상태에 따라 그의 힘들 중 어떤 것이 일방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인간존재의 조화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그의 본성의 통일성이 감각적 힘과 정신적 힘의 똑같은 무기력 위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편지 17) 도덕법칙의 요청으로 인해 지나치게 제약되어 있는 인간에게서 미는 감각과의 조화를 회복시킴.(Whether it is because of Confucianism or rapid growth in a short period of time, Korean society is constrained so it tends to pursue only excessively sensuous. it could be also the ground power of K-pop though. There is no middle in Korea, only two extreme poles. Polarization.) 또 활기 없는 인간에게 미는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줌. 미는 두 충동의 매개자이므로 순수하게 경험적인 용어로도, 또 순수하게 초월적인 용어로도 규정될 수 없게 됨. 왜냐하면 미는 두 영역 모두에 참여할 필요가 있기 때문.

실러가 예술이 매개한다고 가정한 두 개의 대립쌍은 - 첫 번째는 자연 국가와 이상 국가, 자연적 인간과 이상적 인간 사이의 대립이며, 두 번째는 감성과 이성, 변화와 초시간성, 순수한 나와 경험적 나, 물질과 정신, 수동성과 능동성, 신체 법칙과 도덕법칙 등 사이의 대립인데 - 분명 또다시 이들 사이의 매개를 필요로 함. 첫 번째 대립쌍이 모더니티 비판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역사에 다소 굳건히 근거하는 반면에, 두 번째 쌍은 인간학적 상수(자연으로 정해진 운명)들과 관련됨. 오직 그것들이 자연으로부터 역사적으로 어렴풋한 인간의 해방 및 - 나와 비아(나 밖의 모든 것)뿐 아니라 순수 자아와 경험적 자아를 분화시키는 - 피히테주의적 사행Tathandlung*에 의한 개별화 과정을 암시하는 한에서만, 어떠한 역사적 계기가 여기에 현존하는 것.
*피히테에게 있어서 사행-> 피히테 지식학의 제1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정립하는 자아의 순수활동을 의미. (사실 그 자체는 아니지만 모든 사실에 앞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 활동) 이는 사유하는 자아와 정립된 현실적 자아가 하나임을, 즉 주체와 객체의 필연적 동일성, 자기의식의 근원적 동일성을 뜻함. 이러한 사행 속에서 자아는 행위하는 자아이자 행위의 산물로, 행위와 사실이 하나로 되는 것. (-> a possibility of the universality of beauty)

그럼에도 이성과 감성, 정신과 물질의 대립은 근대적 현상이라고 하긴 어려움. 달리 말해 충동 이론은 실러의 정치적 비판이나 전망과 어떠한 본질적 연관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정치 프로젝트를 정초(사물의 기초를 잡아 정함)하기 위해 그것들을 한데 모을 필요가 있음. 충동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은 역사적 맥락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없지만, 이에 반해 모더니티가 초래한 분열된 존재 상태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인간은 철저하게 역사적 피조물인 것임. 그러므로 실러의 과제는 유희 충동 속에서 인간학적 상수(자연으로 정해진 운명)이자 역사적 동인(어떤 사태/변화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기능들을 찾아냄으로써 미적 교육론의 역사적 측면과 형식적 측면을 매개하는 것.




>> Jul 17, 2021

Journal

문득 음악은 빛이 없는 곳에서도 보이는 색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에게 통하는.
현대미술과는 달리.
제길.
부럽.

+14/08/2021
이유 찾음:
Hegel 왈 1 -> “그러나 기독교의 영혼은 시각예술에서보다는 음악에서 훨씬 더 많이 표현되는데, 음악은 물질적 토대에 최소한으로 의존하는 그런 예술이기 때문.” 그러니까 음악은 시각예술과 비교하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종교 같은 성질에 좀 더 가까운 것.

Hegel 왈 2 -> 음악에서는 반대 결과. 음악은 칸트가 자유미 범주에 포함시켰던 유일한 예술 형태임. 하지만 칸트는 §54의 논의에서 음악을 가장 저급한 예술로 평가함. “음악은 감각과 유희할 뿐이고” “교화라기보다는 쾌락이며” 모든 예술의 이해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

Kant 왈 -> 칸트에게 음악과 난센스 문학은 둘 다 개념적 인식과 너무 멀어서 한낱 즐거운 것 이상일 수는 없다고 간주됨. 하지만 한편 그는 또한 이러한 반인식적인 미적 즐거움이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평안에 큰 도움을 준다고 주장.

+24/08/2021
Schopenhauer 왈 -> 음악을 예술의 위계에서 최고로 봄. 이유: 의지를 매개없이 객관화하고 그 의지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쇼펜하우어는 예술에서 이념보다 의지를 최우선으로 둠). 칸트와 완전 반대. 칸트의 예술 위계를 전복시킴.

+09/09/2021
니체 왈-> 음악의 경우에 이는 음악이 의지 자체의 계시, 즉 존재의 근거에 대한 비매개적인 접근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언어와 연관됨으로써 음악의 힘이 나온다고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함. 하지만 음악은 의지나 물자체에 관해 결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음.




>> Jul 17, 2021

Schiller: Human Aesthetic Education - Social Criticism on the Present

[요약: 실러의 교육목적으로 예술을 사용하려는 구상/기획. 도덕 국가는 미적 우회를 통해 가능하다고 봄. 하지만 또 국가가 주도하여 이런 프로젝트를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 -> 개인, 자발적, 비조직적인 방식으로만 가능. 실러의 당시 사회상 분석: 개우울-> 해결책 제시: 이상을 향한 미적교육, 아테네 폴리스를 가장 이상적인 예시로 듦(아렌트와 같은 입장인 듯), 미를 통해 자유,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견지->굉장히 정치적. 이런 보다 나은 것을 향한 정치적 도덕적 변화는 취미의 변화를 통해 발생-> 니체와 연결, 근데 실러의 미적철학은 인류의 본성을 탐구한 그 형식적 측면이 없다면 불완전함-> 다음 챕터에서 충동이론으로 뒷받침]




>> Jul 17, 2021

Journal

(유튜브 보다가) NFT 미술 작품 거래에 대한 잡다한 생각.

유화로 그렸든, 디지털로 그렸든, 뭐로 만들었든, 보이는 방식, 재료가 어떻든, 새로운 거래 방식이 생겼고 그것이 몇십억에 거래가 되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 내적 내용과 동기, 논리 등 소위 말하는 ‘작품성’에 집중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 외의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물론 표현방식과 형식-구매자 입장에서 말하면 거래 가능한 형태의 방식-이 내용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형식에 매몰되고 새로운 기술에만 천착한 작품들은 공허하다. 지금 신기하고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새로운 기술은 언젠간 결국 골동품이 된다. 작가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할 수 있지만 그 기술의 유행을 넘어서는 작업을 해야 된다. 신대륙에 깃발 꽂는 것 같은 작업들이 이제는 그다지 와닿지가 않는다. 신대륙 탐험을 포기한 게 아니라 이유와 동력을 잃어버렸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생각한 신대륙의 방향과 달라서 그런 듯. 그리고 혓바닥 길어봤자 결국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자조적, 자기비판적인 요소 있음).

주식에서도 결국 투자할 때 이 분야에 관심이 있고 이쪽 산업이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이 먼저고 그 후에 투자할 회사 리서치가 시작되어야지 이 회사 뜨던데 주식 사면 돈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손익률이 낮다. 그리고 정보도 늦어서 맨날 고점에서 물린다.


“When a collector purchases a work by artist, she/he/they is buying, over and above its aesthetic interest, a milestone in a history on the move. The collector becomes the purchaser of a historical situation.”

NFT 거래 방식이 아트옥션이나 아트마케팅에선 historical situation이긴 할 듯. 하지만 개인적으론 실물 거래에서나 가상 거래에서나 예술이 제품/서비스로 판매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관심이 뚝 떨어짐. 이런 마인드로는 작업으로 돈 벌기는 글렀네.




>> Jul 16, 2021

Journal
맑스주의자들에 대해서 좀 더 파볼 것.
맑스-레닌주의, 유물론materialismus 관련.
나는 아직까진 유물론자인 것 같은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음.



>> Jul 13, 2021

Journal

아빠한테 빌려줬던 드릴 비트 케이스 안 몽당연필. 미술전공자들은 딱 보면 모두 알 텐데 이 연필은 내가 미대입시할 때 쓰던 연필 중 하나였을 것이다. 왜냐면 예고 이후론 쓸 일이 없었거든. 부모님 집, 본가 어딘가에 굴러다니다가 아빠에게 발견되어 용케 몽당연필이 되었구나. 유용함의 영역으로 돌아와서 반갑기도 하고 안심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예전 인터넷에서 중장년 부모님들이 노스페이스 패딩을 갑자기 많이 입으신 시기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중고등학교 자녀들이 유행처럼 너도나도 입고 다니다가 유행이 지나 안 입게 되자 아깝게 여긴 부모님 세대들이 입고 다니며 발생한 중장년 층계의 제2의 노스페이스 유행이라는 웃픈 일화가 떠오름.

이 몽당연필을 보니 흡사 그런 감정이다.




>> Jul 13, 2021

Journal

“동물은 개념에 근거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동물의 세계는 확실히 쾌적은 알지만 아름다움은 일절 없는 것”

동물과 함께 집안에서 생활하고 교감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텐데, 종종 나는 메시 눈을 보면서 ‘나는 네가 나에게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독백+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빌곤 한다.

그렇지만 문득 반려동물들과 반려인들이 정말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면, 반려인들은 더 이상 사회 속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낄 것 같기도 하고. 물론 현실적으론 지적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동물과 대화가 가능해도 다른 사람을 찾겠지만. 사람과 동물의 감성적 지적 소통이 가능한 건 정말 그냥 공상에 불과할까. 우리가 모르는 영역이 있는 건 아닐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혹등고래 humpback whale인데, 이유를 생각해 보면

1. 인간과 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지능
-그렇지만 돌고래는 별로-> 개를 볼 때의 느낌, 가끔 다소 과한 관심과 애정을 요구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 고양이의 도도함은 없음.
-지능으로 따지면 침팬지나 돼지가 더 높지만 침팬지는 뭔가 uncanny valley 때문에 불호인 것 같고, 돼지는 인간의 식용으로의 본능+주입된 선입견 때문인 듯 (근데 또 소는 반려동물로 키우고 싶음)

2. 실제 내 눈으로 못 봄. 바닷속 어딘가 존재하지만 나에겐 미지의 동물임-> 고로 멋있음

3. 압도적으로 크다 -> 고로 멋있음, 대자연의 숭고미

4. 수영 못하는 나에겐 물이 무섭지만 혹여 바닷속에 빠지면 나를 지켜줄 것 같은 무지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이 있음(거의 신급 취급ㅋㅋ) *실제 스쿠버다이버들이 너무 깊은 수심으로 내려가면 혹등고래들이 팔을 흔들어 여기서부턴 너희들은 위험해라고 사인을 보낸 사례가 있다고 한다. 쏘 서윗해 🐋




>> Jul 12, 2021

a Thought

Metaverse 관련.

예전에 공부할 때 한국인 언니들과 함께 식사하며 타지 생활에서 아시아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과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나의 능력- 언어, 지식, 사회성 등-을 떠나서 생득적이고 외적인 요소, 성별, 인종, 국적 등이 제약으로 다가올 때가 있으며 이를 어떻게 대하고 극복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던 것 같다. 막내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무리에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언니들이 설전을 벌이는 걸 그냥 듣다가, 문득 “인종이나 성별 극복 인터넷에선 가능하잖아요?”라고 대답했는데 걍 침묵과 무시로 넘어갔던 ㅋㅋ 적이 있다. 막내의 설움.

근데 요즘 Metaverse가 이슈되는 걸 보니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니었던 걸로 안심이 된다.
진부한 정체성 논란이 흥미로운 정체성 놀이로 전환되는 과정일까?

+7/19, 2021
그리고 직방과 메타버스 손잡았다는 뉴스 보고 갑자기 생각. 결국 메타버스의 핵심은 현실을 가상세계와 결합 혹은 현실을 가상으로 옮겼을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실재와 왜곡/굴절 사이의 간극을 어느 정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표현하는 정도의 차이가 중요하게 될 것 같다. 나쁜 쪽으로 의도하면 사기가 될 수 있을 듯. 개인적인 결론은 기술의 주도권 잡고 있는 사람의 도덕성의 정도가 앞으로 이 분야 방향에 큰 영향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듦.
넓은 의미에서 Metaverse의 예) 보정 많이 한 쇼핑몰 상품 이미지-배송 후 실망,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배달앱 음식 이미지-실물과 다르고 맛없음, 방 구하는 앱에 올라온 집 사진-방문 후 개실망

+인간은 생득적 요소로 태어날 때부터 현실 세계에서 훈련된 감각을 기반으로 가상세계를 감각/인지/구성할 수밖에 없는데 그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들이 메타버스 세계에서 정신적 정서적으로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을까? 흙을 모르는 아이에게 가상세계에서 흙을 어떻게 인지시킬 것인가?




>> Jul 11, 2021

a Thought

문득 다시 AI와 인간 생각.

김영하 작가님이 방송에서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 죽지 않는 점이라고 언급한게 떠오르는데,
받고 그거에 얹어서 물화된 육체가 없는 점도 차이점 중 하나라고 고려하고,
또 받고 엑스 마키나 영화에서처럼 로봇 몸 만들어 주고,
AI 프로그래밍 할 때, 인간의 죽음 대신에 정보저장능력을 제거한, 매일 초기화, 리셋되는 인공지능 로봇 만들어보면 어떤 결과값이 나올지 궁금.

즉 치매걸린 인공지능 로봇.

+03/09/2021
What would be the result if we create an AI that has the limited life of the battery or electrically limited connected charging instead of initializing the AI's memory every day? Plus, what if we let the AI be aware of it? As the offsetting of human's fate, death.




>> Jul 11, 2021

Journal
시사기획 창 - 호주, 중국에 맞서다
[요약: 세계질서 변화와 중국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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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들 싸움에 새우등 안 터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새우들 10억마리 모여서 고래 모양 형성해야하나.
고래 꼬리 스매시 한 방에 다시 해체되겠지?
아니 우리나라는 그래도 랍스터정도는 되려나?
+중국이랑 마찰 때문에 호주 랍스터 싸졌다는데 우리나라가 좀 팔아주자.




>> Jul 10, 2021

Journal
우와 올해 첫 매미 소리 들은 날.
요즘 도심에선 매미 소리 듣기 어려운데 운이 좋았다.



>> Jul 9, 2021

a Thought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강한 신념이든 느슨한 신념이든 religion을 가진 사람들은 어떠한 엄청난 아픔, 고통을 경험 후 종교를 갖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마음 둘 곳이 없어 그것에 의존 또는 도움을 받는 건 아닐까 하는 짐작(신앙자가 아니라서 가늠을 못하겠다). 하지만 예전 남자친구들 중 한 어머니께서 내게 종교가 있는지 물었고 나의 가족은 있(었) 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없다고 하자 다소 안심한 표정을 지으시며 (참고로 그분은 불교) 종교가 없는 게 좋을 수도 있다 혹은 종교가 없어도 되는 삶을 살아온 것에 긍정적인 뉘앙스의 말을 하셨던걸 들은 경험이 있어서 더욱 종교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역치의 관계에 대해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책 읽다 갑자기 생각 점프)

이와 관련하여 문득 서양사를 관통하며 찬란한 문화와 흑역사를 동시에 제공한 종교를 그 다지 큰 종교전쟁이 없던 아시아의 그것과 비교하면 무엇이 당시의 서양 사람들, 서양 체제를 종교에 그렇게 지배받고 의존하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진다. 아시아 대륙에선 경험하지 못한 척박한 환경이나 종교가 없으면 버틸 수 없던 엄청난 고통이 그들의 삶과 역사 초창기에 있었던 건가? 유럽으로 퉁치는 서양 대륙의 고통과 동아시아 대륙(아직은 내가 자란 아시아 밖에 비교할 데이터가 없다)의 고통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체계적 ‘신’과 분산적 ‘미신’의 차이일까? 체계적인 주술도 있을 수 있잖아(그게 컴퓨터 코딩이지 뭐). 무속신앙, 민간신앙- 삼신할머니, 성주신 등등(혹자는 미술계에서 이미 유행이 지난 주제라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신념체계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으론 작업으로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대중적 영화나 여러 작가들 작품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기 때문에 단순히 유행을 넘어 이젠 클래식으로 편입되어야 할 듯). 물론 아시아도 유교의 영향권 아래 있지만 유교는 종교보단 좀 더 철학과 가깝다고 생각(종교와 같은 기능을 하긴 했지만)
전화받고 오니 글의 흐름이 끊겼다.. 음 질문의 결론은 다소 학부생스럽지만, 인간/사회는 왜 종교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은 인간/사회는 무엇이 다른가?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은 이미 예전에 읽었으나 날카로운 메스 같은 과학적 접근 말고 뜸뜨고 침술 놓는 것 같은 사람에 대해 좀 더 따뜻한 시선을 가진 다른 해석이 있었으면 한다.




>> Jul 8, 2021

Journal
요즘 현대미술에 대한 나의 태도, 상태, 마음가짐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프리즌 아키텍처라는 게임을 3일 밤새서 하고 끝낸 적이 있는데,
게임 안에 낮과 밤이 설정되어 매일 아침 일정 수의 죄수들이 들어옴.
그들이 지낼 교도소를 짓고 간수들을 배치하고 교정시설 짓고, 운동장 짓고, 식당 짓고 CCTV를 적절한 곳에 설치하는 등의 시뮬레이션 게임임.
근데 그 것을 체계적으로 잘 관리하지 못하면 죄수들이 만족도가 내려가거나 탈옥하고, 폭동 일으키고 엉망이 됨. 그 밸런스를 잡는데 3일 밤을 샛음. 그리고 내가 더이상 관여하지 않아도 게임이 안정적으로 알아서 잘 돌아갔음. 그리고 게임을 그만 둠.
즉, 시뮬레이션 게임이지만 엔딩 비스무리한 것을 본 것임.

그리고 게임을 지워버렸음.

이때의 경험과 지금 내 상태가 비슷함.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엔딩을 본 것 같음. 이제 다른 게임 해보고 싶어짐.




>> Jul 7, 2021

Journal
요즘 마음에 가득찬 생각.
예술적 지각, 감각과 인식 사이에서 다시 요동치는 마음. Back to the basic.



>> Jul 5, 2021

a Thought
우주와 내장 사이-감각이 존재하는 곳
Between the universe and the gut - where the senses exist

인간 형태의 아름다움, 그의 얼굴의 매혹적인 곡선을 이루는 특징들과 즐거움을 주는 색들은 마치 외적인 껍데기로 주조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것들은 그저 우리의 감각만큼만 지속될 따름이다. 피부 아래에는 끔찍한 형태들이 숨겨져 있다. 모든 혈관은 외관상 아무런 질서 없이 뒤엉켜 있다. 내장들은 서로 균형을 이루지만, 조화롭지는 않다. 아주 다양하지만어디에서도 통일성은 없다. 수 많은 작용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작용의 용이함은 없다. 만약 미가 창조자의 유일한 목적이었다면, 그는 얼마나 커다란 실패를 했단 말인가! (‘감각에 대한 편지’, 59)



>> Jun 9, 2021

a Thought

예전 시간 드로잉 관련하여,
Vergangenheit ------> Gegenwart <------Zukunft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여 앞뒤로 만만치 않은 투쟁을 하고 있는 Kafka의 ‘그’가 투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은 초월자의 위치, 즉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난 심판의 위치에 있을 때뿐이다. Kafka의 시간 우화에는 전선의 시간과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 있다.

초월자의 위치,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난 심판의 위치,
archimedischer Punkt/아르키메데스의 점
The view of Franz Kafka/프란츠 카프카의 시선




>> Jun 8, 2021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_ Yang, Chang-Ah
3장 쫓겨난 자들의 관계: 신체의 요구와 공통 감각의 생성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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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는 슬픔의 서사에서 타자와의 관계 덕분에 결코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주체의 존재를 발견하고, 자기 지식의 한계를 시인하는 그와 같은 주체를 우리 시대의 정치적 주체로 재구성해낸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정치적 주체는 어떻게 행위하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떠오르지만 그에 대답하기 전에 이러한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인 관계성에 대해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 절에서 ‘자기 목소리로 설명하기’를 다루면서 우리는 화자가 공적 장에서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편견 또는 오류 가능성을 확인함을 보았다. 여기서는 버틀러가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를 분석하면서 근본적인 타자 의존성을 주장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버틀러는 이를 아드리아나 카바레로 Adriana Cavarero의 논의를 통해 구체화한다. 카바레로에 따르면 첫째,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에서 일차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너는 누구인가?”이다. ‘자기를 설명한다는 것’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건네지는 것, 즉 ‘말 걸기의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자기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자기 반영적 형식이 아니라 타인에게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보통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타자가 앞에 있을 때 행해진다. ‘누구’라는 질문은 “나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혹은 알려질 수 없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질문”으로 그와 같은 “타자의 노출과 취약성이 나에게 일차적인 윤리적 요청을 제기”하기 때문에 그가 알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면서 그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윤리적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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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나’는 유아론적인 주체, 즉 자기 자신에게만 질문을 제기하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너’를 위해, ‘네’가 있기 때문에 말을 건다. 말을 듣고 응답할 ‘네’가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말 걸기의 조건이 사라져서 말을 걸 ‘네’가 없게 되면,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도 오직 ‘너’에게만 가능하며, ‘너’와 연결됨으로써만 ‘나’는 지시될 수 있는 것이다. ‘너’ 없이 ‘나의’ 이야기는 가능하지 않다(버틀러).** 카바레로는 ‘너’의 근본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 ‘너희’ ‘그들’과 같은 복수형 주체가 가져올 수 있는 동일성의 폭력성을 지적하며 복수형 주체를 부정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너’의 근본성을 강조하는 카바레로의 논리로도 ‘우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너’의 독특성과 ‘나’의 독특성이 서로에게 노출된다는 사실이 우리를 구성하는데 그때 우리는 동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자신이 주장하는 관계성이 차이를 간과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를 차이 나게 만드는 것, 즉 우리의 단수성에 의해 서로에게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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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나’는 타자를 노출되고 보이는 존재로, 즉 ‘신체적인 방식으로’ 만나기도 한다. 외양의 영역에서 신체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로써 이루어지는 이 만남, 이 노출이 ‘나’의 단수성을 구성한다. ‘나’는 ‘나’의 의지를 부려서 이와 같은 노출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의 육체성이자 삶의 특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와 ‘너’의 근본적인 대체 불가능성이 성립된다. 카바레로는 “공적 영역에서 신체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로서의 나는 노출되어 있고 단수”이며, 이는”규범들의 작동을 통해 내가 인정 가능하게 되는 방식이 그렇듯이 ... 나의 공공성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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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버틀러는 단수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근본적인 환원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카바레로의 논지가 인간의 근본적인 타자 의존성을 드러내는 말 걸기의 구조에 대한 논지를 제한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카바레로는 타자 의존성보다 환원 불가능성을 선택한다. 관계의 윤리는 ‘감정이입’이나 ‘동일시’ 또는 ‘혼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카바레로가 말하는 관계의 윤리에서는 “네가 아무리 나와 비슷하고, 나와 일치한다고 해도, 너의 이야기는 결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일치가 타자 의존성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오히려 이 불일치가 상대를 함부로 안다고 여기는 동일화의 함정을 피하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이 요소도 역시 보는 자 없이 보이는 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타자 의존적이며, 이 요소 없이는 관계 맺는 자들의 물질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친구나 가족을 잃은 자의 서사에서도 우리는 타자 의존성과 환원 불가능성이 양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슬픔 속에서 완전한 자기 서사가 불가능하다는 데서 우리의 타자 의존성과, 대체 불가능한 바로 그 사람의 상실과 그 관계의 상실에서 비롯한 슬픔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데서 우리의 환원 불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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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타인에게 우리 자신의 다양한 자아를 설명한다. 설명의 구조적 조건들로 인해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함에도 그렇게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며, ‘나’의 서사가 가리키는 단수의 몸은 결코 완전한 서사로 포착될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렇게 한다. 브라이슨이 ‘자기 목소리로 설명하기’의 위험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기를 타인에게 설명하는 자기 서사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신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알지 못함’을, 타자의 존재를 깨닫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에 대한 설명은 타자에게 주어지고, 이 타자로 인해 우리 사이의 메시지 전달의 장면은 자기 자신을 설명하려는 반성적인 노력보다 더 일차적인 윤리적 관계로 확립된다.

다시 돌아가자. 자기를 알지 못하는 정치적 주체는 어떻게 행위하는가? 버틀러는 2011년 월가점거운동에 참여하며 생각한 것들을 표현한 ‘우리, 인민’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처럼 거리로 몰려나와 ‘우리we’를 내세우는 이들은 누구인가? 떄로는 말과 행동과 몸짓으로 자신을 주장하고, 더 흔하게는 공적 공간에 함께 모여 자신을 주장함으로써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드러나고, 끈덕지게 상호 의존적인 집단을 형성한 이 일군의 ‘우리’는 누구인가?” 그는 이들의 집단적이고 신체적인 행위의 의미와 시위의 양상을 ‘수행적 발화’라는 잘 알려진 그의 개념 틀로 분석했다. **그런데 버틀러의 시위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위가 지속 가능한 삶과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방식이며, 심지어 “ 불안정성과의 광범한 투쟁에서 정동의 강도를 지닌 본질적인 순간”일 수도 있지만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그는 정치의 목표가 “급진적인 민주적 변화 - 내가 인정하는 그런 변화-를 이끌어낼 목적으로 새로운 ‘인민’의 의미를 구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인민의 의미는 변화의 맥락 속에서 매번 다시 생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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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기서 ‘우리, 인민’이라는 자기 호명을 기본적으로 자기 구성적 발화 행위로 본다. 이들은 대의제 아래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표함으로써 이 구조의 합법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묻는다. 이들은 자신의 말을 함으로써 기존의 대의 정부와 분리되는 행위 주체로 스스로를 구성해낸다.


‘우리’인 인민들은 자기 스스로를 대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인민으로 구성하는바, 이런 자기 형성적 self-making 혹은 자기 구성적 행위는 어떤 대표 형식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이처럼 비대표적non-representation 이고 거의 동어반복적인 어떤 것이 민주주의적 정부의 토대가 된다. ... 자기 지시적이고 자기 구성적인 행위가 스스로를 인민이라고 분명히 밝히는 집단을 형성한다 (버틀러).

그에 따르면, ‘우리, 인민’은 존재하고 있던 “사회적 다수social plurality”를 구성하는 행위의 이름이지, 단일한 형상을 발견하고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민’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직접 목소리를 냄으로써 사회적 다수를 탄생시키는 자기 구성적인 행위이며, 서로 다른 발화 행위들이 이어지면서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는 수행적인 실천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민’의 생성은 통일성을 전제하거나 통일된 것이 아니라 누가 인민이며, 인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내거나 토론을 제기하는 활동인 것이다. ‘우리, 인민’은 모두가 서로 동의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 것이다. 똑같은 단어를 사용할 때조차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행위자로 형성해낸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사람들이 ‘우리, 인민’이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함께 행위할 수 있음을 가정한다. 이와 같은 공통의 행위는 이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을 말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자기 형성 과정을 집단적이고 공유되는 것으로서 이해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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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버틀러는 발화 행위와 함께 드러나는 신체의 수행적 실천에 주목하며 아렌트의 사유에서 두드러지지 못했던 신체의 차원에 대한 고려를 강조한다. 그는 복수성을 조건으로 하는 아렌트의 행위 개념에 수행적 실천의 의미가 있다는 데 흥미를 느끼면서도, 아렌트가 정치적 행위의 문제에서 신체의 차원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비판의 요지는 정치의 조건과 정치적인 요구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아렌트는 행위자가 등장하기 위해 필요한 ‘출현의 공간’ 같은 정치의 조건만 중요하게 여기지, 몸 자체의 지속적인 요구와 관련된 경제 문제는 정치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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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출현의 공간’은 ‘말’을 할 수 있는 장소로서 ‘몸’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 장소와는 다른 원리로 움직인다. 일례로 노동자가 공장에서 활동하는 방식과 노동조합의 대표로서 교섭의 자리에서 활동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노동과 작업과 행위를 구분하고 공사 영역을 구분한다고 해서 경제적 문제나 노동의 문제를 정치적 사안에서 완전히 배제했다고 보는 것은 버틀러의 확대해석으로 보인다. 오히려 아렌트가 보지 못한 신체의 차원이란 불평등한 언어의 조건과 관련되지 않을까? 아렌트는 정치적 장에서 생존의 조건에 대해 논쟁할 수 있는 언어의 적절성과 정교함을 요구할 뿐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 고려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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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계를 넘어 버틀러는 우선 몸 자체의 지속적인 요구가 가능한 ‘출현의 공간’이 생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의 몸 자체의 요구, 즉 “출현하는 몸은 발화에 알맞은 것일 뿐만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일하기 위해, 살기 위해 요구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몸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이를테면 일터에서의 노동 조건에 대해 한 테이블에서 논의하는 방식에 한정하지 않고, 거리에서 일이란 것을 좀 해보자고 또는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치는 것도 정치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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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렌트의 주장처럼 버틀러에게도 ‘생존’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의 전제 조건이며, 정치의 목적이 아니라 정치의 전제 조건이다.**버틀러도 “삶이 생존을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살 만한 삶이 되려면, 삶은 생존을 넘어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체의 요구 조건, 즉 좋은 삶이 가능하려면 생존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은 버틀러에게서만 직접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생존에 대해 같은 입장이어도 아렌트가 필요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을 나누고 이론적으로 후자만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버틀러는 몸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필요조건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실천적 구호로서 요구의 목록을 쓸 수도 있다고 말한다. “몸은 음식과 주거지를 필요로 하고, 상처와 폭력으로부터 보호를 필요로 하며, 이동의 자유, 일할 자유, 보건 의료에 접근하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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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는 이 몸의 요구들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차이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초월하지 않은 채 다른 이들과 공통의 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지평을 발견한다. 그는 계급, 인종, 민족, 젠더, 섹슈얼리티 등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행위가 ‘신체적 실천’의 문제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명확히 보여준다. 몸은 “고정된 범주를 가진 별개의 실체”이면서 “음식, 주거지, 섹슈얼리티, 외모, 기동성, 청각성, 시각성과 맺는 일련의 관계”이다. 따라서 몸은 “일련의 사회적 관계와 제도적 형식에 착근되어 있거나 혹은 탈착근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 몸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이유들로 인해 쫓겨난 자들의 몸이 공유하는 공통의 지평은 바로 우리 몸의 물리적인 취약성이며, 그 취약성에 대한 책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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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우리가 감내하는 정당한 처벌도, 우리가 겪는 것에 대한 정당한 보복도 아니다. 폭력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물리적 취약성, 우리가 최종적으로 주체의 이름으로 해소할 수 없는 취약성, 우리가 확고한 경계를 통해 철저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피부 속의, 양도된, 서로의 손 안의, 서로의 자비를 바라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방법을 제공할 취약성을 묘사한다. 이 상황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선택의 지평을 형성하고 우리의 책임감을 정초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 상황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우리가 책임감을 떠맡는 조건들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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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자들이 처한 공통의 지평, 즉 폭력에 취약한 신체라는 조건에 대한 사유는 계급이 먼저냐 젠더가 먼저냐 식의 논쟁에서 벗어나 연대를 위한 이해의 장을 연다. 실제로 어렵게 시작된 쫓겨난 자들의 정치적 행위가 그 힘을 잃어가고, 이들이 힘들게 구성해낸 정치적 장소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운동 내에서 소수의 정치적 요구를 나중에 할 일로 강요하면서 비실재화를 지속시키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관계 맺음 자체가 힘이 되는 장소에서 다시금 배제로 인한 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지므로 장소의 힘은 약해질 뿐만 아니라 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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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쫓겨난 자들이 정치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서로 다른 입장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갈등을 다루는 데 더 서투르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불리한 조건으로 인해 이들의 저항에 대한 국가나 자본의 반격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건은 처음부터 존재했고 다름과 같은 사실도 분명하다. 서로 다른 쫓겨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 행위의 동력이 급속히 떨어질 뿐만 아니라 저항의 장소도 지속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만약 쫓겨난 자들이 그와 같은 어려움 때문에 예측 불가능성을 특징으로 갖는 행위 자체를 피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정체성/차이의 정치가 갖고 있는 복잡성 때문에 정체성/동일성 정치의 환상에 기반한 연합력에 의지한다면,
**이러한 환상에 기반한 연합의 정치는 대표적으로 단일한 국민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를 낭시Jean-Luc Nancy는 ‘신화’의 탄생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시작은 ‘설화’이고, 설화를 전하는 자의 언어는 “오직 설화의 배치와 현시에 봉사하”는 언어이다. 또한 신화는 “한 공동체에서만, 한 공동체를 위해서만 출현”하며, 신화와 공동체는 “서로 서로를 낳는다”. 그는 이와 같은 신화를 단절시키는 또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며 그것이 또 다른 공동체를 사유하는 데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떨어져 나온 한 사람의 목소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들은 각자 고립되어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갈 것이고, 저항의 힘도 ‘우리’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타자를 생산해내는 폭력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와 같은 고립과 힘의 전환은 승패의 차원에서도 의미의 차원에서도 다시금 쫓겨난 자들의 투쟁의 핵심인 관계 맺음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 투쟁의 잠재적 토대를 약화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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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캘리번과 마녀’에서 시초 축적 시기에 봉기와 항쟁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지배계급이 여성을 탄압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힘을 효과적으로 억눌렀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주었다. 토지를 빼앗겨 빈곤해지고 사회에서 쫓겨난 남성들이 자신들의 불행을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들의 탓으로 돌리게 만든 것이다. 그후 마녀사냥이 유럽 사회 전체를 뒤덮게 되면서 봉기는 효과적으로 제압되었다. 낙인을 통해 인민들의 관계를 끊고 그들의 힘을 분산시키는 그와 같은 방법은 변형된 형태로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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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은 ... 저항의 모든 잠재적인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파편화시켰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이 무력감을 느끼고 지배적인 사회집단에 의존하게 되었다. 더욱이 마녀사냥은 이들의 좌절을 분출할 수 있는 국지적인 배출구가 되어주었다. 이로써 다른 어떤 사회집단보다도 빈민들이 기독교의 권위와 세속적 질서에 맞서기 어려워졌고, 부의 재분배와 사회적 지위의 균등화 같은 요구 사항을 내걸지 못하게 되었다.

기득권과 헤게모니를 쥔 지배계급의 이와 같은 전략은 인종, 민족, 계급, 젠더 등을 이유로 쫓겨난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인 낙인의 종류가 다를 뿐 낙인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사람들이 모였을 때 생겨나는 ‘권력’과 ‘잠재력’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든다. 게다가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의 핵심 원리인 경쟁은 심지어 사람들이 모이기도 전에, 정확히 말하면 모이는 것 자체를 힘들게 만듦으로써 그와 같은 저항의 권력이 생겨나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경쟁의 원리는 사회 내의 다른 동료들에게 응답할 가능성을 최소화할 뿐만 아니라, 동료와 함께 세계에 개입하여 공통의 일을 한다는 감각까지도 소실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쫓겨난 자들은 경쟁의 효과와 낙인의 효과를 모두 감당하며 그것을 거슬러 정치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화되기 힘들어 보이지만 역사 속에서 행위의 형성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행위하는 자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이들의 각기 다른 몸의 실천이 어디에서 생성되며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살피면서 낙인을 이용하여 권력을 분열시키는 효과에 걸려들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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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치는 “수년에 걸친 선동공포심은 남성들 사이에 여성과의 깊은 심리적 거리감에 씨를 뿌렸고, 이로 인해 계급적인 연대가 붕괴하고 이들 고유의 집합적인 힘이 잠식당했다”고 결론 내리며, 계급과 젠더 사이의 갈등이나 다양한 정체성 사이의 갈등 문제를 어떤 방향에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다. 젠더와 계급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두 문제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똑같은 경험적 내용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서로 연결되어 연대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난 자들이 가진 잠재적 힘은 생성될 수도 발휘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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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버틀러가 분석한 대로 쫓겨난 자는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는 과정에서 자기 목소리에 끊임없이 끼어드는 타자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 경험이 자기만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하게 한다. 그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일 때 자기 경험의 서술자는 사회적 이론가로 전환되고 이 과정에서 상처의 자리는 타인과 사회의 역사가 흘러 들어오는 열린 자리가 된다.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미 남의 일이 아니다”(도미야마 이치로) 도미야마 이치로가 주목한 ‘폭력의 예감’도 이 상처의 자리에서 생겨난 위기감과 더불어 생겨난다. 상처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공존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자기 일처럼 느낀다는 것, 이것이 일상 경험에 기반을 두는 자기라는 개체의 위기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미 남의 일이 아니므로 이 위기는 이전부터 줄곧 일상에 들러붙어 있었던 셈이다. ... 중요한 것은 일상에 들러붙어 있는 이 잠재적 위기가 언제 어디서 모습을 드러내고, 누가 그것을 감지하며, 어떤 식으로 그것이 현세화하느냐는 물음이다.(도미야마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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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점거운동에 대한 논의를 다시 살펴보자. ‘우리, 인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몸의 요구들은 단일한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서로 다른 행위들로 이루어진 획일화되지 않은 “정치적 집단성sociality의 한 형태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고, 서로의 말들에 보조를 맞추고, 리듬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며, 각자의 ‘몸의 말’로 청각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관계 맺는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지 않고, 각자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고, 각자의 위치에서 말하면서 또한 함께 외친다. 여러 신체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시대가 생산해내고 있는 불평등의 조건이 체감된다. 현 체제가 많은 사람의 신체적인 삶, 즉 생존을 심각하게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곳에서 직접적으로 공유된다.

‘일상에 들러붙어 있는 잠재적 위기’가 월가에서는 거리의 몸들과 말들로 분출된다. 페데리치가 보여준 오랜 분열의 통치나 현 체제의 작동 원리인 경쟁의 원리, 대의제가 낳은 정치적 경험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이고 또 서로 연결되어 기존의 질서를 끊어내는 말들을 만들어낸다. “불평등의 증가에 맞서는 평등”의 주장을, 홀로 살게 하는 세상에 맞서는 “상호 의존성에 대한 주장”을 취약한 몸과 상처의 자리를 통해 제기하는 것이다. 이 몸들과 말들이 곧바로 불평등한 조건을 바꿀 수는 없어도 그 자체로 평등과 상호 의존적 관계를 이 세계에 실현한다. 물론 이러한 상태는 그 주장에 자기 상처의 특권화가 아니라 누구에게든 이와 같은 종류의 상처가 반복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성립한다.




>> Jun 2, 2021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_ Yang, Chang-Ah
3장 쫓겨난 자들의 관계: 신체의 요구와 공통 감각의 생성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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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논의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여전히 남겨준다. 사회자원과 정치적 경험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완고한 기존의 세계에 저항하며, 그것과는 다른 장소를 구성해낼 수 있을까? 쫓겨남의 경험은 이제까지 자신이 맺어온 거의 모든 관계로부터 찢기는 것과 같아서 아물기 힘든 상처를 남기는데, 그들은 어떻게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밖으로 나가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가? 쫓겨난 자들의 투쟁은 어떻게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관계의 상호적인 움직임을 간과하지 않는 ‘보편성’,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잠재성을 잃지 않는 ‘보편성’을 구현해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쫓겨난 자들이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서 어떤 가능성이 생성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여러 번 반복되어온 타자와의 관계 문제이다. 우리는 이미 아렌트의 행위론을 해석하며 이 질문에 대한 이론적인 답을 도출해냈다. 쫓겨난 자가 삶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사람답게 살려면 동료가 있어야 하며, 동료와 함께 이전과 다른 형식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생존의 요구는 새 세상에 대한 요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모여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기존의 보편이 무엇을 배제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 질문을 오늘날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 오면, 쫓겨난 자들이 힘들게 시작한 정치 행위나 또 다른 삶의 형식을 실험하는 장소들에서 실제로 자주 제기되는 다음의 질문으로 다시 읽힌다. “도대체 이 상처 받은 자들이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이며, 소위 비정상적이고 모자란 이 공동체에서 어떤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는가?” 쫓겨난 자들의 공동체가 기존의 폭력적인 관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쉽지 않은 일이다. 외적으로는 기득권자에 의해 권력관계가 쉽게 재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성에 의해 기존의 관습 및 고정관념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이와 연결되어 내적으로는 쫓겨난 자의 연대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쫓겨난 자들이 기존 궈력관계에 대항하는 방법은 견고한 연대와 연대의 확장뿐인데 이들의 상처가 동일성을 고집하게 될 경우 집단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거나 또 다른 집단과의 연대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의 어려움은 쫓겨난 자들에게 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투쟁임을 보여준다. 이들에게는 일상이 전투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와중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만남이 불러일으킨 파장 속에서 언어를 빚어내고 돌려받으며 관계 맺고 그 과정 속에서 삶의 자리를 찾는다. 세계 속에 거주할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을 이어주는 것도 각자의 자리에서 쫓겨남의 현실을 드러내는 말들, 자기 경험에서 길어 올린 말들이다. 이 말들이 전해지고 답해질 때 연대가 시작되고, 다양한 말이 쉽게 동일화되지 않을 때 연대는 지속된다. 그렇게 해서 ‘자기와 같은 이름으로’ 쫓기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생존 조건을 보장하려는 현재의 말고 행위가 과거의 쫓겨난 자들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고, 또 다른 이름으로 쫓겨난 자들의 말과 행위와 연결될 대, 자기동일성에 함몰되지 않는 연대, 기존의 규범이 보편성의 이름으로 행한 ‘폐제foreclosure(타자를 통해 자신을 세워놓고 그 흔적을 지우면서 타자를 외부로 쫓아내는 것)’를 반복하지 않는 연대가 이루어진다.

1. 상처: 또 다른 경험으로 열리는 자리

‘홀로코스트’ 경험을 ‘유대인의 경험’으로서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 등의 ‘다른 고난’과 연결하여 상상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자신의 고난’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것이 ‘타자의 고난’을 향한 상상으로 열릴 수 있는가(서경식).

상처 입거나 사람을 죽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사회를 구성해나간다(도미야마 이치로).

‘파리아 유대인: 숨겨진 전통’의 한 구절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말하자면 쫓겨난 사람들이 받는 가장 큰 상처는 이들의 존재 자체의 실재성을 공격받는 일이며, 그로 인해 이들이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비실재’의 위치를 쫓겨난 자들의 삶이 시작될 수 있는 자리로 변형시켰다. 이러한 변형은 동료들과 함께 현상의 공간을 구성해낼 때 가능해진다. 쫓겨난 자들은 자신을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기존의 사회에 몸과 말로써 모습을 드러낼 때 고립에서 벗어나 ‘우리’로 등장한다. ‘우리’는 말과 행의 공간을 구성해냄으로써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된다.

한 사회에서 보이지 않던 존재의 자리를 드러내고, 낙인으로 사용되던 이름을 재전유하여 저항의 언어로 사용하는 정치를 대개 정체성의 정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쫓겨난 자들의 정치는 전형적으로 정체성의 정치에 속한다. 나는 앞서 정체성이 타자를 배제하는 동일화의 방향으로 흐르는 정치를 ‘정체성/동일성’의 정치로, 복수성을 지키며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정치를 ‘정체성/차이’의 정치로 개념화했다. 그리고 후자의 정치야말로 아렌트가 말하고자 했고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치라고 주장했다. 아렌트가 정치적 경험의 원형을 보여주는 장소를 ‘폴리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내어 현상의 공간이라는 특성을 부각시킬 때에도, 그가 재의미화한 ‘정치’는 타자로 여겨지던 이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배제의 현실을 가시화하는 정체성/차이의 정치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폴리스는 가장 폭넓은 의미에서 현상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나는 타인에게, 타인은 나에게 현상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람은 다른 유기체나 무기체처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이 현상한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에서 비인간의 자리 - 주로 동물의 자리 - 에 놓이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을 ‘보고’ ‘듣는’ 일 - 응답들 - 이 이루어질 때에 이들은 비로소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포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의 말과 행위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동료가 없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비인간화와 비실재화는 공적 공간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인격을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쫓겨난 자들의 정치적 장소로서 사유된 폴리스는 주어져 있는 제도적 공간이라기보다 이들이 직접 “자신들의 행위와 고통으로 확보한 행위의 공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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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행위자는 비실재의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이미 상처 받은자이며, 그 자리에 있는 몸을 공적인 장에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계속 상처 받을 자이다. 공적인 장에 자기 몸을 드러낸다는 것은 기존의 인식 틀 밖에 있는 쫓겨난 자들에게 항시 제기되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일인데, 이 일은 애초부터 자기를 흔드는 일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스스로 잘 알고 있고 의도한 자기가 아니라,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보았듯이 행위자는 근본적으로 타인과 세계에 기대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정체성과 결코 오인될 수 없는 ... 내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전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한다.” 행위자는 고통을 겪는 자이자,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훼손되는 자이기도 하다.

앞서 ‘몸-말’에 대해 다루었지만 자기 언어를 갖지 못했던 자들의 말하기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는 쫓겨난 자들의 신체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는 못했다. 아렌트의 사유에서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지만 탐구되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신체의 고통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무세계적인 요소를 갖고 있어서 타인에게 전달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처의 자리를 삶의 장소로 변형시키는 정치적 행위의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그가 전달 불가능성을 이유로 그 이상 탐구하지 않은 상처와 고통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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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가 우려하듯이 쫓겨난 자의 상처와 고통에서 지극히 주관적이고 무세계적인 계기만이 작동하게 되면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 소멸의 의지로 발전하여 ‘낙천주의자의 자살’과 같은 형태로 드러나거나, 다른 한편으로 자기 상처의 자리를 특권적 위치로 변형시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처럼 자기 민족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민족의 고통이 발생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폭력적인 태도로 드러날 수 있다. 그렇다면 쫓겨난 자들의 상처나 고통은 이성적으로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만 이해되어야 할까?

파리아의 위치를 더 깊이 고찰하면 상처 받은 자의 자리가 지니고 있는 관계성의 문제를 사유할 수 있다. 버틀러는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의 시에서 제목을 딴 ‘추방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에서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수립에 의해 땅과 집을 잃고 영토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귀환권The right of rturn’ 문제를 다루면서 이제는 ‘유대 민족’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족’에 ‘디아스포라적인 것’의 의미를, 즉 ‘알만파al-manfa(추방을 뜻하는 아랍어)’나 망명의 의미를 포함시킬 것을 제안한다. 오늘날 파리아라는 이름은 유대인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의 것이다. 버틀러는 이스라엘의 ‘귀환법The law of return’에 반대하고 그와 대립되는 귀환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와 같은 제안을 한 것이다. 귀환법은 유대인이 난민의 위치에서 벗어나 민족적인 지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바람에 그 영토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을 내쫓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버틀러는 귀환법에 대립하여 새롭게 주장된 귀환권을 민족적인 것으로 구성하되 그에 대한 내적 비판이 가능한 난민의 권리로 구성해내자고 주장한다. 귀환법이 난민의 권리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민족의 권리를 강조하는 바람에 또 다른 난민을 생산해내는 모순적인 형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환법은 한 민족 한 국가라는 근대국가의 관념 틀 내에서 난민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풀기 힘든 이 문제를 고민하며 버틀러는 귀환법의 정당성을 귀환권에서 얻을 수 있도록 하자고 슬쩍 제안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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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민족 개념에 대한 버틀러의 제안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의 이름으로 싸우는 쫓겨난 자들에게 그 이름이 사실상 하나가 아니게 하라는 ‘복수성’의 요구이다. 그래야만 팔레스타인 민족이라는 이름이 드러내는 쫓겨남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름으로 또 다른 보이지 않는 타자를 폐제하는 형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요구는 ‘분열된 정체성’의 자리인 파리아의 위치에서 선취된 것이다. 그 위치에서 정체성은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하나의 이름 아래에서 생겨난 복합적인 경험으로 드러난다. 다르위시의 시 <에드워드 사이드: 대위법적 독서>의 몇 구절을 살펴보자.

“정체성은 어떻고요? 내가 물었다 /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자기방어입니다... / 정체성은 출생의 아이지요 그러나 / 결국에 그것은 자기발명이지요 /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나는 여럿입니다 / 내 안에는 늘 새로운 바깥이 있어요. 그리고 / 나는 희생자의 질문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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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쫓겨난 자들은 정체성을 “자기방어”로서 “발명”해내지만 그것은 결코 통합되지 않고 그 안에 “늘 새로운 바깥이”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늘 그랬듯 “희생자”의 몫이다(버틀러).

파리아의 위치에 대한 더 깊은 고찰은 쫓겨난 자의 정체성 및 정치적 주체가 생겨나는 맥락과 그 내부에 있는 차이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된다. ‘유대인 파리아’와 ‘팔레스타인인 디아스포라’가 함께 살아가는 것의 사유 가능성을 물으면서 버틀러는 쫓겨난 자의 정체성 내부의 차이에 대한 물음을 자기 정체성의 근본적인 박탈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유대인 파리아’와’** 팔레스타인인 디아스포라를 연결시키는 것은 “집에서 내쫓긴 특성”과 서로 다른 쫓겨난 “정체성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상처의 자리이다. 이 말은 두 민족을 연결시키는 잠재적인 토대가 단순히 비슷한 상처나 고통의 공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버틀러는 서로 다른 쫓겨난 자들의 연결을 ‘and’ 라는 순접의 연결어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고’는 두 항을 논리적으로나 인과적으로 결합하지 않고, 정체성의 근본적인 박탈이라는 속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and 양쪽의 두 항은 연결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
버틀러는 두 민족이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사이드의 사유를 검토하면서 두 민족의 공존을 주장하는 이민족주의는 디아스포라적인 것 안에서 명시되며, 이민족주의와 디아스포라적인 것은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두 민족의 연결은 그들이 놓인 상처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소통을 요구하고, 그 소통과 더불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음으로써 자기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상대에 의한 박탈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버틀러의 생각을 일반화하자면 쫓겨난 자의 위치에 내재한 분열 또는 자기 정체성에 내재한 타자의 박탈이 이들 상호 관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며, 또한 복수의 경험을 지닌 쫓겨난 자들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344
그러면 상처의 자리에서 어떻게 이들의 관계성의 토대가 마련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버틀러는 이미 ‘폭력, 애도, 정치’라는 논문에서 폭력과 상실에 취약한 존재라는 인간의 조건에서 공동체의 토대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폭력과 상실은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확인시키는 두 양상이다. 먼저, 그는 여성, 성소수자, 거리 생활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과 같은 쫓겨난 자들은 폭력과 폭력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묶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각자의 신체의 사회적 취약성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 신체가 욕망과 물리적 취약성의 장소이자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는 공적 장소라는 것이 드러난다(버틀러, 2008b: 46).

다음으로, 상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무언가를 갖고 있었고 그것을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을 확인시키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 감각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와 역사가 각기 다를지라도 ‘우리’에 호소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나’로 살던 사람들은 상실을 겪으며 자기 안에 다른 것이 있음을 인지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잃고 나서 그들이 상실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가 누구인지,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는 “무지의 경험the experience of not knowing”(버틀러, 2008b: 48)을 하게 된다. 그 경험 속에서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내 안의 빈자리 또한 인지하게 된다. 애도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알지 못함not knowing’을 깨닫게 하고 그것에 의해 유지되며, 그 상실로 인해 자신이 결코 이전과 똑같이 존재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의 누구’임’, 즉 나의 존재는 너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이전과 같이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무지와 무능력의 경험과, 그의 빈자리가 가져온 이러한 물음들이 너와 나를 구성하던 ‘관계성relationality’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기존 질서는 사람들에게 애도의 시간이 짧을수록 좋다며 서둘러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인간은 실로 상실에 취약하며, 원한다고 빈자리를 봉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이 그러한 상실을 잊거나 거기게 무감각해진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반드시 남아 다른 징후로 되돌아온다.

345
그의 논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계에 대해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애인’이라고 마치 그들이 내 소유물인양 그 관계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를 실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실상 관계성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지속시키는 무엇임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그것을 하나의 선택지로 본다. 그럴 때에만 그 관계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나’와 ‘너’를 분리시킨 후 소유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런데 누군가를 잃고 슬픔이 드러날 때 그와 같은 설명 방식은 유지될 수 없다(버틀러, 2008b: 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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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전시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열거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제공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의식적인 설명을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자율적이고 강한 자신감에 차 있다는 바로 그 생각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여기서 나는 나의 느낌이 어떤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바로 그 “나”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멈추는 그런 이야기여야 한다. 즉 타자와의 관계, 꼭 나를 침묵speechlessness에 몰아넣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의 발화를 망치는 표시로 나의 발화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관계가 다름 아닌 “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나는 내가 선택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결국 그 과정 어딘가에서 바로 그 관계가 나를 사로잡고 나를 망친 방식을 드러낼 것이다. 나의 서사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듯 비틀거린다(버틀러, 2008b: 50-51).

이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나’를 알지 못하니 ‘내가’ 만났다고 믿고 있던 타인도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우리 사이의 관계성만이 확인될 뿐이다. ‘나’와 관계 맺던 사람을 잃은 슬픔은 무엇보다 분명하게 우리가 자율적인 존재일 수 없음을, 우리는 타자에 의해 훼손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나의 계급’, ‘나의 인종’, ‘나의 민족’, ‘나의 젠더’, ‘나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우리의 언어 사용법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관계의 양상이 있다. ‘나의 것’으로 표시되는 이 정체성도 “소유possession가 아니라 오히려 박탈being dispossessed의 양상, 즉 다른 이를 위한 존재 방식, 혹은 다른 이 덕분에 가능한 존재 방식”(버틀러, 2008b: 51, 원저자 강조)이라는 것이다.




>> Jun 2, 2021

a Thought

결국 Marxismus/마르크스주의인가?
metaphysische/형이상학적 사유와
dialektische/변증법적 사유가
공존하는게 가능한가?

Online 공간과 Net에서 태어난 세대에게 어떻게 Materialismus가 적용될 수 있을까?




>> May 30, 2021

a Thought
가장 오래된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기존의 언어는 남성의 언어이며, 이에 대항하는 완전히 새로운 여성의 언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는 새로운 언어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은 남성의 언어를 상대화하고 재해석한 언어이다. 안타까운 것은 힘들게 벼리고(벼리다: 마음이나 의지를 가다듬고 단련하여 강하게 하다) ‘재구성’된 언어마저 거의 공유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력관계가 바뀌지 않으니 여성의 경험과 대항언어는 역사 속에서 삭제되어버리거나 그 쓰임이 이어지지 않는다. 정희진은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의 관계를 한국인과 미국인이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의 권력관계에 비유한다.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Yang, Chang-Ah. p.309

언어-> 성의 구분-> 생물학적 구분

Adam and Eve rib bone
baculum = penis bone
(article link)
-종교/신화와 현실을 연결하여 연구하는 지점, 흥미로움
-대부분의 포유류는 baculum가 있으나 인간은 없는 사실, 이야기 거리가 생겨나는 흥미로운 missing된 부분, 신체 공간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





>> May 29, 2021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_ Yang, Chang-Ah
2장 쫓겨난 자들의 언어: ‘말-투쟁’과 사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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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강한 것이라고 믿는다. 말은 삶이 즐겁기보다 두렵게 여겨질 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제압할 수 있다” _ 솔로몬

모든 슬픔은,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말로 옮기면, 견딜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_ 아렌트 ‘조건’

302 ... 언어는 기존 체제의 인식 틀을 반영하고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쫓겨난 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기존의 언어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고, 갈등 가운데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암중모색의 시간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완전히 새로운 언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들은 기존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작업 자체도, 다른 동료들을 설득하기 위한 대화도 많은 시간과 역사를 필요로 한다.

자기 자리가 없는 사람들, 즉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라는 것도 따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사실 고통은 다른 모든 경험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몸의 경험이며, 너무도 사적이고 주관적인 감각이어서 외부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다른 이와 나누거나 소통할 수 없다. 고통은 자기 감각에 몰두하게 만들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자의 현실감을 박탈해버리고 그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게 만든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고통과 거리르 두고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며 그와 같은 고통이 발생하는 조건에 대해 문제 삼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고통의 내용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며 손을 내민다.

303 쫓겨난 자들에게 고통의 경험과 세계 내 자리의 부재는 ‘생존’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는 동료들과 연대감을 느끼며 자신이 처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자들이 존재한다. 이들 ‘자각한 파리아’는 배제되고 억압받는 이름으로 정치적 장에 드러나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치적 용어로 번역해내는 이들로서, 고통의 내용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입장을 이해하는 자이다. 파리아의 말은 자기 경험에 충실하되 결코 고립되지 않으며, 파리아인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되 결코 그 이름으로 각자의 경험을 동일화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대신하는’ 자리에 서되 동일한 이름만을 대표로 내세우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한 쫓겨난 자들 전체의 이름으로 싸우는 이들에게 ‘말-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이다. 한 사회에서 자리가 없고 이름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1) ‘몸-말’, 경험에서 길어 올린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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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경험 없이 가능한 사유 과정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유는 ‘이후의 사유afterthought’예요. 즉 어떤 문제나 사건을 사후에 숙고하는 것이지요.

304 아렌트는 사유에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어떤 사람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면,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활력 넘치는 사유 과정이 드러나고,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세계의 일부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여러 사람의 관점을 통해 객관성을 보장받으며,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이 세계를 보는 관점은 세계에 대한 앎에 기여한다. 따라서 경험을 토대로 하는 이와 같은 사유 과정은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를 표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의 독특성과 더불어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결국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이때 경험의 한계는 단순히 장애가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의미를 생성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305. 사이먼 스위프트는 아렌트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20세기에 벌어진 정치의 역사를 이야기했는데, 사건들의 형식과 성격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기보다는 이야기하기의 방법으로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방법을 선택한 뚜렷한 의도는 사건의 ‘진리’를 정립하기보다 사건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의견은 편견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철학은 편견의 오류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진리를 가장 우위에 두고, 논의의 장에서 오류의 가능성이 높은 의견과는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306 그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편견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사의 영역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을 구성하므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오래된 편견일수록 그 역사성과 권력관계 때문에 사라지기 힘들다는 사실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편견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관계되며, 우리의 현재 상황을 정치적 측면에서 충실하게 반영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논증으로 잠재울 수 없다.” 이것은 논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증명이 아니라 설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존의 정치철학이 정치와 철학 사이의 긴장 관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아렌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철학자가 여러분이나 나와 같은 인간으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의 동료 인간들 속에 살고 있”지 “자기 동료 철학자들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진리 증명의 방식이 이질적인 동료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유해야 하는 곳은 정합성과 일관성이 통하는 철학자들의 세계가 아니라 우발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난무하는 인간사의 영역임을 주지시킨다.

따라서 철학자의 진리와 이념을 복잡하고 다종다양한 인간관계에 적용시키는 방식이나 철학이 정치를 통치하는 것과 같은 정치와 철학의 결합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의견과 진리, 정치와 철학 사이의 위계를 없애는 문제는 ‘정치의 민주화’ - 정치적 행위가 전문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정치적 사유는 철학자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인간사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어 대한 평가나 ‘세계’에 대한 염려와 개입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이다 -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의 재구성 요구와 연결되어 있다.

307 그리하여 아렌트는 의견에 수반되는 편견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이 놓치기 쉬운 ‘판단’에도 주목한다. 그는 편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고, 편견에 주의를 기울였다. 다만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이상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문가적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비전문가들이나 일상인들의 의견과, 공통의 일에 대한 서로 다른 개인의 판단 능력을 선택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많은 경우 ‘사람들이 말하기를’ 또는 ‘여론에 따르면’과 같이 다수에 호소함으로써 소위 ‘정상성’의 기준으로 편견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편견은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아렌트가 지적하고 있는 이 한계란 편견이 ‘개성을 기술한 것 personal idiosyncrasies’, 즉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편견이 자기 경험과 결부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준비된 동의에 의존한다고 말하며, 편견과 판단을 구분한다.

307 편견과 판단은 둘 다 여러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인정하고 공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편견과 달리 판단은 자기 경험에서 비롯한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타인을 향한 ‘설명’과 ‘설득’을 필요로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만 타인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 만약 정치적 영역에서 어떤 생각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고 다수가 동의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진다면, 사람들은 쉽게 편견으로 판단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가 누구든 사회의 규범 틀이나 인식 틀에 들어오지 못하는 쫓겨난 자들의 존재와 현실을 배제하고 삭제시키는 일에 - 이들에 대한 편견 그 자체로, 그리고 이들의 문제를 다룰 논의의 장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 복무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직업적’ 사유자나 정치가의 정답보다는 논리정연하게 설명되기 힘들지만 개성 기술적인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되는 의견들이다. 이 의견들 덕분에 편견의 공통성이 공통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308 이처럼 자기가 본 세계를 타인에게 설명하는 일이 정치적 행위와 사유에서 핵심적인데, 아렌트는 파리아가 자신의 세계를 설명할 제대로 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여성주의 사상가들이 아렌트의 사상에서 긍정적으로 주목한 것은 주로 복수성 개념에 기반한 정치적 주체에 관한 사유이다. .... 하지만 그러한 경험에서 비롯된 말들이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으며, 사상가가 그러한 경험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하는가와 같은 뒤따르는 문제는 아렌트의 사상 내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309 그래서 여기서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어온 여성주의자들의 개념과 사유 과정에 기대어 아렌트가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언어의 문제를, 파리아의 숨겨진 전통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다루어보려고 한다. 먼저 정희진은 ‘여성의 삶이 어떻게 말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여성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면서 불평등 계약이므로 언어의 세계에 중립은 없다.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언어는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지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종, 계급, 지역, 장애, 성 정체성 이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언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규정하는 피식민 상태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309 가장 오래된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기존의 언어는 남성의 언어이며, 이에 대항하는 완전히 새로운 여성의 언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는 새로운 언어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은 남성의 언어를 상대화하고 재해석한 언어이다. 안타까운 것은 힘들게 벼릭 ‘재구성’된 언어마저 거의 공유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력관계가 바뀌지 않으니 여성의 경험과 대항언어는 역사 속에서 삭제되어버리거나 그 쓰임이 이어지지 않는다. 정희진은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의 관계를 한국인과 미국인이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의 권력관계에 비유한다. *정희진은 ‘재구성’에 해당되는 단어가 rethink, remap, position, decolonize라고 병기한다. 언어의 재구성에는 다시 사유하고, 배치를 바꾸고, 서 있는 자리를 드러내고, 피식민 상태에서 벗어나는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310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또한 쫓겨난 자들의 분열된 인식이 언어의 권력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에 적응하라는 폭력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계몽기의 동화 전략처럼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는 인식 틀을 갖추고 있는 언어를 통해 자기를 설명할 수밖에 없을 때 인간은 분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언어의 비대칭성은 모어, 모문화, 역사로부터 추방된 디아스포라의 경험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310 서경식에 따르면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 세계대전을 거쳐 전 지구적인 시장경제의 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쫓겨났다. 이들은 하나의 언어 공동체로부터 다른 언어 공동체로 건너간 자신들이 복수의 공동체의 틈새에서 경험한 것들을 말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만한 자신들만의 언어가 없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변별해낸다. 첫째, 쫓겨난 자들은 새로 정착한 공동체에서 항상 소수자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모어와는 다른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둘째, 경제적 곤궁과 법적 지위의 불안정 때문에 지식이나 교양을 축적할 조건을 빼앗겼다. 셋째,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이들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독자를 구해야 하는 최대의 어려움이 남아 있다.

독자가 되어야 할 다수자는 많은 경우 자신들이 단일 공동체에 귀속한다는 신화에 안주한다. 한편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언제나 다수자의 안주를 위협하여, 때때로 다수자가 의심치 않고 누려오던 기득권에 마치 날카로운 가시와 같은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과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마음 편히 나눌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극히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고립되던가, 아니면 일종의 판타지가 되어 ‘유목적 삶’을 동경하는 따분한 다수자에 의해 소비된다.

하지만 실패의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체제 밖으로 쫓겨난 자들이 ‘재구성’해낸 언어는 사회에 자신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드러낼 수 있는 ‘가면’이 되고, 존재 삭제에 대항하여 자신들과 같은 이들이 세상에 존재함을 드러낼 수 있는 ‘설 자리’가 된다. 또한 이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재구성해내기 위해 과거의 흔적들을 찾은 것처럼 이들의 언어는 미래의 쫓겨난 자들의 자리까지 마련해둔다. 기존의 인식과 자신의 인식 사이에서 분열하는 이들의 언어는 다른 관계, 다른 장소의 재구성에 관한 열망으 품음으로써 비록 단절될 가능성이 높더라도 미래와 연결될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취약하고 온전치 못한 쫓겨난 자들의 언어에서 이와 같은 힘과 역사를 본 우에노 지즈코의 ‘여자들의 사상’을 살펴보자. 이 책의 서두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어 현실에서 자신의 문제를 문제화할 수조차 없는 어려움을 겪을 때 자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된 말들”이 있으며, 자신이 “앞선 이들이 자아낸 말을 받아들여 사상을, 사상의 인격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개하는 ‘앞선 이들’ 가운데 모리사키 가즈에의 사상이 있다. 1927년생인 모리사키의 말은 현재 시점에서 볼 때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지만 20세기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자신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언어로 재구성된 사상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선택할 만하다.

312 ‘제3의 성’에 제시된 ‘출산의 사상’은 모리사키가 이제까지 별 문제없이 쓰던 ‘나’라는 일인칭 단수형의 대명사를 임신 중인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형성되었다. 그는 “임신 5개월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나는 문득 ‘나는’이라고 말을 시작해놓고서는, ‘나’라는 1인칭을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며, “’나’라는 말의 개념과 사고, 그리고 용어에 담겨 있는 인간의 생태가 임신한 나와는 굉장히 동떨어진 것이라 실감하고 나서 비로고 나는 여자들의 고독을 알게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전적으로 홀로 있는 나’를 상정하는 ‘나’라는 말이 자신의 신체적 경험과 불일치함을 감지한 그는 그것을 자아의 복수성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시킨다.

주의할 것은 모리사키가 임신에 대한 이와 같은 감각이 임신을 경험한 사람들 모두에게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임신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자기 신체의 현실을 표현해냈다는 것이다. 모리사키가 기존의 언어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임신의 경험을 자기 언어로 표현해낸 덕분에 이후에 임신의 경험을 표현해내는 다양한 말들이 시의 영역에서든 학문의 영역에서든 등장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관념들이 경험과 더불어 진지하게 다루어지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대주의’라는 개념이다. 모리사키의 ‘출산의 사상’이 낳은 이 개념은 자신이 살아있는 시대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고려할 수 없는 현대사회의 위기를 드러내는 징후적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해낸 개념이다.

출산의 사상에서 오늘날 ‘미래 세대와의 연대’라고 부르는 생태적 사유의 모태를 발견한 것은 아동문화 연구자 무라세 마나부였다. 그는 “우리라는 존재 속에는 개체로서의 몸이라는 ‘독신’의 존재 방식과는 다른, 개체를 뛰어넘어 개체를 연결하는 ‘3세대 존재’가 살고 있다”며 모리사키에게서 개체의 경계를 넘어 계속되는 행위를 호명하는 방식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우에노는 ‘나’라는 존재 속에 있는 ‘3세대 존재’를 ‘나’의 안에 과거와 미래가 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풀이한다. 그는 일인칭에 시간의 차원을 들여옴으로써 ‘복수의 나’로부터 근대적 개인의 관념을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과 죽은 자와 태어날 자와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관계적 주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314 출산의 사상에서 주목할 것은 임신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임신이라는 개인적인 신체 경험에서 이와 같은 미래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드러내는 말과 사상을 구성해냈다는 점이다. 또한 그 사상으로부터 또 다른 사유와 말이 이어졌다는 것, 다시말해 모리사키의 ‘몸-말’에서 비롯되어 소위 출산의 사상의 역사가 생겨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쫓겨난 자들의 경험을 표현하는 말과 이야기를 억압하거나 삭제함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말소시켜온 숨겨진 역사를 생각할 때 이러한 역사의 중요성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역사에 관한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의 논의에서 ‘존재의 말소’와 그게 대한 저항을 살펴보자. 솔닛은 친구 집안의 족보 이야기를 듣고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역사에 여성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여성들은 존재하는 동시에 말소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때 쓰인 “존재하는 동시에 말소된다”는 말은 쫓겨난 자들의 상황을 매우 잘 드러낸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름이 사라지고, 그러한 삭제와 배제를 통해 가부장제 서사의 일관성이 확보되는 것을 보면, 온갖 낙인으로 인해 내쫓긴 사람들의 경험을 삭제함으로써 체제가 이전과 다르지 않게 유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사례와 더불어 솔닛은 1976년에서 1983년까지 벌어진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시절에 군사정부에 의해 ‘사라진 사람들 los desaparecidos’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에 따르면 반체제 인사, 활동가 등을 비롯하여 1만 5,000명에서 3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군부에 의해 ‘제거’되었고 여전히 ‘실종’ 상태이다. 사람들은 누구든 자신을 밀고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웃이나 친구와 대화를 중단했다.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보호하면 할수록 그들의 존재는 점점 더 희박해졌다. 그런 와중에 실종에 대항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월 광장의 어머니들Las Madres de la Plaza de Mayo’이라고 불렀다. 사라진 사람들의 어머니였고, 그들이 나타난 장소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통령 공관 까사 로사Casa Rosa 앞에 있는 오월 광장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한번 나타난 그들은 사라지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광장에 나타나 자식과 손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앉는 것을 금지하면 걷고, 공격받고 체포되고 심문받고 쫓겨나도 다시 돌아와서 자신들의 고통과 분노를 공개적으로 말했다. 모성이라는 감정적, 생물학적 유대는 당시 군부조차도 쉽게 좌익이나 범죄자로 낙인찍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모성과 신뢰성은 여자들의 갑옷이 되어주었고, 이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판단할 때 어머니의 역할은 일종의 장막이었으며, 그 덕분에 누구도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던 체제에서 여자들은 제한적으로나마 행위의 자유를 얻었다.

솔닛은 자기 존재를 삭제하려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단어로든 이미지로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반란이라고 말한다. 이는 앞서 논의한 반란자로서의 유대인 파리아를 연상시킨다. 이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말과 행위를 그 자체로 ‘반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말과 행위가 오직 여성을 위한 것이거나,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어서가 아니다. 이들의 존재가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차별적인 제도의 부당함과 그러한 비인간화를 위한 차별 관념의 난폭한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말과 행위가 저항의 의미를 갖는 이유는 왜 학문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실천적인 정치라는 다른 영역에 파고드는 삶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대한 사이드의 다음 답변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이드의 말에는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 정치를 단순한 이해 집단의 정치로 분류하고 고립시키거나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간과하는 차별과 정의에 대한 몸의 감각이 스며들어 있다.

나에게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67년 이후 어떤 시점에 나는 나 자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느꼈다. ... 이윽고 사태 전체의 의미가 훨씬 거대한 차원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나 자신의 민족적 배경에서 유래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의식을 하게 되었다. 내가 팔레스타인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투쟁에 관여함으로써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 미국의 아프리카계, 라틴계 사람들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단체와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한 교류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이 이들 여러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팔레스타인 투쟁이 정의에 대해 되묻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겠다는 의지의 문제였다.
*이어서 서경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의 시도를 통틀어 ‘인문주의humanism’라고 불러왔다. 세련된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은 이 말을 어리석다 여기고 멀리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이를 사용해왔다.” 사이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이 도덕과 정의와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집을 그는 “‘마지막 승리의 필연성’을 말할 수 없게 된 시대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말이라고 표현한다.

쫓겨난 자로서 자기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자신이 연루되어 있는 사회와 역사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은 발화는 단순히 한 개인이 경험한 무언가를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버틀러의 말처럼 “자신을 설명하려고 할 때 ‘나’는 자신에게서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이 자아가 이미 사회적 시간성 - 자신의 서술 능력을 초과하는 - 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에 대한 설명, 자기 자신의 출현의 조건들을 포함해야만 하는 설명을 하려고 할 때, ‘나’는 당연히 사회적 이론가가 되어야 한다.”(버틀러)

쫓겨난 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자기 경험을 말하기 시작하면, 그는 결코 자기의 고통에만 머물 수 없다. 자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찍힌 낙인과 상처를 말할 수밖에 없고, 그 상처를 만든 조건이 사회적인 것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쫓겨난 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찾았을 때조차도 그는 말이 부족함을, 말과 경험 사이의 틈이 좀처럼 메워지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 자신을 만든 사회적 조건과 동일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 말이 부족함을 안다. 이러한 부족함 또는 결핍을 자각할 때 쫓겨난 자는 자신이 대표하는 정체성을 이름으로 갖는 사람들의 경험을 동일한 하나로 통합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나와 동일한 조건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고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사회적 조건을 표현하는 언어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른 언어들 사이의 틈을 봉합하지 않고 열어젖힌 채로 앞의 인용문에서 사이드가 말한 정의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어야만 서로 다른 조건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도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차이를 봉합하지 않는 정치적 장을 마련하는 일은 특히 쫓겨난 자들 사이에서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들 자신이 분열되고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아렌트의 말처럼 사람들이 모두 세계를 다르게 경험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말과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말과 경험 사이의 틈과 서로 다른 경험들 사이의 틈을 인식하는 분열의 감각은 배제를 원리로 삼는 보편성이 아닌 타자들의 고통이 연결될 수 있는 보편성을 찾는 토대가 될 것이다. 새로운 보편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쫓겨난 자들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일이나 경험의 언어를 말하고 듣는 일이 지니고 있는 난점과 실천적 중요성을 먼저 탐구하기로 한다.




>> May 28, 2021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_ Yang, Chang-Ah
1장 쫓겨난 자들의 장소: 저항의 장소, 관계의 장소

1) 정치 사유와 장소 상실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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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지리적 탐구에서 이런 장소 개념을 처음 발견한 인본주의 지리학자들은 법칙과 일반화를 추구하는 공간 과학의 논리보다 주관성과 경험이 강조된 세계에 대한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사고, 개념, 세계 내 존재 방식으로서의 장소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푸 투안은 우리가 장소를 통해 지각하고 경험함으로써 세계를 알게 된다고 주장하며, 사람과 장소 간의 정서적 유대를 뜻하는 ‘장소애Topophilia’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렐프도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경험되는 장소를 강조하며 현상학에 기대어 논의를 발전시켰는데, 그는 특히 투안이 간과했던 ‘장소 혐오’ 현상을 개념화하고 장소 상실의 현실을 중요하게 부각시켰다. 이들의 논의는 여성주의적 관점이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한계가 많지만 ‘무장소’나 ‘장소 상실’의 경험이 일상화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 장소와 관계를 맺기 위해 정치적 활동이 필요함을 드러내는 데 적실하다.

274 자율성의 감각,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며 생겨나는 힘과 기쁨의 감각, 그리고 연대의 어려움과 고통의 감각 등. 사람들의 정치 행위 능력은 이러한 감각들을 익히며 배워가는 과정이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제공되는 정보를 확인하며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은 “마우스 클릭 한 번 이상의 시간이 드는 무언가에 더 이상 공들일 시간이 없”고 “우정은 광대역 인터넷 접속과 페이스북의 ‘친구’ 숫자 계산, 혹은 하루 동안 보낸 문자 메시지의 숫자로 대체”된다. 이런 현상이 확대될 때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점차 서로 관계 맺으면서 함께 사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직접 대화를 나눌 때의 느린 리듬에서 오는 주의 깊은 태도”는 “생각하거나 혹은 그저 빈둥거리며, 뭔가에 감탄하고 모르는 무언가에 빠져볼 시간”이나 “진정으로 타인의 몸을 제대로 느껴볼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의 몸을 알아갈 시간”을 겪으면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74 실질적 만남이 단절되고 과도한 정보에 노출된 상태를 존 버거John Berger는 ‘공간 섬망증’으로 표현한다. 이는 시간의 흐름이나 지평 없이 현재만 있어서 어떤 행동도 지속되지 않고 쉴 시간도 없는 상태, 즉 일종의 자아 박탈 상태다. “우리는 항시 뉴스 속에 잠겨 있지만 감정이 결여된 현재 속에서 살아가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의 연결 또는 변화시킬 가능성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음을 느낀다. 온갖 파편적인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사는 동네로부터, 우리의 육체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발을 딛는 땅으로부터 우리는 근본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275 장소는 우리와 별 상관없이 단순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언제든지 떨어져 나올 수 있는 추상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과 연결되어 있는 근본적인 바탕 및 요소이며 장소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자체이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장소가 변화하고, 그 변화가 다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땅’과의 유대, 장소가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기초이고 장소의 욕망이 인간의 다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라면, 동질성을 요구하지 않는 공통의 장소를 어떻게 구성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렌트의 정치 개념은 이질성을 통해 관계 맺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결합시킴.

276 슈뢰르가 간과한 것 = 서로 다른 사람들이 부딪히고 협력하며 공통의 일에 참여하는 몸의 경험을 쌓는 일의 중요성. 생각이 변화하려면 습관이 변화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고 거기에는 타인과의 만남과 더불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표상 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그와 관련된 경험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277 타인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적 영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아렌트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행위의 장소가 사라진 상황은 낯설지 않다. 마르크 오제 Marc Augé는 도시에서 개인들이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공항이나 기차, 환승역 등 익명의 공간이 갖는 특성 - 사람들 사이의 관계 부재, 역사의 부재, 정체성의 부재 - 을 ‘비장소non-plac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이 점차 현대인의 장소 경험을 드러내는 개념이 되었다. 비장소 경험의 보편화는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 우리가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역사적인 장소를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장소 상실과 더불어 우리의 행위 경험이 변형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는 경험은 점차 사라지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곳에서 일시적으로 머물다가 떠나는 경험이 익숙해지는 것이다.

장소가 사라져가는 근대적 상황에서 쫓겨난 자들은 정치 행위를 통해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를 일시적으로 만들어내고 그러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일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비장소 경험이 주류인 사회에서 이러한 장소 생성 행위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특히 사람들이 함께 장소를 생성하고 꾸려나가는 행위는 개인이 자기의 운명을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 체계와 삶의 습관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저항의 의미를 드러낸다.

278 이와사부로 고소는 이러한 저항의 역할을 하는 장소를 ‘지마타’라고 부른다. 그것은 원래 ‘길이 걸쳐 있는 곳’이라는 뜻이며, ‘이별의 길’이나 ‘교차로’를 의미하지만 사람들이 집합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는 ‘교류와 교통의 공간’을 지칭하기도 한다. 지마타에서는 각종 의식이나 축제, 퍼포먼스, 상행위, 데모가 이루어진다.


2) 평의회 체제: 저항의 장소, 관계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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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디디위베르만은 이러한 저항의 장소를 적절하게도 “개방의 공간, 가능성의 공간, 미광의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공간”이라고 부르며, 잠재적 힘을 미약하면서도 놀라운 “반딧불”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282 “오직 말과 행위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말이 공허하지 않고 행위가 잔혹하지 않은 곳에서, 말이 진의를 감추는 데 사용되지 않고 현실을 드러내는 곳에서, 행위가 침해하고 파괴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관계를 확립하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데 사용되는 곳에서 실현된다. 사람들이 실제로 서로 말을 나누는 법을 배우고 함께 행위하는 법을 배울 때에만 인민의 모임은 권력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권력은 힘strength, 강제력force, 권위authority 와도 다르다. 아렌트는 이 세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힘: 독자적인 존재자entity가 갖고 있는 어떤 특성. 하나의 대상이나 인물에 내재하는 고유한 특성으로서 다른 사물 및 인물과 관련하여 증명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독립적이다.
(2) 강제력: 물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운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를 나타내는 말.
(3) 권위: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선생과 제자 간의 인격적인 권위가 있다. 권위를 보증하는 것은 복종하도록 요청받은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승인으로서 강제나 설득이 요구되지 않는 것이다.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인격이나 직위에 대한 존경이 필요하다. 따라서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음이다.

283 또한 지배의 말은 단일해서 효율적인 반면, 그에 저항하는 말은 가지각색이어서 효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때때로 피지배자는 저항의 말보다 지배의 말을 더 선호한다. 지배의 말이 단순하고 효율적이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자신의 말이 아니니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284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의 소통은 많은 시간과 여유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니 위급하고 여유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소통보다는 해결에 더 골몰할 수밖에 없다.

288 최고 권력인 주권이 신이나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고 할 때, 모든 국민이 통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으면 누가 주권을 담지하게 되는가? 분할 불가능한 주권을 다수의 국민이 대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통치자로서의 국민’과 ‘피치자로서의 국민’이 구분되고 전자가 후자를 대표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구도에서 통치자와 피치자의 일치라는 민주주의 원칙은 유명무실해지고, 현실에서 ‘통치자로서의 국민’은 - 혁명의 경험이 무색하게도 - 대개 지식, 재산, 혈통, 성별에 따라 결정된다. 결국 국민은 전체로는 절대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개별적으로는 매우 나약하며 무능한 존재인 것이다.

290 두 측면은 적의 생산을 통해 국민의 비국민화 또는 난민화의 방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외의 적에 대한 적개심은 국내의 적을 생산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된다. 그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쫓겨난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의 이해관계 및 국가의 의지와 대립하여 쫓겨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아렌트는 루소의 일반 의지와 특수의지 개념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희진은 현 세계 체제를 ‘시장-안보 국가market-security’ 체제, 즉 자본, 배타적 정체성, 군사주의라는 세 가지 축으로 작동하는 체제로 본다. 국민국가와 시장 경제 체제는 대립되지 않고 결합된 형태로 국가주의와 세계화를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대규모 난민화에 대한 저항의 방식을 여러 측면에서 고려하게 한다. 계급과 젠더 중에 무엇이 먼저냐는 식으로 논쟁하기 보다는 그 것들을 낙이능로 삼아 거주민들을 난민으로 만드는 내쫓음의 메커니즘에 주목해야 한다.

292 아렌트는 동질적인 하나의 국민 또는 민족이 한 국가에 소속된다는 것을 그 토대로 삼고 있는 국민국가가 원칙상 배제의 논리에 따라 작동된다고 생각했다. 번스타인은 평의회에 대한 아렌트의 관심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에 맞닥뜨리면서 구체화되었다고 보며, 아렌트가 반유대주의에 대한 문제 의식을 통해 국민국가의 의미와 숨은 갈등들에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번스타인은 그 갈등을 근대의 “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민족 주권이라는 특수한 요구 사이의 불안정한 긴장”으로 요약한다. 19세기에 이미 발견된 그 긴장이 해결되지 못한 채 제국주의와 전체주의가 발흥한 시기에 이르자 주권은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게 된다. 단일민족의 주권에 대한 논리가 “보다 국수주의적인 형태 속에서 소수 집단을 인구 중 다수 민족으로 강제적으로 동화시키거나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아렌트가 국가 없는 자를 주로 난민을 통해 이해하며, 난민을 어딘가를 떠나 다른 곳에 도착하는 망명자라는 좁은 의미로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국가 없는 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난민으로 한정될 수 없으며 국가권력이 내국인들도 적극 배제하여 국가 없는 자를 생산해내는 형태라는 주장을 위해 제기된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에서 경제 논리에 지배되어 공통의 것과 다양한 것을 소멸시키는 근대사회의 생리를 드러낸 점과 ‘혁명ㄹㄴ’에서 공포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아렌트 사유 내에서도 국민의 비국민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본다.

296 변화와 참여의 열망은 관계의 힘에서 온다. 그 힘은 사람들이 더 이상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무력하지 않으며 함께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 관계가 기쁨을 주지 못하는 관계, 즉 서로 다른 사람들을 똑같게 만들고 한 쪽이 다른 쪽을 누르는 방식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그것은 공통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세계를 사라지게 만드는 폭력적인 힘을 발휘하여 관계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자발적인 행위를 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공통의 삶에 대한 흥미를 일깨우는 것, 사람들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하고 그 것을 실험할 수 있게끔 권유하고 자극을 줄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 이러한 과제야말로 오늘날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이자, ‘일말의 인간성’이 보장되는 얼마 남지 않은 장소를 지킬 수 있는 방식일 것이며, 또 다른 ‘삶의 형식’을 구상할 수 있는 방식일 것이다.

297 경쟁 체제에서 개인의 생존을 넘어서 공통의 삶을 위한 형식이 가능할까? 장소 구성의 경험은 최근에 이어지고 있는 쫓겨난 자들의 저항들에서 보고되고 있다. 2011 월가 점거 운동. 2012년 도쿄 다테강 하천 부지 등에서 ‘야숙자’ 추방에 맞선 운동들,




>> May 27, 2021

Quot.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진리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동의에 따라 형성되는 것" by Arendt



>> May 27, 2021

작업 설명 보충   Weights of Speak Out

+한국와 뉴욕의 시위현장 피켓을 보며 느꼈던 점
한국: 모두가 동일한 문구가 프린트된 피켓을 들고 있음
뉴욕: 각자 다른 문구 혹은 직접 손글씨로 쓴 피켓을 들고 있음
이 부분에 대한 불편함 혹은 궁금증 해소

한나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p241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경험이 가능하려면 집단의 구성원을 ‘진짜’와 ‘가짜’로 구분하고 진짜라는 이름 아래 개별적인 차이를 동질화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반유대주의에 저항하여 유대인의 이름으로 싸우지만 진짜 유대인의 범주를 세우지 않는 것, 여성 혐오의 사회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싸우지만 진짜 여성의 범주를 세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May 27, 2021

a Thought

의제적 활동 fictive activity

‘마치 ... 인 것처럼’ 행위하기의 양상

마치 ... 인 것처럼 / 그런 것처럼
마치 ... 이 아닌 것처럼 /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마치 가족인 것처럼
마치 가족이 아닌 것처럼

마치 노예인 것처럼
마치 노예가 아닌 것처럼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마치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마치 친구인 것처럼
마치 친구가 아닌 것처럼

마치 부자인 것처럼
마치 부자가 아닌 것처럼

마치 일을 하는 것처럼
마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한국인인 것처럼
마치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치 소속된 것처럼
마치 소속되지 않은 것처럼

마치 공생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공생할 수 없는 것처럼

마치 아는 것처럼
마치 모르는 것처럼




>> May 27, 2021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_ Yang, Chang-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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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아렌트의 자유 개념에 대한 고찰은 근대 사회체제의 원리로 작동되고 있는 ‘홀로 있는 자유’라는 자아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계 속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자유’의 경험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사적 생활에서만 주장하고 향유하기만 한다면 전적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혁명 127-128)” 에서 볼 수 있듯이 아렌트는 함께하는 자유의 경험을 미국 혁명에서 발견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정신의 부재 상태에서” 그 경험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적절한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경험은 사라지기 쉬우며, 인간의 정신 속에서 완성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건은 공동체에 아무리 소중한 경험일지라도 망각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서문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라진 경험은 많은 경우 기존의 언어로 잘 포착되지 않는 쫓겨난 자들의 경험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자유의 경험이 제대로 표현되지도 전달되지도 못하는 바람에 혁명의 정신은 제대로 사유되지 못했고, 혁명이 일어난 장소에서조차 이어지지 못했다. 파리코뮌, 독일혁명,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 헝가리 혁명 등과 같은 다른 혁명들도 이와 마찬가지 이유로 맥이 끊겼다. ... 이 시대의 개인이 타인과 세계와의 관련성을 심각하게 상실했다는 사실을 새삼 명료하게 확인하게 된다.

240 한스 파이힝거 Hans Vaihinger The Philosophy of “As if” 마치 ... 처럼의 철학. 의제적 특성
*파이힝거는 의제적 활동 fictive activity을 “보조 개념군의 원조를 통하여 사고의 모든 목표의 달성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 수단의 산출과 사용”으로 정의함.

아감벤에 따르면 의제fiction는 로마 시민법에서 창안된 것으로서 불확실한 사실을 뜻하는 가상이 아니라 확실한 진실에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상정하여 몇 가지 법률상 귀결을 이끌어내는 것을 뜻한다. 이 상정이 부정적인 것이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정식으로, 긍정적인 것이면 ‘그런 것처럼’이라는 정식으로 표현된다. 일례로 코르넬리우스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이 감옥에 수용된 상태로 죽은 경우 그를 ‘수용 상태가 아닌 것처럼’ 또는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죽은 것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241 아렌트의 행위 개념은 쫓겨난 자들의 전통과 억압받는 자들의 역사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만큼 ‘마치 ...인 것처럼’은 근대적인 의미의 이상과 목표의 요청이나, 그와 같은 요청을 바탕으로 이해될 수 없다. 쫓겨난 자의 시간은 진보하는 시간을 거슬러 삭제되고 망각된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인 것처럼’ 행위하기는 이미 규정되어 있는 정체성/동일성이나 본래성의 이상에 맞추어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다. 아렌트의 유대인으로서의 경험을 고려해 보아도 ‘마치 ...인 것처럼’ 행위하기는 자기동일적이고 본래적인 유대성을 상정하고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억압받고 쫓겨나는 상황 속에서 그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마치 유대인인 것처럼’ 또는 ‘유대인으로서’ 싸우는 것이다.

아감벤이라면 이때의 ‘...으로서’가 정체성/동일성의 ㄱ정 및 지속이며, 그것이 차이를 무차별화하고 동일화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유대인이 존재해도 이들은 ‘유대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함께 싸울 수 있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경험은 이렇게 하나의 이름으로 싸우면서도 행위자들이 동질화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경험이 가능하려면 집단의 구성원을 ‘진짜’와 ‘가짜’로 구분하고 진짜라는 이름 아래 개별적인 차이를 동질화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반유대주의에 저항하여 유대인의 이름으로 싸우지만 진짜 유대인의 범주를 세우지 않는 것, 여성 혐오의 사회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싸우지만 진짜 여성의 범주를 세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243 아감벤의 ‘...이 아닌 것처럼’과 달리 아렌트의 ‘마치 ...인 것처럼’의 행위 양식에서 행위자는 분명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행위자의 ‘누구임’은 타인들에게만, 즉 세계 속에서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만 나탄나다. 다시 말해 ‘마치 ...인 것처럼’ 행위하기는 사회에서 ‘무엇what’으로 여겨져 쫓겨난 자들이 그에 대항하여 자신들이 ‘누구who’임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비인격화 depersonalize’ 하는 사회 전체에 대항하여 ‘마치 사람person인 것처럼’ 행위하는 일이고,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자신을 하나의 ‘인격person’으로 ‘수행적으로performative’ 구성해내는 일이다. 앞서 나는 이러한 정치를 ‘정체성/차이의 정치’로 개념화했고, 가면과 퍼포먼스의 은유를 통해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이 없으며, 행위 뒤에 고정된 주체가 없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244 버틀러는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한느가’에서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에서 2006년에 일어난 미등록 이주자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와 그때 시위자들이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부른 사건에 주목한다. 버틀러는 아렌트의 텍스트를 통해 그 사건에 대해 사유하는데, 특히 아렌트가 사람들이 함께 행위할 수 있다는 단순해 보이는 사실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나’에서 ‘우리’로 대명사가 변환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혁명은 ‘우리’가 함께 행동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즉 어떤 행위가 효과가 있으려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여야 한다. ‘나’로부터 ‘우리’로의 변환은 ... 최소한 행동의 필요조건을 구성한다(버틀러.스피박)

보통 국민국가 내에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내세워진 주체는 단일한 국민으로 호명된 것이거나 기존의 확고한 정체성/동일성의 경계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믹구에서 소위 ‘불법’ 이민자들이 스페인어로 미국 국가를 노래한 행위도 그러한 정체성/동일성의 정치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까? 그 노래에서 표현된 ‘우리’는 타자를 배제하는 우리와 같은 것일까? 버틀러는 이 집회에서 외쳐진 ‘우리’를 기존의 국민국가의 소속 양식 또는 정체성/동일성을 확보하는 소속 양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 ‘우리’라는 소속 양식을 새로 짜는 정치 행위로 본다.

스페인어 미국 국가의 등장은 민족의 복수성에 대해, 그리고 ‘우리’와 ‘우리 것’의 의미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국가는 누구에게 속하는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 국가가 누구의 것이냐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 누가 포함되는지, 그러니까 소속 양식의 문제다. 노래를 하고 스페인어를 통해 ‘우리’임을 확인하는 이 ‘우리’는 민족과 평등에 대한 사유 방식을 변화시킨다. 만약 부시 대통령의 당시 주장처럼 미국 국가는 오직 영어로만 노래해야 한다면, 여기서 민족은 언어적 다수자로 제한된다. 이 경우 언어는 누가 민족에 속하고 누가 속하지 않는지를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이 순간이 민족적 다수 집단이 자신의 기준에 맞춰 민족을 정의하려 하면서, 누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배제 규범을 감찰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한 자유의 행사는 특정한 종류의 언어 행동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기존에 정의된 민족 집단 안에 포함되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평등이다. 평등의 조건 없이 ‘우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버틀러, 스피박)

기존의 소속 양식에 들어맞지 않는 자들이 ‘우리’로서 행위할 때, 기존의 소속 양식의 불평등 구조가 드러난다. 미국에서 다른 언어로 국가를 부를 수 없다는 부시의 주장이 드러낸 배제의 규범은 미국 시민이 아닌 이들이 ‘마치 미국 시민인 것처럼’ 행위했을 때 또렷이 드러난 것이다. 자유를 행사할 수도 없고 불평등한 조건에 처해 있는 자들이 ‘자유가 있는 것처럼’ 행위하고 평등한 존재’로서’ 행위할 때, 그 행위는 지금 이곳의 평등의 조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하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평등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사회에서 쫓겨난 이주민들이 거리에서 ‘우리’로서 행위하자 이들의 문제가 공적인 의제로 제시되면서 ‘정치’의 장이 열린 것이다. 자유롭지 않고 평등핮 ㅣ않은 삶을 사는 이주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자 거리가 곧 공적 영역이 된 것이다.

핵심은 여기서 집회에 참가해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갖지 못한 ‘미등록된’ ‘불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유를 실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버틀러, 스피박). 자유는 자유에 대한 권리를 요청하는 행위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를 요청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자유가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자유의 요청이 곧 자유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등하게 살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유의 실행이다. 이들이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행위하는 가운데 ‘우리’의 의미가 다시 만들어진다(버틀러,스피박).

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권리는 천부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가 이루어질때 비로소 생성된다는 이 개념의 수행적 의미는 ‘마치...인 것처럼’의 행위가 평등과 평등의 조건의 요구라는 것을 잘 드러낸다. 아렌트의 인간 개념은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관계적 의미에 충실하다. 그것은 “한 인간의 선험적 성질이나 자질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존재의 평등한 관계”를 뜻한다. 그래서 ‘마치 ...인 것처럼’ 행위하기는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비인간들’의 “존재론적 주장”이면서 삶을 평등하게 만들고자 하는 “정치적 열망을 구성하는” 것이다(버틀러, 스피박)

‘인간’이란 개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공통성과 평등의 상황을 가리키며, 공통성과 평등은 변화와 행위를 구축하는 기본 전제이다.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평등한 존재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행동하고, 변화를 만들어내고, 무엇인가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의 개인적 행동은 평등의 조건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없다. 다른 말로 그 개인적 행동은 무엇보다 평등을 확립하는 행동이어야 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행동은 복수의 행동이 되고,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행동이 될 기회를 갖게 된다. (버틀러,스피박)

248.. 곧 권리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요구해야 하는 것임을,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미국 국가를 부르면서 미국에서 살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새로운 민족주의를 표현한 것이거나 또 다른 종속으로 이어지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행위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예측 불가능성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정치의 영역은 그와 같은 위험을 통제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응할 때만 열린다.

또한 버틀러에 따르면 이주민들이 미국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며 미국 국가를 부를 때, “우리는 평등하다Somos equales”라고 스페인어로 미국 국가의 한 구절을 외친다. 그것은 ‘우리’의 평등을 선언하는 것이면서 그곳의 동료들에게 이 구절에 담긴 자신들의 선언을 번역하라고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이들의 노래는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의 ‘상태state’에 의문을 제기하고 번역의 과제를 제시한다. 평등의 요구가 다른 언어로 발화되면서 번역을 요구할 때 틈이 생겨난다. 이 틈은 평등의 가능성을 여는 조건이 된다. 이와 같은 틈이 존재할 때 ‘우리’는 기존의 보편성과는 다른 보편성을 드러내는 행위 주체가 될 수 있다. ‘우리’안의 차이는 서로 끊임없이 번역을 요구함으로써 국한성을 유지하면서도 닫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3부에서. 버틀러는 라클라우 및 지젝과 보편성에 관한 논쟁을 펼치면서 기존의 보편성이 특정한 문화 규범을 토대로 삼고 있으며 포함과 배제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기존 보편성의 허구성과 배제성을 드러내는 일에서 또 다른 보편성이 형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 번역’과 ‘패러디’는 ‘해방적 보편성’을 발견하기 위한 방식이다. 전자가 서로 다른 문화 규범들에서 보이는 보편성의 차이를 드러낸다면, 후자는 수행적 반복을 통해 포함과 배제의 경계를 재설정한다.

무엇보다 아렌트의 진단대로 근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더불어 사는 법을 점점 더 잊어가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홀로 사는 법만을 배우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마치 ...인 것처럼’은 신자유주의적 행동 양식에 저항하는 행위 양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홀로 살게 만드는 현재의 완고한 - 다르게 움직이기 어려운 - 구조 속에서 그곳의 틀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사는 것처럼’ 행위하기. 이것은 위선적으로 행위하는 것도 아니고 적응하기 좋게 변신하는 것도 아니다. 아렌트의 행위 개념은 언제나 복수의 인간이 함께 행위함을 의미하고, 쫓겨난 자로서 자유와 평등을 확립하는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251 ... “쫓겨난 자들은 경쟁의 구조 속에서도 ‘마치 공생할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한다.” 즉 이들은 경쟁에 매몰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를 만듦으로써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평등한 관계를 발명해내며 행위한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행위 주체성을 자기 마음대로 쉽게 바꿔 입을 수 있는 옷과 같은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마치 ...인 것처럼’의 행위는 추상적 형식이라기보다 명백히 우리 자신의 몸으로 행하는 것이며 타인과 함께 이루어내는 일이다. 우리 몸의 물질성 때문에 변신은 힘겨울 수밖에 없고,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 예측이나 통제는 불가능하므로 행위가 실패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에서 함께 사는 삶을 구축해내고야 만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Georges Didi-Huberman은 아렌트의 행위 개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하기로 다시 명명한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한다. 평등과 자유를 외치는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인 것처럼 행위할 때에만 “비인간적이 된 세계”에서 “일말의 인간성 a bit of humanness”을 완수하기 때문이다.

디디위베르만에 따르면 아렌트는 레싱에 관한 글에서 공적 영역이 제구실을 못하는 어두운 시대에 직면한 사람의 상황과 그러한 상황에서도 공적 영역을 지키기 위해 그가 선택할 만한 행위를 이야기한다.

이런 시대는 “공적 영역이 빛을 발할 능력을 상실한” 시대이며, 더 이상 우리가 이성의 차원에서 ‘명석하다éclairés’고, 감정의 차원에서 ‘명랑하다radieux’고 느껴지지 않는 시대이다. ...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이 선택할 행동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빛의 “세계 밖으로” 후퇴하면서도 “여전히 세계에 유용할” 수 있을 만한 것, 요컨대 미광을 추구한다. 그들은 레싱이 그랫던 것처럼 후퇴하지만 고립되지는 않는다. ... “레싱은 사유 속으로 후퇴하지만 그의 자아로 고립되지 않는다. 만일 레싱에게 행동과 사유의 비밀스러운 연관성이 존재한다면 ... 그 연관성은 행동과 사유가 모두 운동의 형태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있었고, 그러므로 행동과 사유를 모두 정초하는 자유가 운동의 자유라는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후퇴에 내재한 고통은 운동에 내재한 기쁨이 된다. 이러한 욕망, 이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하기는 타인에게 전달되는 와중에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마치 ...인 것처럼’은 타인과 함께 사는 ‘공적 영역’이 고유의 힘과 자리를 상실한 시대에 가능한 정치 행위의 형식으로 제안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행위자가 자아 속에 고립되지 않는 한 후퇴의 시간마저도 운동을 위한 적극적인 사유의 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을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인 것처럼’ 행위하기는 논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경쟁 가운데 고립된 개인의 삶의 형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정한 장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치 ...인 것처럼’ 행위하기는 사람들을 비인간화하고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는 삶과는 다른 삶의 형식을 실험하는 장소를 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자리가 없는 자들이 그 세계에서 함께 살기 위한 기본권을 주장할 때, 그것은 단순히 집 있는 자들의 권리를 똑같이 획득하여 자기 자리를 마련해달라는 요구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행위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세계 자체에 대한 변화의 요구로 나아가며, 체제의 논리 바깥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imagination’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상상력은 쫓겨남의 경험에 대한 호소, 경청, 토론이 일어나는 저항과 관계의 장소에서 생겨난다.




>> May 26, 2021

a Thought
back to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Merleau-Ponty의 개념과 연관 지어 다시 생각하기
-감각 인지 틀을 사회에 적용시켰을 때 어떻게 변화하는지

공적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일의 의미를 ‘차별(discrimination)’의 구조를 중심으로 밝힌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유대인 파리아와 파브뉴 개념 분석을 통해 다루어질 텐데, 이 두 개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사회적 차별의 표지로 재해석된다. 다음으로 파리아로서의 유대인: 숨겨진 전통에서 다루어지는 네 가지 파리아 형상을 차별에 저항하는 네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들 형상은 역사 속에서 삭제되거나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유대인 파리아의 정치적 경험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아렌트 정치 개념을, ‘드러남’과 ‘시작’이라는 그의 행위 개념에 대한 설명에 근거하여, ‘보이지 않는 자들의 존재 현시’와 ‘역사 없는 자들의 역사 생성’이라는 의미를 담은 ‘파리아의 정치 the Politics of Pariah’로 다시 쓴다.



>> May 26, 2021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_ 양창아
Hannah Arendt, The Politics of the Exiled/Expelled/Ousted/Excluded/Ruled-outed(can't exactly translate into English) _ Yang, Chang-Ah

‘홀로 있는 자유’ 대 ‘함께하는 자유’
파리아로서의 유대인: 숨겨진 전통에서 자유의 의미
-자연적 자유를 하이네 Heinrich Heine에게서 발견, 자신의 삶과 파리아의 불운한 운명의 동질성을 시로 표현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자유를 라자르에게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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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햇빛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비친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에게 나날의 증거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자연에 비하자면 “불평등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잘난 제도는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러워보”였기 때문이다.

파리아의 비실재적 위치, 사회적 뿌리의 결여

214. 유대인은 한편으로 자신에게 적대적인 환경과 부류들에 의존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적대적인 부류들과 얼마간 작당하며 사는 “높은 곳에 위치한 교우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자르에게 자유란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유럽 사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사회에 자기를 맞추어 성공한 파브뉴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파리아의 이중적 노예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자유란 무엇보다도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파리아와 파브뉴가 맺은 불안정한 관계의 메커니즘 - 그는 이 관계가 후원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한쪽의 삶이 다른 쪽에 저당 잡혀 있다고 보았다 - 을 깨고 유대인의 위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파리아로서 정치의 장에 들어가서 투쟁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파리아가 유대인이 처한 독특한 상황을 의미 있는 정치적 요소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회에 숨어 살며 그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유럽인이나 부유한 파브뉴를 후원자로 찾는 것을 라자르는 유대인이 불운의 상징인 슐레밀의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지의 역할을 맡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파리아가 거지가 되면, 그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는 그가 가난하기 때문도 아니고 구걸하기 때문도 아니다. 이는 그가 투쟁해야 할 사람들엑 구걸하기 때문이고 또한 그가 자신을 가난하게 만든 사람들의 기준으로 자신의 가난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파리아가 거지의 역할을 받아들이면, 파리아는 자동적으로 자기를 배제시킨 사회질서를 떠받치는 지지대 중 하나가 된다.

217. ...정치적 자유와 정반대 개념인 ‘내적 자유inner freedom’의 관념을 검토한다. 내적 자유란 사회에서 자유를 부정당하고 억압과 강제에 시달릴 때 그로부터 도피하여 느끼는 감각을 뜻한다. 그는 이것이 외부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접근하거나 방해할 수 없는 “내부성inwardness으로의 은둔”을 전제하고 있으며, 세계와 단절되어 자아에만 집중하여 사는 경험, 일종의 “내부 공간inward”에서만 사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때 내부 공간은 “마음heart”도 아니고 “정신mind”도 아닌 “혼자 있는” 자아의 공간이다. “마음이나 정신은 세계와의 상호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하고 기능하기 때문이다.”

218.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와는 관계없다는 태도와 연관되는 세계 소외라는 현상은 “‘최소한의 정치, 최대한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강령”이 내포하는 자유방임의 전제와도 상통한다.




>> May 10, 2021

지속가능성과 아렌트의 ‘불멸성’
연관성 만들어 보기



>> Apr 16, 2021

삼십세 _ 잉게보르크 바흐만

완독.
p72. 너무 시끄럽게 군다는 집에서의 비난과, 목소리가 너무 작다는 학교에서의 비난 사이에서 아이들은 묵묵히 생활에 순응해간다.
p140.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점일세. 저 희생자들, 수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전혀 길을 제시해주지 않는 다는 거야! 게다가 시대는 살인자에게 편리하도록 변해가네. 희생자는 희생자일 따름이지. 그것으로 전부야. 나의 부친은 돌푸스 시대의 희생자였고, 할아버지는 군주 체제의 희생자였고, 나의 형제들은 히틀러의 희생자였네. -중략-
p261. 언어의 발효

reading completed.
p72. Between the criticism at home for being too loud and the criticism at school for being too quiet, the children have been quietly adjusted themselves to their lives.
p140. The scary thing is that. Those victims, so many victims, don't show us the way at all! Besides, times are changing to be convenient for murderers. A victim is only a victim. That's all. My father was a victim of the Dolphus era, my grandfather was a victim of a monarchy, my blood brothers were a victim of Hitler.
p261. Fermentation of language



>> Apr 15, 2021

Das Dreissigste Jahr / Ein Schritt nach Gomorrha _ Ingeborg Bachmann
The Thirtieth Year / A Step Towards Gomorrah
삼십세/ 고모라를 향한 한걸음 _ 잉게보르크 바흐만

퀴어, 소수자, 남성성, 여성성, 애정관계에서의 서열 및 권력 관계
Queer, Minorities, Masculinity, Femininity, Hierarchy + Power game in Romantic Relationships



>> Apr 14, 2021

AI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아니 사람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시를 쓸 수 있을까?
문득 AI를 개발하는 것이 결국 인간을 아기 때부터 키우고 교육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도록 투자하는 과정을 압축 생략하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인간을 자원으로 간주하고 인적 자원에 소요되는 비용을 절감하여 적은 비용으로도 고도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대체 노동을 추구하는 것 말이다. 결국은 AI의 출현과 발전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이고(이미 많은 분야에서 대체되고 있다) 소득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소수의 사람에게 부가 집중될 것이고 예측 가능한 사회는 더욱더 경직될 것이다. ai, 로봇과 같은 기술의 발전이 모두의 노동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설계되는 방법은 이러한 대체 노동이 사유재보다는 공공재로써 활용되는 것이다. 인류 공동의 노동 해방이 될지, 반대로 노동 시장의 불평등을 초래할지는 각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에 달렸다. 하지만 한 가지 염려스러운 점은 ai, 로봇이 공공에서의 활용이 된다면 기술의 질적 하락이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발전할 수는 없을까?

ai와 로봇의 출현은 결국 인간이 일하기 싫어하는 본능,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



>> Mar 9, 2021

일기
영화 미나리 _ 정이삭
Minari _ Isaac Chung

일을 끝내고 헛헛한 마음을 안고 집에 마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극장에서 영화 미나리를 보고 왔다. 즉흥적으로 시간이 맞는 영화를 고른 것치고는 예술성과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본 것 같아서 운이 좋았다. 상업 영화와 달리 속 시원하고 뚜렷한 결말의 맺음보다는 다소 현실적이지만 여운이 남는 엔딩이었다. 고구마 백 개를 먹은 듯한 초기 미국 이민자들의 삶을 보는 것이 괴로웠지만 (사실 곧 베를린으로의 이주를 생각하는 나를 영화의 상황에 대입해보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되고 지겨운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중략...

미나리나 기생충, 조커 같은 이런 부류의 영화를 볼 때면, - 여기서 말하는 이런 부류란 하층민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영화들- 무언가 불편한 지점이 생긴다. 영화의 흥행 이후 촬영지인 빈민가에 놀러 가서 투어를 하고 감성 사진 찍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예전부터 Poverty Porn이라고 불리는 것들. 가난의 상품화, 빈곤 포르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드러내서 상품화하는 것. 이분들의 삶을 민낯을 가려줘야 할까 드러내서 해결하려고 해야 할까.

+ The director was very honest and brave in sharing his personal memory and stories. In a very beautiful way.




>> Mar 5, 2021

일기
예전에 작업 설명을 하거나 작업노트를 쓸 때 습관적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투나 현학적인 단어를 선택하곤 했던 것 같다. 그것이 작품을 대하는 formal 한 형식이고 '여기서부터 나는 굉장히 진중하고 이것은 심오한 작품이다'라고 명시하는 것과 같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좀 더 치중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에 와서는 초딩에게도 내 작업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고 단순해진 것 같다.



>> Mar 4, 2021

일기
...중략...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 화려한 집의 벽을 보며 내가 힘들게 이어가려고 하는 작업과 작품활동이 상류층들에게는 너무 쉽게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고 애호의 대상 중 하나라는 점이 나를 조금 괴롭게 했다. 나는 뭘 바라고 작업을 해왔던가. 내가 치열하게 작업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과 아크릴 상자 속에 안전하게 보호되어 벽에 걸려있는, 집을 한층 아름답게 꾸며주는 그림들과의 괴리감이 너무나 커서 내가 한없이 초라해보였다.
복잡한 감정은 꼬일대로 꼬여있는데 더이상 글이 쓰여지지 않는다. 오늘은 여기까지 인가 보다.



>> Feb 17, 2021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oder: Wie Gewalt entstehen und wohin sie führen kann _ Heinrich Böll
The Lost Honour of Katharina Blum, or: how violence develops and where it can lead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_하인리히 뵐

작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읽어봤는데 음 별로 의미 있는 부분은 발견 못함. 소설의 내용이 당시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문제작으로 여겨질 만큼 충격적이었다고 하는데 요즘의 흔한 저널리즘 행태라서 나에겐 별로 큰 충격이 없음. 오래된 목가구 속 안에서 끊임없이 나무를 갉아먹는 애벌레 같은 저널리즘의 소모적 폭력성과 그에 무방비로 노출된 한 여성의 이야기. (스포 아님)



>> Feb 2, 2021

일기
생활이 안정되면 작업이 고루해지고 생활이 궁핍해지면 불안해서 작업이 또 안된다. 이러나저러나 작업이 안되는 건 마찬가지. 되지도 않을 일 왜 붙잡고 있는 걸까. 결국 되지도 않을 로또를 매일 사는 것과 같은 건가. 그러기엔 대가가 너무 크다. 작품 활동을 못한 건지 안 한 건지 의미 있는 전시를 하지 못한지 오래되었고 매년 올해는 해야지 하는 마음도 돈을 버는 일을 하면서 점점 무뎌진다. 꼭 해야만 하는 당위성도 잃고 꼭 하고 싶다는 열정도 식어간다. 본능적으로 남아있는 창작의 욕구는 가르치는 일을 하며 조금이나마 해갈되는 것 같고 이렇게라도 무언가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실질적인 내 작업을 점점 미룬다. 이따금씩 물어오는 전시와 작업 이야기는 나에게 상처만 주고 안부를 건넨 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관계가 불편해진다. 배설하듯이 창작하면 되는데,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배설을 하겠다고 이리도 질질 끄는 형국이라니. 조금 초라한 기분이 든다.



>> Jan 29, 2021

문자혁명_국립한글박물관


-두문자는 손으로 써서 빈칸을 띄워서 인쇄함.
-이 빈칸에 금박으로 장식한 그림이 들어가기도 함.
-독일의 목판화 삽화와 일본의 목판화 비교해보기.

근데 조선의 한글 번역 사업(유교, 불교)은 국가 주도로 행해졌고 독일의 인쇄술 발달은 상업적인 이유로 민간의 전문업자들에 의해 확산되었는데,
결국 조선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통치하기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양의 가톨릭과 기독교는 왜 민간인들이 나서서 성서를 읽었을까? 그 전에 이미 국가적 통치 전략으로 가톨릭이 주입되어 있던건가? 조선의 유교 한글 번역 사업은 통치를 위한 것? 불교를 번역한 것과 유교를 번역한 것의 차이는?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어쨌든 종교나 철학이나 결국 기능은 비슷한건가?

*그외 기타




>> Jan 28, 2021

برای سماء / For Sama / 사마에게
directed by Waad Al-Kateab, Edward Watts

"떠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저항이다"
"Not leaving is also a kind of resistance"




>> Jan 18. 2021

Anselm Kiefer 안젤름 키퍼
from legibility to effacement and thus from representation to abstraction.
읽기 쉬움에서 사라짐으로 따라서 표현에서 추상으로



>> Jan 16. 2021

일기
결국 두 지점에서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것 같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는 마음과 그래도 한 번 사는 인생 하는 마음. 지금은 후자에 조금 치우쳐 떠나기로 결정한 것 같다.



>> Jan 14. 2021

Jon Henry_Strange Fruit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KP gallery



-타오르는 피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우유를 사용하는 모습, 중동에서는 레몬을 사용하고, 예전 한국에서는 소주로 화염병을 만들어 던지는 식의 시위 현장이나 저항의 맥락에서 식재료의 다른 활용에 관심.
-대형할인마켓 타겟의 심볼 앞에서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 노골적으로 의도가 보이나 단순하고 직접적인 게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긴 한다.
-오랜만에 타인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던 전시. 내 아들이 다음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말하는 방식이 예전의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함.

*그외 기타





>> Jan 10. 2021

Talking by not talking

내가 한창 개인의 정체성 나아가 그에 미치는 critical social issues에 천착해 있었을 무렵 그것을 작업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Rirkrit와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할 수도 있다고.




>> Jan 10. 2021

천하대혼돈 _ 슬라보예 지젝

-처음 책을 보았을 때 제목이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읽고 나니 제목이 적합했구나 싶다.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세계 이슈에 지젝의 생각이 더해져 대혼돈을 일으킴.
-정치철학은 깊이 들어가면 어렵다.
-본인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일컫는 사람도 처음 보고 책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도 낯설어서(예를 들어 ‘인민’) 거부감이 들었는데 생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이런 지점까지 갈 수 있겠구나 싶다. 지젝의 통찰력은 이미 유명하고 비판의 칼날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내부로도 향해 있다는 점에선 고무적이라고 생각.
-지젝이 연재했던 글을 모아 출간한 책이라 다소 파편적이고 전개가 급작스럽게 점프하기도 하는 듯. 그러나 다 읽으면 통일성 있는 주제가 명료하게 떠오름.
-4부 문화와 권력 재밌음. 지젝이 동료 학자 아비털 로넬(여성 교수)의 제자(남성)로부터의 성폭력 고소 사건을 옹호하면서 펼친 논개가 흥미로움. 가해자의 의도와 피해자의 체험 간의 복잡한 관계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를 예로 들며 설명. 이 복잡한 현상을 간단히 설명하는 단어가 한국엔 있다. = 피해자 코스프레
-무지에 대해 깔끔한 화법으로 조목조목 까고 가려운 부분 긁어줘서 시원함; 하우스 오브 예스, 콘센티콘 부분
-유발 하라리는 정말 어디에서나 나오는구나
-p73-98 앙겔라 메르켈의 적극적 난민 수용 정책 이유와 포퓰리즘(우파, 좌파)의 작동 방식에 대한 궁금증 해소됨.



>> Jan 10. 2021

일기

문득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 최경한 교수님과 함께 걸었던 때가 생각난다. 대학교 1-2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 나는 학과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일 중 하나는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을 후문까지 안전하게 배웅해 드리는 것이었다. (이유는 교수님 댁이 후문 근처였던 건지 따님이 후문까지 차로 데리러 오시는 건지 기억이 정확하진 않다) 처음에는 걸음이 느린 교수님과 맞춰서 걷는 것이 영 불편하고 곤혹스러웠다. 교수님과 나를 제외한 모두가 우리 옆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것이 왜인지 모르게 얄미웠고 답답하게만 느껴졌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교수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점점 봄에서 여름으로 아름답게 변화하는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처음엔 교수님과 어색한 침묵을 메꿀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이 꽃 저 꽃, 이 나무 저 나무, 눈에 보이는 대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러다 점점 정말로 자연물에 관심을 갖고 보게 되더라. 교수님과 속도를 맞춰서 걷다 보면 나의 보폭과 발 걸음 수를 속으로 세면서 걷게 된다. 의식적으로 걷는 것이다. 그럴 때면 마치 시간의 흐름을 늘리며 걷는 것 처럼 느껴졌다. 다른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시간의 양이 두 배로 늘어나는 느낌이다. 이때의 풍요로운 시간과 최경한 교수님과 함께한 걸음이 여름 내음과 함께 코 끝에 시처럼 남아있다.

+물론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그 때는 잘 못 알아들었지만 🙃




>> Dec 6. 2020

Die Wand_ Marlen Haushofer
벽_ 마를렌 하우스호퍼

'Ich stehe auf einem Platz, auf den ich nicht gehöre, lebe unter Menschen, die nichts von mir wissen und die Hälfte meiner Kraft geht schon auf in der Anstrengung, die es mich kostet unauffällig zu bleiben.'
'저는 소속되지 않은 장소에 있습니다.
저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살고,
가진 힘의 절반은 눈에 띄지 않는 노력에 쏟습니다.'

소설 주인공 능력치
+5 프로 자가격리자
+5 프로 집사력
+10 프로 동숲러



>> Dec 3. 2020

부서지고 잘려나간 것들.
미끄러지고 분열되는 것들.



>> Dec 1. 2020

일기

마의 산
원제목 Der Zauberberg
영어 제목 The Magic Mountain

즉, 마법의 산이라는 의미.

근데 문득 왜 마의 산으로 번역한 건지 의문이 든다. 마법의 산, 마의 산, 느낌이 너무 다르다. ‘마’라는 단어에서 ‘매직, 마법’을 유추해 낼 세대가 몇이나 될까. 내용을 고려했을 때 ‘마의 산’이 좀 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은 원제목의 뉘앙스와 작가의 의도를 조금 벗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다소 무겁고 딱딱하게 들려서 내용과의 균형을 깨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재미가 반감되어 들린다.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도 몇 년 동안 정말 손이 안 가는 책이었는데 원문을 찾아보니 오히려 간결하게 쓰여있어 좀 더 이해하기 쉬웠다. 번역을 거치면 읽기 쉬워야 하는데 왜 더 어려워지는 건지. 번역 문화가 더 융성해져서 좋은 번역본이 많아졌으면.



>> Nov 27. 2020

Sharon Hayes_ There’s so much I want to say to you 중,

At a conference called “Schizoculture,” held at Columbia University in 1975, the speakers were magnetic and illustrious: William Burroughs, R.D. Laing, John Cage. The audience - graduate students, artists, writers, and freelance intellectuals. Later on, “Schizoculture,” organized by Silver Lotringer, would be billed as the conference that launched French theory in America.

The gathering took place in a lecture hall or auditorium that seated about 300 people, a raucous, animated group, who heard, for instance, a lecture about psychoanalyst Jacques Lacan, and were told that “the unconscious is structured like a language.” R.D. Laing said that graduate students were the most depressed population in any society.

All day, men - no women - took the microphone and spoke. There was always a buzz in the audience, whispers, an audible hum of excitement. Then it was time for John Cage. He walked onto the stage and began to speak, without the microphone. He stood at the center of the small stage and addressed the crowd. He talked, without amplification, and soon people in the audience shouted, “We can’t hear you. Use the mic. We can’t hear you.” John Cage said, “You can, if you listen.” Everyone settled down, there was no more buzz, hum, or rustling, there was silence, and John Cage spoke again, without the microphone, and everyone listened and heard perfectly.
Text by Andrea Geyer.




>> Nov 25. 2020

일기

새가 죽었다
알에서 갓 부화한 새끼 십자매 5마리가 모두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본가에서 키우는 새들이었는데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 아빠가 서울 집에서 하루 잠을 자는 동안 모두 죽어버렸다. 내가 아빠한테 부탁만 하지 않았어도, 새끼들은 보살핌을 받고 살아있었을 텐데 나의 잘못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얼마 전 아빠 십자매도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이제 어미 십자매와 그의 첫째 딸만 새장에 남았다고 한다. 두 모녀가 이번 겨울을 무사히 보냈으면 좋겠다.

/
땅으로 사라진 것들과 달리
하늘로 사라진 것들을 우리는 찾지 않는다.
감히 찾을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만큼 하늘이 주는 무한성은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 같다.



>> Nov 18. 2020

외장하드 날린 날.
*경험 기록: 너무 피곤할 땐 업그레이드나 포맷 등 중요한 일을 진행하지 말자.



>> Nov 14. 2020

vertically upside down
의외의 유사성



>> Nov 12. 2020

사적 영역의 공적 영역화

핸드폰에서 인스타그램 앱을 지운지 좀 되었다. 대신 컴퓨터 웹사이트를 통해 굳이 매번 로그인을 하고 피드를 체크한다. 인스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불편함을 통해 일종의 심리적 버퍼를 만든 것인데 작업 루틴과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어 계속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빠르고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인스타 앱은 무언가 내겐 압박으로 다가온다. (흡사 고딩 시절 미대입시할 때 강사 선생님이 뒤에서 내가 그리는 걸 초 단위로 계속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수에게 그렇듯이) 굉장히 유혹적인데, 일상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감상과 감흥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인스타에 올릴 만한 것만 의식하고 뽑아내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정작 중요한- 실재 경험과 내 감각이 만나 기화되는 그 순간에만 얻어지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대외활동 홍보용으로는 적절한 듯싶지만, 나의 취향과 일상을 소모적인 대상으로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자기 착취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아 불편해 지워버렸다. 이와 관련해 한나 아렌트의 글이 생각나서 메모해 둔다.

사적 영역의 공적 영역화 / 아렌트의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근원을 찾아볼 수 있는 사적 영역과 공론 영역의 구분은 지금의 그것과는 다소 개념이 다르고 한국에서의 공론 영역 개념은 한국의 특수성에 의해 변화해왔다. 고대 폴리스에서 사적 영역은 가정을 의미하여 주로 여성과 노예가 담당했고 공론 영역은 정치를 의미하여 폴리스 내의 귀족과 시민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생활에 필수적인 것을 뒷받침하는 가정이 있어야 남성은 폴리스에 참여하고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가정이 없는 남자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처가 없기 때문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이 둘의 영역이 섞여 진정한 의미의 정치의 장은 사라지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 진정한 의미의 공론 영역이 사적 영역으로 흡수-소멸된 듯하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기능을 하는 까닭에 공적인 것은 사라지고 사적인 것이 유일한 공동의 관심사로 남았다. “_ p144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공적인 무대에 있는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에서 오는 강력한 빛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도 많다. 공론 영역에서는 보고 듣기에 적절하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만이 공적인 빛을 견딜 수 있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것들은 자동적으로 사적인 문제가 된다. 사적인 관심이 일반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 오직 사적 영역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안다. 예컨대 사랑은 우정과는 달리 공적으로 드러나는 한, 끝나거나 없어진다. 사랑에 내재하는 무세계성 때문에 사랑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려는 모든 정치적 시도는 우리에게 거짓되고 왜곡된 것으로 비친다.” _ p124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공적 찬사(SNS의 좋아요 버튼으로 자의적 해석함)도 사용하거나 소비할 수 있고, 음식이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듯 오늘날의 지위도 필요를 충족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음식이 배고픔을 충족시킨다면 공적 찬사는 개인의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중략.... 하지만 그것은 그 무용성 때문에 공동세계처럼 견고하고 지속적이기는 어렵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공적 찬사가 사물을 시간의 파괴로부터 구해주는 공적 공간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공적 찬사의 생산과 소비가 매일 훨씬 더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그 무용성으로 인해 가장 무용한 금전적 보상이 오히려 더욱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것이 되었다.” _ p130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잡생각/ 사적 영역이 없고 공적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사람- 정치인과 연예인- 은 추해진다던데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적 영역은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근데 또 그렇다면 이 웹페이지는 충분히 사적인가?





>> Nov 4. 2020

오랜만에 공간 사옥 감. 아라리오로 바뀌고는 처음. 인상 깊은 작품을 봄.

-작은 공간에서 진동으로 울리는 사운드
-몸의 다른 기능을 발견한 느낌
-저것이 견갑골이구나 요가 선생님이 좋아합니다

-SF 공상과학영화에서 나오는 어떠한 생경한 생명체보다도 낯섬. 에일리언보다 더 에일리언(외부자) 같은
-바닥의 재료, 전분 물 같은 고체-액체의 중간, 발 바닥을 딛고 서면 서지고 발가락으로 파고들면 바닥으로 푹 꺼지는 재밌는 물질. 뭘까?
-릭 오웬스가 떠오름
-인간의 신체에서 얼굴이 감정 표현의 주요 기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김수근 건축가 공간은 뭔가 모르게 갑자기 섬뜩한 게 있음. 벽돌 건물인데도. 얼마 전에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다녀와서 그런가. 두 건물의 원형 철제 계단을 오르내릴 때 묵직하면서도 경박하게 탕탕탕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잊히질 않음.

코헤이 나와 Kohei Nawa_ Vessel_2015

+Jul.26/2021
Found a place where he might have gotten his inspiration for the material of the floor. Pamukkale, Turkey. Thanks to Elvan.



>> Nov 2. 2020

"Make America Great Again"


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 내가 공부하던 학교의 석사 과정엔 ‘멘토 위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학생들은 뉴욕 아트씬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예술가들 중 2명을 멘토로 선택하고 학기 중 2주간 인텐시브 하게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뉴욕에 캠퍼스가 있는 학교의 장점을 활용한 독특한 프로그램이었다. 선호하는 특정 예술가의 그룹에 학생들이 몰릴 경우가 있어서 학과에서는 1지망에서 3지망까지 신청을 받았는데, 운이 좋게도 나는 첫 학기부터 내가 1지망으로 원하는 멘토 그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웬만한 현대미술 책에 이미 박제될 만큼 유명한 예술가들이라 경쟁이 꽤 치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수의 학생이 그 예술가 그룹을 원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멘토로 선택한 예술가 중 한 분은 이 학교에 지원한 이유 중 하나였을 만큼 그의 작품을 좋아했고 아티스트로서 꾀나 존경했었는데, 보통 갤러리나 미술관을 함께 둘러보는 다른 예술가들의 멘토 위크와는 달리 그는 매 학기마다 독특한 멘토 위크 플랜을 준비해와서 학생들을 항상 기대하게 하곤 했다. 멘토 위크가 시작되면 그는 주로 자신의 그룹에 속한 학생들과 함께 미니 밴을 타고 뉴욕에서 멀리 떠나 이색적인 문화를 가진 지역을 방문하거나 쉽게 컨택 할 수 없는 기관과 사람들을 만나러 여행을 다니곤 했다. (지금까지도 이때의 여행만큼 프라이빗 한 투어와 방문한 기관으로부터의 환대를 받은 경험이 없는걸 보니, 새삼 유명한 예술가의 네임밸류 파워를 느낀다.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고급 정보와 그것의 활용에 그는 얼마나 다양한 접근 기회를 얻었을까. 작가로서 부러울 따름이다) 학업 때문에 뉴욕 말고는 미국의 다른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적었던 나로서는 이때의 여행이 다양한 미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여느 다른 뉴욕의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한적한 곳에 별장 겸 세컨드 하우스 같은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멘토 위크 동안 이곳도 방문하여 행-아웃, 칠-아웃 하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함께 음식을 준비해서 근사한 저녁 식사도 하고 마당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불 멍을 때리기도 했다. 그는 또한 굉장한 수집광이라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책이 집에 가득했는데 그것들은 아직 어색한 학생들 사이에서 좋은 대화거리가 되어주었다. 집 이곳저곳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적당한 때가 되면 모두 벽난로가 있는 서재에 한둘씩 모였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온갖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고백건대 사실 언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당시엔 대화의 주체로 참여하기보단 거의 리액션과 리스닝을 담당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관찰한 미국인들의 대화 패턴은 신기하게도 시답잖은 스몰 토크로 시작해서 굉장히 딥하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 작품 크리틱을 할 때도 적용된 패턴인데 후에 다른 글에서 자세히 서술해보겠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어 정치 이야기로 이어졌다. 미국 정세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걸 듣던 중, 여러 학생들 사이에서 대화에 지분이 적었던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걸 잊어버린 건지 아니면 그냥 상관없다고 생각한건지 어느 순간 그 멘토 예술가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며 offensive 한 감정을 느꼈다. 그 공간의 누구도 나와 같이 이상한 느낌을 받진 않은 것 같았다. 항상 나이스하던 그가 속으로는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바보같이 후에 눈치챘지만, 그의 멘토 그룹엔 African-American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최소한 내가 속한 2년 동안에는) 물론 본인 나라의 위대함을 되돌리겠다는 건 국민으로서 당연하게 가질 수 있는 생각이고 이 문구는 일자리 부족과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위대한 미국을 이뤄내겠다는 취지를 가진 역대 미국 대통령 후보자들의 단골 캠페인 문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offensive 한 감정을 분명히 순간 느꼈고 이후에 그 말을 왜 그렇게 느꼈는지 항상 궁금해했다. 그때는 트럼프의 선거운동이 초반이라 그 말의 내용을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 캠페인이 인종차별적 견해, 왜곡된 애국심, 배타적 민족주의 등의 냄새를 은연중에 풍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것은 2016년 이래로 증명되었다!)

재밌게도 요즈음 미국 대선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수감 이슈가 뉴스에서 함께 나온다. 이것이 나의 오래전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켜 글로 남겨보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트럼프의 한국 버전인) 이명박의 5년을 겪었다. 그리고 그는 17년의 형을 선고받고 2020년 11월 2일 오늘 구치소에 다시 수감된다.



justice_Nov2_2020.gif


투표권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질문 좀 하고 싶다. 4년간의 트럼프를 겪으며 미국은 더 위대해졌는지. 전 미국 법무부 장관인 Eric Holder가 인터뷰 중 한 말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Exactly when did you think America was great?"



>> Oct 31. 2020

작은 고모 공연 _ 돈화문 국악당

[공연 요약: 그림 없이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처용무의 여러 버전 사료들 중 하나를 해석/연구하고 복원하는 작업하심. 흥미로운 지점 있어서 기록으로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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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신라 헌강왕 때 처용랑 설화를 바탕으로 발생한 춤, 섣달그믐의 나례 또는 궁중이나 관아의 의례에서 처용의 가면을 쓰고 잡귀를 쫓아내던 벽사적인 춤.
-처용가: 신라 시대, 처용이 역신에게 아내를 빼앗긴 이후 지은 8구체 향가. 4구체 향가에서 10구체 향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
*천연두: 역신
-처용은 중동에서 피난온 *외국인(실크로드?), 현재의 울산지역에 당도하여 입국이 허가되지 않을뻔 했으나 당시 천연두가 창궐하던 신라 시대에 천연두를 고칠 줄 아는 유일한 민족?이여서 입국이 허용됨. 이후 신라에 정착하여 부인을 얻었으나 천연두 환자를 보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천연두에 걸려버림. 이를 역신에게 아내를 빼앗겼다라고 표현.

-황소의 난, 黃巢之亂, Huang Chao Rebellion: 농민봉기, 10년동안의 난으로 당나라 망함

-죽간자: 당악정재가 진행될 때 두 사람이 각각 하나씩 들고, 춤 추는 사람 앞에 서서 무대의 입장과 퇴장을 인도하는 구실을 하는 의물. 백성의 염원, 봉황이 먹는 대나무 열매를 앞세워 봉황이 날아오기를 기원하는 의미. 즉 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하는 모든 백성들의 염원을 죽간자에 담아 그 시대의 예술적 표현을 상징화한 것.





>> Oct 27. 2020

MMCA 소장품 하이라이트 2020+

Ich habe eine interessante Ausstellung im MMCA gesehen, in der Ich den Fluss der modernen koreanischen Geschichte durch Kunstwerke lesen konnte. Es gab einige zum Nachdenken anregende Punkte.
-Als Arbeiter werden Frauen und Kinder dargestellt.
-Männer sitzen, plaudern, rauchen und schauen sich etwas an oder sie sind Gegenstand eines Selbstporträts.
-의외로 전시구성 괜찮았음. 집중해서 보면 많은 걸 읽을 수 있는 전시. 압축해서 한국 근현대 주요 한국 미술 흐름을 잘 보여준 듯.
-김기창의 ‘정청’(1934) 작품의 재료-> 실크에 수묵담채 느낌이 오히려 신선했음.
-노동하는 사람들의 손과 발이 다소 크게 그려짐. 여기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ex. 이중섭의 ‘세사람’1943-45
  + Nov 11, 2020  "such and such strong hands have been paralyzed, as if they had been numbered by nightshade: so many strong men's courage broken, so many productive operations hindered; this and the other false direction given to labor, and lying image of prosperity set up, on Dura plains dug into seven-times-heated furnaces." p.187_unto this last_John Ruskin
-전쟁 후의 작품들-> 러프한 재료와 거친 표면이 공통적으로 나타남. 무언가 뜯기고, 망가진 느낌, 색채도 어두움
-작품에서의 인물 표현이 서양의 영향을 받아 동양인 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인처럼 보임. ex. 권진규의 조소 테라코타 ‘지원의 얼굴’ 1967
-1970-80년대 한국의 추상화를 보면서 든 생각-> 추상화는 관람자 스스로를 투영하는 일종의 요즘 셀피 같은 기능을 하는건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추상화를 선호하는건 아닐까. 작품의 중심, 크래딧이 작가에게서 감상자에게 넘어온다고 생각.
-1980년대부터 민중미술 등 노동자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그림에서 포착되는 듯. ex. 황재형의 ‘황지 330’ -> 극사실주의 보다 더 사실적인, 당시를 증언하는 증인과 같은 그림.



>> Oct 27. 2020

"Art is the highest form of hope"
sort of self-help book for young artists?




>> Oct 26. 2020

Die Antiquiertheit des Menschen _ Günther Anders
The Outdatedness of Human Beings
인간의 골동품성 _ 귄터 안더스

가끔 핸드폰으로 엄마, 아빠, 마이클에게 무엇을 보여주곤 할 때 즉각적인 반응이 없을 때가 있었다. 알고 보니 핸드폰 속 글씨가 잘 안 보여서 그런 거였다. 멀리 실눈 뜨고 보거나 돋보기 사용하는 모습을 곁에서 목격하고 지켜보다 보니 요즘 들어 시각의 퇴화, 인간의 퇴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 주름, 흰머리 등 늙어감의 징후를 볼 때와는 다른 충격이었는데, 뭐라고 할까 눈과 같은 감각기관은 세상을 직접적으로 인지하고 수용하는 플랫폼인데 그것이 변화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시각의 상실과는 다른 차원인 시각의 퇴화. 새로운 기술의 출현에 열광할 때 왜 오히려 인간의 골동품성에 관심이 생기는지. counterbalancing?

+퇴화와 함께 에이징, 숙성, 발효 등과 같이 시간의 축적으로 인한 변화에 관심. 부정적 개념보다는 긍정으로 해석하려 노력 중.

+11/18, 2020
반면 이와 비슷하게 무언가의 변화로 인해 한 쪽에서 낙차가 발생하는 것과 관련하여,
요즘 전자 책에 익숙해져서 종이 책을 볼 때도 줌인하려고 손가락을 책에 가져가는 나를 발견할 때.
골동품성인데 그 대상이 나인지 책인지 아님 나의 인지과정인지 모르겠다.



>> Jul 2. 2020

두더지와 뱀 / 심리정치 _ 한병철

규율사회의 폐쇠적 시스템 속의 동물 = 두더지 = 노동자, 개방을 견디지 못함, 예속된 주체, 서브젝트,
후기 산업시대의 비물질적이며 네트워크화된 생산 형식의 신자유주의적 통제사회의 동물 = 뱀 = 경영자,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열어감, 프로젝트,
두더지 -> 뱀으로의 이행, =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전환
규율체계 - “몸”처럼 조직됨.
신자유주의 - “영혼”과 같은 양상, = 따라서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없이 확산”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위 동기의 촉발”
모티베이션, 프로젝트, 경쟁, 최적화, 자발성 = 신자유주의 체제의 심리정치적 통치술

뱀- 죄, 즉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배 수단으로 사용하는 채무를 상징.


>> Jul 2. 2020

스마트 권력 / 심리정치 _ 한병철

스마트 권력의 특징 = 조용히 작동, 자연스럽게 작용, 친절, 허용의 형태로 구현, 자발적, 호감, 의존적으로 만들기, 긍정적 감정으로 착취, 유혹, 참여, 이야기하라고 강요, 좋아요 버튼, 자발적, 저항 자체가 발생하지 않음, 저절로 이루어짐,

규율 권력의 특징 = 억압, 강제, 금지의 형태로 구현, 온순하게 만들기, 침묵 강요

좋아요-자본주의의 특성을 보여주는 문구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PROTECT ME FROM WHAT I WANT


>> Apr 2. 2020

Darf der Zeit 시간의 향기_ 한병철
향기로운 시계: 고대 중국으로의 짧은 여행 中

중국에서는 향인이라고 불리는 향시계가 19세기까지 사용 되었다.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 을 비워낸 정신이다.
바로 이러한 비움이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에 깊이를 준다.
시간의 깊이는 모든 순간을 온 존재와, 그 향기로운 영원성과 결합한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서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 Mar 31. 2020

결국 예술가는 AI로 대체될까?

최근 인터넷에서 AI가 만든 그림들 -예를 들어 인상파 화가의 스타일을 참고한-이 유행하면서 창작의 영역도 AI로 대체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 염려?를 하는 것 같다. AI처럼 사고하는 사람들에게는 AI가 만든 그림이나 결과물이 예술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결국 AI는 데이터를 통해 보편적 이미지를 추출해 내 그것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AI는 자아가 평균 값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여 평균 값을 벗어나는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 반면 인간은 아무리 같은 정보를 가르치고 받아들여도 각기 다른 결과를 내놓는다. 유니크한 자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내놓는다. 아무리 같아지려고 해도 같아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자아와 관련하여 AI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가 존재한다.
보편으로의 회귀 vs 유일성으로의 벗어남, 나아감
과거 지반적 vs 미래 지향적
목적 지향적 vs 의미 지향적 혹은 무-목적성
유용성 vs 쓸모없음

1-ai_Mar31_2020

2-ai_Mar31_2020




>> Oct 4. 2019

Ich und die Anderen- Isolde Charim, 나와 타자들 - 이졸데 카림

푸코 저항 역사 담론, 냉엄한 현실과 희미한 상상 사이의 관계

p146~ [요약: 개개인의의 사회 참여 방식과 성격의 변화 과정을 시위, 운동을 통해 설명한 부분]

1세대 개인주의의 참여: 이동에 기초, 타고난 환경에서 벗어나 거대한 대중 조직의 부분이 되기위해 떠남, 자신들의 구체적 조건들을 추상화해야 함, 집단에 녹아들어 집단의 일부가 됨.

2세대 개인주의의 참여: 1세대 개인주의와 완전 반대, 자신의 특수한 구체성을 분명하게 주장, 참여는 자기 자신으로서, 예) 여성, 흑인, 성소수자 등 자신의 특별함으로부터 어떤 규정을 찾으려 하고 이 규정으로 사회화되기를 원함,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 중 하나를 규정력 있는 부분으로 선택-> 이 부분을 가지고 정치적 삶에 진입, 1세대 개인주의의 부분이 되는 참여에서 인정받는 정치 주체가 되는 참여로 바뀜,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를 한 집단의 부분으로 이해함,

3세대 개인주의의 참여 특징:
‘월가 점거 운동’에서 분명하게 드러남, *월가 점거 운동은 금융 위기와 아랍의 봄(2010년 12월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대부분의 나라가 민주화 정부수립에 실패했으며, 지중해를 건너서 유럽으로 가는 난민이 급증함)에 이어 2011-2012년에 벌어진 유명한 저항 운동.

월가 점령 운동을 격렬했지만 금방 꺼져 버림. 이 운동의 짧은 생명력을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 여기에서 살펴보려는 것은 이 운동에 다른 특별한 점이 있기 때문. 월가 점거 운동은 오늘날 참여의 전형이었음. 여기에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정치 참여의 새로운 형태를 관찰할 수 있었음. ‘액체 민주주의’와 함께했지만 최근에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해적당(Piratenpatei)와 마찬가지로, 월가 점거 운동은 정치적인 것의 활성화로 환영받는 한편 대단히 회의적인 평가도 받음. 이런 방식의 참여가 효과적일까? 냉혹한 현실 영역에 이 운동이 무언가를 가져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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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되물을 것-> 만약 참여가 몫을 갖는 일이고, 결정하고 논의하는 것이라면, 참여는 진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고, 진짜 함께 논의하는 것일까?
다르게 물어보자. 진짜 참여에서는 현실이 중요한가, 아니면 참여가 중요한가? 참여와 결정하기의 실재는 무엇인가? 이는 냉엄한 사실로서의 실재, 측정 가능한 결과로서의 현실일 뿐 아니라 참여 자체라는 실재, 즉 참여의 주관적인 현실이기도 함. 참여의 주관적 현실로서의 실재는 소속되고 있고, 인정받으며, 고려받는다는 주체의 느낌을 의미. 이 느낌, 이 감정이 바로 3세대 개인주의에서 의미하는 참여임. 이는 실제로 참여한다는 순수 객관적 관점에서, 참여에 대해 주체가 느끼는 주관적 단계로 이동하는 것. 오늘날 참여는 실재에 참여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실재도 갖는 활동임.
이러한 주장을 저건 속임수이며 단지 느낌일 뿐이다라고 무시하기 쉬움. 그것은 진짜 참여가 아니다! 그러나 느낌만으로 참여하는 일, 참여한다고 느끼는 일은 결핍이 아님을 이해해야 함. -> 참여한다는 주체의 느낌은 허공에 붕 뜬 것이 아니기 때문. 참여한다는 느낌이 싹트기 위해서는 장소가 있어야 함. 느낌이 생겨날 수 있는 활동 영역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경청받는 공명의 공간이 있어야 함. 바로 여기에서 참여의 중요 기준이 냉정한 현실에서 공동으로 결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현실 그 자체임을 알게 됨. 느끼기 위해서는 어떤 공간을 생성해야 함. 참여는 그 자체의 실재를 갖는다는 말은 바로 이 공간의 생성을 의미함.
참여한다는 느낌을 갖는 데 필요한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는 공간이 아님. 그냥 거기에 있는 장소가 아님. 정당 내부도, 정당 외부도 아니다.(지금까지 정당에서 이런 장소를 계획한 적은 거의 없다.) 이런 장소의 창조에 관해서는 빈에서 흔히 보는 전형적인 불평분자를 생각해 볼 수 있음. 빈에는 어떤 공개 행사든 예외 없이 떠벌이 불평분자가 하나씩 있는데, 대부분이 발표 주제와 맞지 않는 내용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 대단히 짜증 나는 상황에서 그는 그러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함. -> 참여는 참여를 위해 미리 준비된 자리에 참석하는 일인가? 아니면 참여의 본질은 준비된 자리를 넘어서는 데 있는가? 참여는 준비된 공간을 채우는 일인가? 아니면 참여는 그러한 공간을 초월하는 곳에서 시작되는가? ‘점거’ 운동은 이 질문에 대한 정치적 대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월가 점거 운동은 광장을 ‘생산’했고, 평범한 공간을 정치적 공간으로, 정확히 말하면 3세대 개인주의의 정치적 공간으로 충전함. -> 그곳은 주체가 참여의 순간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장소였기 때문. 그곳에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개별 개인으로서 관여. 그곳에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개체성을 갖고 공적 무대에 입장.
월가 점거 운동은 참여의 주관적 순간이란 곧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이럴 때에만 오늘날 개인들에게 참여 의지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 줌. 3세대 개인주의의 감소된 자아, 감소된 주체는 자신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체성을 지닌 채 참여하기를 원함.
감소된 주체들은 집단에 들어갈 때 완전히 구체적인 개체성을 지닌 개인으로 인식되기를 원함. 매우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라서, 그들은 어떤 종류의 정체성 지표로도 분류되기를 원하지 않음. 개인들은 이런 방식으로만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하고, 참여할 수밖에 없음. 민주주의를 향한 이 새로운 기본 열망=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 이것이 3세대 개인주의, 즉 다원적인 개인주의의 정치 형식. 완전 참여란 집단이나 계급 혹은 정당과 같은 어떤 보편에 의해 대변되지 않고 자신의 구체적인 개체성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하기를 의미함.
실제로 대의제와 단체 결성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낼 뿐인 이런 상황은 탈정치화로 오인됨. 불신은 모든 기관뿐 아니라 집단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모든 방향으로 향함. 사람들은 2세대 개인주의처럼 하나의 개별 특징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특징들, 자신의 온전한 개체성을 갖고 정치 무대에 입장.(인터넷에서도 스스로 만든 온전한 개체성을 갖고 등장한다.) 월가 점거 운동에서 ‘우리’와 짝을 이루는 유일한 등가물이 추상적인 숫자인 것은 우연이 아님. “우리는 99퍼센트다.” 이렇게 개별화된 사람들과 개인화된 정치 운동은 월가 점거 운동에서 처음 보게 됨. 이는 어떤 생활 양식과도 결합되지 않음. 생활 양식은 동질적인 정체성을 요구하거나 생산하기 마련. 요구 사항이나 명확한 목적이 없었던 것도 당연함. 이 요구나 목적은 완전히 다른 집단 주체와 소속을 요구하기 때문.

3세대 개인주의는 모든 종류의 대의 체제, 모든 종류의 제도 및 제도화에 대해 회의적. 정치적 내용에 대해서도 회의가 지배적. 이를 “프로그램 피로증”이라고 말할 수도. 그러나 대안 없이 수행되는 저항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실제 해답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운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먼저 여기에서는 저항 세력의 대변인을 거부하는 경향이 두드러짐. 반대와 저항을 지휘하는 노조나 좌파 정당 같은 대변인을 점점 더 거부. 이런 상황 때문에 장소, 현장, 광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더욱 중요. 미래를 향한 특정 요구들이 아니라 저항의 순간 자체가 중심. 사람들은 월가 점거 운동과 타흐리르 광장(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광장으로 이곳에서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시작됨.)에서 열리는 토론회, 위원회, 준비 모임, 총회, 청소, 응급 구호 등의 활동을 하면서 환호함. 정치적 에너지를 다른 배수구 없이 분출하기 때문. 민주주의적 순간, 실제 민주주의적 사건의 부활을 보기 때문에 환호함. 정치적 에너지의 탁월한 원천인 분노는 규정된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저항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어찌되었든 이곳에서 새로운 길을 뚫음. 불가리아의 정치학자 이반 크라스테브(Ivan Krastev)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만족의 기계”가 아니라, “불만족과 관계 맺기”.
한 토론회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월가 점거 운동이 시작된 ‘자유 광장’(월가 점거 운동->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시작. 시위자들은 이 공원을 자유 광장으로 바꾸어 부름.)을 방문한 후 그곳에 있었던 노인들의 불만과 불쾌감, 실망을 설명함. 이는 행복을 기대한 데 대한 실망이며, 동시에 정치적 신뢰에 대한 실망. 그곳에 있었던 개인들은 이미 홀로 변화함.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했고 개인으로서, 인격으로서 인정받는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 말하자면 이제 중요한 것은 표현 정치인 것.
잉골푸르 블뤼도른(Ingolfur Blühdorn)-> 모든 것이 그저 모의 실험에 불과하고 유사 민주주의, 연출된 민주주의에 불과하다고 주장. 오래전에 포스트민주주의가 된 것은 아닐까? 실질적인 변화를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의 실행이 아니라 우리 포스트민주주의 시민, 즉 겉모습만으로 존재하는 유사 민주주의 시민이 치르는 민주주의의 의례일 뿐인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민주주의적 개인으로 여기고, 공적으로 그렇게 자기를 드러내도록 하는 의례. 실질적인 변화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채, 우리의 정체성 안에서만 우리를 재확인할 수 있는 의례.
우리가 분노에 차 청원서에 서명하거나 좋아요를 클릭할 때 그것은 진짜 자기 결정이 아니며, 단지 우리의 정체성 안에서 우리를 확인하는 것 뿐. 블뤼도른에 따르면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민 단체 활동에 관계하는 일 혹은 공공장소에서 캠페인을 펼치는 일 등 이 모든 정치 활동은 단지 모의 실험일 뿐이며, 우리가 실제 민주주의 질서 안에 살고 있다는 커다란 환상에 기여할 뿐. 포스트민주주의 연극의 일부일 뿐. 이런 활동은 “민주주의의 자기 이해”를 경험시켜 주는 동시에 제외와 배제, 불평등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집단적 자기 환상”의 실천일 뿐. 더 나아가 이런 정치는 감정 해소를 통해서 견고해짐.
블뤼도른의 모의 실험 이론-> 모든 개입, 모든 정치 행위가 의문에 처하고 모의 실험이나 가상 행위로 평가 절하됨. 눈속임에 불과하며, 실제 변화와 엄혹한 현실을 외면하는 순수한 자체 위생이자 정치적 자족이라고 무시함. 그러나 포스트민주주의의 우울증에 푹 빠지기 전에 우리는 질문 몇 개를 던질 필요가 있음.
실제 참여와 주관적 참여, 현실과 가상, 실제 정치와 주체의 느낌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은 오래된 유물론적 사유. 유물론적 사유에 따르면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는 진짜 장소가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유도되었거나 심지어 가짜임. 이러한 구식 마르크스적 사유를 토대와 상부 구조라 부름. *막시즘에 대한 노트: 진화론+역사학, 하부구조(경제적 생산관계, 노예제, 봉건제 등)-> 상부구조(법, 윤리, 규범, 예술 등)을 결정 = 즉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종속,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유토피아~ 관점.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오래전부터 ‘실재하지 않는’ 행동의 중요성과 사회적 효과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움. 사실 정치적 행동이 일어나는 실재적이고 우월한 장소는 없음. 경제에서도, 국가상에서도 마찬가지. 그리고 바로 오늘날, 3세대 개인주의 시대에는 실제 참여와 주관적 참여의 대립을 더 이상 수용하기 힘들어졌음을 경험함. 주관적 참여는 비실제적이고 효과도 없는 가상의 참여라는 고발이 소용없는 것.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언제나 그러한 집단적 자기 환상을 만들지 않았나? 민주주의는 언제나 하나의 연출 아니었던가? 국민 주권, 투표자의 의지, 자율적인 시민이라는 연출. 우리는 이 오래된 연출과 새로운 연출을 쉽게 구별할 수 있을까? 옛날의 연출은 민족 체험을 생산하는 일이었음. 즉 대중 속에 녹아들 때의 거대한 느낌을 만드는 실천. 반면 오늘날의 연출은 개인으로서의 개인을 표현하는 일, 즉 대중 안에서 스스로 개인을 표현하는 일. 오늘날 정치 운동은 느낌들이 모일 뿐 아니라, 한 장소와 한 순간을 감정들이 빽빽하게 채울 대 작동. 바로 이 일을 월가 점거 운동이 함. 바로 이것이 광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곳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인상을 남김. 그래서 누구나 그곳에 있고 싶어 함. 저명인사들은 그곳에 있었다고 포장했고, 이론가들은 그곳에서 발언하고 싶어 했으며, 내친김에 자기들이 이 사람들을 위한 기초 텍스트를 썼다고 언급하려 함.
이반 크라스테브는 지식인들의 이런 과장을 보고서 오늘날 “민주주의적 감상주의”가 생겨났다고 지적. 바로 그렇기에 5000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모인다는 것. 이전 정치 운동은 진짜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사람들이 축제를 미화하거나 모의 실험에 속아 넘어간다고 비판. 그러나 이미 그 진짜란 건 감상이 아니었던가? 정치 운동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언제나 이미 “빌려 온 의상”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나? 모든 운동은 영향을 주는 장면들을, 사회의 원초적 장면을 흉내 냄. 최상의 경우에 정치적으로 원초적인 장면에서 새로운, 다시 말해 근대화된 버전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함. 이를 위해서 새 버전은 사건이 되어야 한고, 여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중재해야 함. 만약 성공한다면 새 경험은 개인에게 참여한다는 느낌만 주는 게 아니라 또한 전형적인 경험이 됨. 다른 사람들도 이 경험에서 자신을 재인식할 수 있음. 이렇게 느낌의 실재는 효력을 발휘함. 저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반대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감정, 분노, 불평, 실망만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 풍부한 가치가 있고 민주주의의 중심 원료임. 왜냐하면 감정은 3세대 개인주의에서 특별한 기능을 하고,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 감정은 점점 더 기존의 배출구로부터 풀려나서 다원화된 주체들의 매개체가 됨. 감정 안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개별적인 개인이 됨.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것.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변화를 위한 전제는 될 수 있음. 순진하고 단순하다고 현실주의자들에게 시인할 만함.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시대의 정치욕구임. 정당, 조직, 제도들의 합리성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음. 변화는 다른 무언가를 요구함. 변화는 ‘점거자’들이 가져다준 원료를 필요로 함. 그다음에야 원재료를 가공할 수 있음.
월가 점거 운동은 막다른 골목으로 판명되었다고 볼 수 있음. 또한 그 자신들의 요구도 생명을 다함. 그러나 그 광장에서 보여 주었던 것을 진짜 행위와 순수한 경험 공간의 반대항으로 보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님. 점거 운동은 하나의 가르침을 줌. 다원화된 참여의 전형을 보여 준 것. 완전 참여에 대한 열망, 즉 개인으로서 참여하고, 존재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이 명확해질 때 그러한 형상은 전형적임. 3세대 개인주의에서 민주주의적 기본 욕구는 다원화가 가져온 기본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 개인이 자신을 재인식할 수 있는 일반적인 형상의 침식, 부재, 불가능이 정확히 이 욕망을 불러옴. 바로 인정을 향한 욕망. 2세대 개인주의의 인정과는 다름. 오늘날 인정은 온전히 구체적인 개별성에 대한 인정이어야 함.
인정은 단순히 개인의 욕망일 뿐 아니라 오늘날 소속이 실현되는 형식. 오늘날 사회의 부분이 된다는 것은 인식됨을 의미. 이것이 민주주의의 가치. 소속이 바뀌면 비소속도 바뀜. 배제된 존재는 인식되지 못함을 의미. 오늘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은 피에르 로장발롱에 따르면 인정을 향한 소망과 연결되어 있음. 인식되지 못하는,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의 형태 중 가장 흔한 것이 차별=사람들의 구체적인 개별성을 배제하는 일. 이 불평등한 행동 -> 한 개인을 출신, 종교, 성별로 축소. 이런 점에서 3세대 개인주의의 정치적 대립 관계는 인정과 비인정 사이에 있음. 다시 말해 참여와 참여로부터의 배제,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음.




>> Aug 29. 2019

용산 미군 기지 투어

오늘은 미군 기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투어가 당첨되어 다녀왔다. 항상 지나다니던 길 옆 담벼락을 보며 저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막상 그 벽 안쪽에서 보니 그다지 특별할 것도, 어떤 감상에 젖을 만큼 인상이 크지는 않았다. 벽을 내부에서 볼 때와 외부에서 볼 때 갖는 감정의 온도차가 있는 것 같다.

몇 가지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을 적어본다.
-LA 한인타운에 온 듯 기묘하게 섞인 한국식 기와 장식과 미국식 건축물
-건물별 성격을 나타내는 표시와 숫자. 예) T4130 -> temporary 일시적 건물, S4539 -> semi-temporary 반-일시적 건물 등 철거될 건물의 수명을 염두에 두고 부여한 건물 명칭이 흥미로움. (반환할 생각은 있었구나?)
-건축재료적 면에서 일본군이 건설한 건물들은 붉은 벽돌을 주로 사용했고 미군이 건설한 건물들은 큰 사이즈의 벽돌이나 건물을 임시로 사용할 경우엔 얇은 골함석의 컨테이너를 재료로 사용. 일본군과 미군, 두 국가의 군대가 한 나라 수도의 중심에 주둔을 했을지라도 임시로 군정을 맡아서 혼란을 수습할 계획이었던 미군과 견고한 붉은 벽돌로 건물들을 지어 영구적으로 주둔할 계획이었던 일본군, 두 나라의 한국 주권에 대한 태도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임.
-현 용산 지역에는 사실 용산이 아니라 둔지산이 있다는 점(해설사분이 계속 강조). 본래의 용산은 지금의 효창공원을 지나 마포나루 쪽으로 산맥이 있었음. 하여 신용산역 명칭의 탄생 비화 이해됨.
-기지 안 만초천은 오픈 후 랜드마크가 될 가능성이 큼. 아름다움.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이 생각남.
-당연한 소리지만 여러 시대의 역사 레이어가 중첩된 장소/공간이라는 점에서 용산 미군 기지의 상징성과 의미를 잘 살려서 계획을 수립해야 할 듯. 개인적으로 뉴욕의 센트럴파크(생태자연보존, 시민문화활동)+ 베를린 곳곳의 역사적 장소, 뮤지엄(유대인 박물관, 홀로코스트 기념비 등)을 결합한 형태로 재건이 되었으면 함.

여담/ 가수 정엽 씨가 버스 뒷좌석에 앉은 것도 모르고 투어 내내 저분 참 정엽 씨 닮았네라고 생각. 투어 끝나고 해설사분이 사인받는 것 보고 알아차림. 건승하시길.




>> Jul 25. 2019

Finally finished reading 'The Human Condition' This book would be one of the top 3 among the most influential books in my life. 혼자 읽다 포기할뻔했지만 강의 찾아 듣고 그나마 좀 이해해서 다행.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되는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기 좋은 책. 그러나 철학적 기본 언어?가 탑재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움.



>> Jul 3. 2019

A Farewell to Arms

무기[武器;Arms]여 잘 있거라
-Ernest Hemingway

Farewell, Aragog, king of
arachnids. Though your body will
decay, your spirit lingers on in
the quiet, web-spun places of your
Forest home. May your many-eyed
descendents ever flourish and your
human friends find solace for the
loss they have sustained.
-Harry Poter

A Farewell to Arms
(To Queen Elizabeth)

HIS golden locks Time hath to silver turn'd;
O Time too swift, O swiftness never ceasing!
His youth 'gainst time and age hath ever spurn'd,
But spurn'd in vain; youth waneth by increasing:
Beauty, strength, youth, are flowers but fading seen;   5
Duty, faith, love, are roots, and ever green.

His helmet now shall make a hive for bees;
And, lovers' sonnets turn'd to holy psalms,
A man-at-arms must now serve on his knees,
And feed on prayers, which are Age his alms:   10
But though from court to cottage he depart,
His Saint is sure of his unspotted heart.

And when he saddest sits in homely cell,
He'll teach his swains this carol for a song,—
'Blest be the hearts that wish my sovereign well,   15
Curst be the souls that think her any wrong.'
Goddess, allow this agèd man his right
To be your beadsman now that was your knight.
-George Peele. 1558?–97




>> Jun 26. 2019

"Shock and Awe"

Bart: [At the airport] What's up with the Canadian sticker on your backpack?

Lisa: Well, some people in Europe think that America has made some stupid choices for the past, oh, five years. So for the next week, I'm from Canada.

Bart: Uh, I think Dad may blow your cover.

Homer: [pushing through the crowd] That flag is mine! [takes an American flag off the conveyor belt and stands on top of suitcases, waving the flag around] Don't mess with Texas! Shock and awe, losers! Shock and awe!

-The Simpsons_ The Italian Bob


shock&awe_Jun26_2019



>> Jun 10. 2019

Somebody tell me what that means.
"BRMC." What does it mean?
Black Rebels Motorcycle Club.
Isn't that cute?
Hey Johnny, what are you rebelling against?
What have you got?
Hey Kathy, aren't they wonderful?
Did you hear what I said?
I said, "What does 'BRMC' mean?"
and he said, "Black Rebels Motorcycle Club."
I asked, "What are you rebelling against, Johnny?"
And he said, "What have you got?" "What have you got?” haha

등에 쓰여 있는 B.R.M.C.가 무슨 뜻이죠? 무슨 약자예요?
검은 반항아들의 오토바이 클럽
귀엽네요
쟈니, 무엇에 반항하는 건가요?
당신이 가진게 뭔데?
캐시, 이 사람들 정말 멋지지 않니?
내가 한 말 들었어?
B.R.M.C.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검은 반항아들의 오토바이 클럽이라는거야
그래서 쟈니에게 무엇에 반항하냐고 물어봤지
당신이 가진 게 뭐냐고 하는거 있지. 내가 가진 거에 반항 하나 봐!
-The wild one (1953)




>> May 26. 2019

말테의 수기 中 p12.

"이제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겠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변해 가고 있다는 걸 무엇 때문에 알려야 하는가? 내가 변하면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와는 다른 무엇이다. 그러니 이제 내게는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야 없는 것이지."



>> Mar 15. 2019

릴케, 말테의 수기 中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 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양념을 모아야 한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릴케는 말테의 입을 빌려 10대 후반 즈음에 쓴 작품을 회고한다. 전통적인 규범과 관습에 의존한 시, 감흥이 향하는 대로 장황한 어구를 늘어놓은 시는 무의미하다. 시는 잘 단련한 언어의 조형물이다. 뛰어난 장인의 기술처럼 완벽하고 자연과 예술 작품처럼 애매함 없이 자립해 있어야 한다.



>> Mar 1. 2019

일기

너 아직도 그런 거 하냐?라는 말의 의중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나에게 무언가 새로운 걸 기대했으나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본인은 이제 가지 않는/갈 수 없는 길을 계속 가는 친구에게 하는 질투 섞인 말일 수도 있겠다고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는 건 빗겨맞은 화살일지라도 화살 촉에 오래 남을 독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독을 담아 던진 말은 무방비 상태에선 손쓸 도리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 부위가 더 깊숙한 곳으로 퍼진다. 결국엔 그 말과 그 말을 전달한 사람을 회상하게 하는 상처 부위 전체를 도려내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관계의 절단이 일상화되는 순간이다.

작업을 보여 줬을 때 의미 있는 회답을 받기란 좀처럼 어렵다. 더구나 작업의 실물이 없는 상황에서 나누는 대화는 핵심을 짚지 못하고 주변을 부유하다 먼 곳으로 흘러간다. 이미 대화가 갈라진 걸 알아채지 못하고 이쪽으로 흘러가는 게 맞니 저쪽으로 흘러가는 게 맞니 하는 동상이몽 논쟁이 시간을 소모한다. 술을 마시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부각된다.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간 대화는 각자에게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곤 종국에 '역시 우린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이상적인 사이 야'라며 만족하고 헤어진다.




>> Feb 19. 2019

‘불안’- 알랭 드 보통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헌신 때문에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지 몰라도,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식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었다.

돈과 실용적인 직업이 영혼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또는 스탕달의 말을 빌리자면 “부드러운 감각”을 향유하는 능력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보헤미아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소로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있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 Jan 24. 2019

“눈으로 뿐 아니라 코와 귀와 모든 감각으로 느껴지는 체험, 작품과 관람자의 직접적인 교감, 말이나 글로 쓰는 것이 아닌 온 몸으로 느끼는 감흥”이 심미적 경험.”이라고 설명한 권미원 교수는 현대에는 그런 교감을 주는 작품이 점점 없어져간다고 안타까워했다.

“현대인의 삶 자체에 그런 경험이 없어지거나 제한돼 있기 때문일 거예요. 학생들을 보아도 다들 스마트하고 정보는 무척 많은데 뭘 진지하게 보거나 묘사하거나, 자기 경험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일에 서툴러요. 그러나 저는 그런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자신의 심미적 경험을 자기가 믿지 못하고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겁니다”

“교환의 비율(EXCHANGE RATE: On the Economy of Obligation and Reciprocity in Contemporary Art)” 현대미술의 중요한 방식으로 대두한 참여미술에서 미술가, 관객, 그리고 참여자의 새로운 역할의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이며, 나아가 미술 실천에서 ‘상호적인 관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



>> Jul 30. 2017

Coding Community 코딩 커뮤니티
Sim Boseon 심보선
Poet 시인

What type of community does art represent? How does art represent a community? Which voices are used to represent a community through art? The quintessential answer to these questions can be found in Aristotle’s Poetics, which is a “representative regime,” in the theory of Jacques Ranciére. According to Aristotle, the primary function of art is to unite the state, audience, and world in one single homogeneous continuum.

Aristotle argues that the audience comes to feel immersed in this homogeneous continuum through. In such case, the narrator must be a hero, representing “good”. In other words, the principal agent of the narration cannot be a woman, a slave, or any other representative of the “bad.” Aristotle’s “representative regime” arranges agents of narration into the virtual order of central and peripheral, high and low, thus assigning them different importance. Accordingly, the audience is fascinated by the lives of some people or characters, while being averse to the lives of others. In this way, the audience confirms the desirable forms and members of a community.

Words are one of the most common elements of representation. Words are tools, materials, and symbols. Through words, we can build models of a community. Words are a medium of communication, and simultaneously a code that guides our perception. By creating and interpreting this code, we come to understand the relational patterns between ourselves and others. Thus, we cannot help but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words.

Plato strictly distinguished between the words of a slave and the words of a master, asserting that only a master’s words were worthy of participating in a political community. Extending and elaborating on his teacher’s distinction, Aristotle distinguished speech from voice and sound, since speech is unique to humans, while many animals are capable of voice and sound. Thus, it is only through speech that we can discern what is good and just. Only speech can provide the words that may form the foundation of communities, including our families and the state. The representation of community emerges from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order of words and the social order, as well as from the principle of synthesis between these two distinguishing systems.

How can we challenge this synthesis, to imagine and realize different communities? In the history of representing communities, do excluded people have a stage or platform? Where are their words located? There is a radical and yet simple answer to all these questions. The voices of excluded people may be thought of as a non-linguistic language expressed through mad carnivals, secret meetings in the dead of night, and the actions of a revolt. These voices build their own independent stages outside, underground, or on the edges of the existing stages. In order to discover the origin and genealogy of these voices, we have developed and utilized the concepts and methodologies of folk culture, national history, and oral history.

But the order of representation is not eternally fixed and unchangeable. There is a stage within a stage, and they collide with one another. The distinction between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between the high and low, is flexible and unstable. For example, Homer’s Iliad cannot be reduced to the tales of its heroes. Homer threatens this narrational consistency by introducing the memories and regrets of the dying unknown soldiers in the descriptions of the Trojan War. Mikhail Bakhtin has argues that elements of carnivals (i.e., candid, cynical, explicit, and bizarre language that freely combines praises and curses) began to spread through medieval art and literature, which clearly challenged the synthesis between the order of words and the order of community. Bakhtin further claimed that the existence of carnivals served to liberate human actions, motions, and words from the power of class hierarchy.



But is such mixing and overthrowing of language and non-language truly subversive? Given that the excluded people were evidently invited to occupy a space within the narration, is their mere participation sufficient?

The dominant language discredits and destroys the spontaneous political discourse of the dominated. It leaves them only silence or a borrowed language, whose logic [is] unable to express anything true, real or “felt,” [and thus] dispossesses the speaker of the very experience it is supposed to express. It forces recourse to spokesmen, who are themselves condemned to use the dominant language...

Pierre Boudieu accepts Plato and Aristotle’s assertions about language and society, but in a somewhat seditious way. Bourdieu supports the resistance of excluded groups who have been forced to confront a community’s order, but he also acknowledges the strong barriers that oppose such resistance, as well as the gravitational power that constricts them through the order of words. Thus, they are doubly oppressed by the rigid order and code of society. According to Bourdieu, the indomitable code of social reality can only be overcome through the mediation of code-makers and code-analysts, namely, experts with advanced knowledge and intelligence.

It is at this point that artists and intellectuals can get involved. Such representatives support the resistance of ruled and excluded people by translating and deciphering their non-linguistic code into a refined, universal language. However, according to Bourdieu, the code that these representatives use still originates from their own world, rather than that of the excluded. Thus, when the conditions of the excluded are represented by intellectual intermediaries, they still have to go through silence and alienation. In such case, the excluded are no more than uncomfortable and awkward guests invited into the ruling order.
+Nov 30, 2020 / p.251 The Location of Culture_ Homi K. Bhabha
... 만일 차별의 효과가 시선을 권위에 쏠리게 하여 권위를 유지시킨다면, 권위가 분열되며 증식되는 차이는 그 시선을 피하면서 감시에서 달아난다. 그같은 피차별자의 저항은 본능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차별의 효과 역시 권위의 직접성과 분절성의 (재)인식을 강요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일종의 방해효과인데, 그것은 식민주의적 담론이 차별받는 주체들을 주시하는 순간 그 담론을 고역스럽게 하는 머뭇거림의 반복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중국인의 ‘불가사이함’, 인도식 의례의 ‘언어도단’의 절차, 호텐토트의 ‘형언할 수 없는’ 관습 등이다. 이 예들은 권위의 목소리가 언어를 찾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식민지 담론이 그 대상의 혼성성에 직면함으로써, 권력의 ‘현존’이 인식의 규칙이 단정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This pessimism becomes distinct in the circumstances surrounding a monument. A monument is erected in the middle of a square. There is a ceremony to unveil the monument. Through the spectacular form of the monument, the message of a community hero spreads among the crowd. Through forms and words, the crowd is elated, seeing the future and fate of the community is at-hand. But ultimately, isn’t this merely a virtual sensation? Don’t people intuitively understand that their bodies don’t correspond to the monument? Don’t they know that the monument will eventually fall and be replaced by another equally irrelevant landmark?

To overcome such dissonance, some artists have attempted to create “anti-monumental” monuments. Such projects seek to evince a visual virtuality that we experience through our bodies, which simultaneously laments dead heroes and the conditions of the living. One of the most famous examples is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1982) by Maya Lin, an installation that has stirred public controversy, as I discussed in an earlier article:

Unlike conventional monuments, Maya Lin’s Vietnam Veterans Memorial does not soar upward, but sinks below the ground. This structure forces visitors to walk alongside the black marble wall, which gradually becomes deeper and wider. The wall is inscribed with the names of 58,195 missing or deceased veterans of the Vietnam War. While most monuments are embossed, Lin’s Vietnam Veterans Memorial is incised, in all of its aspects... The ends of the V-shaped marble wall point to the Washington Monument and Lincoln Memorial (respectively), implying some commentary about American history and the Vietnam War.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is situated as a black bridge/abyss, both connecting and dividing two magnificent architectural structures honoring the two most famous heroes of American history. While the Washington Monument and the Lincoln Memorial orally enunciate the history and values of the U.S.,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reveals the darker side of those principles, in the form of an “anti-monumental monument.” In addition, while walking along the wall reading the names of those who died or were lost in the war, visitors can see their own faces reflected in the black marble. As such, the names of the dead overlap with the faces of the living.

Maya Lin’s “anti-monumental monument” awakens us to the importance of a work’s form and arrangement. Many artworks, including those with a radical political message, still function through the conventions of art appreciation, such as contemplation and silent reading. Artworks that attempt to convey the words and forms of the excluded in such way are inevitably trapped within the standard produc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dominant code. Thus, the issue here is “coding,” which relates to the process of choosing the materials, and deciding how to treat and organize them. “Coding” os not related to the collective effects that the work produces. On this topic, Ranciére wrote:

What it produces is not rhetorical persuasion about what must be done. Nor is it the framing of a collective body. It is a multiplication of connections and disconnections that reframe the relation between bodies, the world they live in and the way in which they are “equipped” to adapt to it. It is a multiplicity of folds and gaps in the fabric of common experience that change the cartography of the perceptible, the thinkable and the feasible. As such, it allows for new modes of political construction of common objects and new possibilities of collective enunciation.

According to Ranciére, the restructuring of community or the common is possible through the coding method he called the “aesthetic regime.” This new coding system, which opposes the representative regime, nullifies the existing distinction between central and peripheral, high and low, and then assigns them different significance and weight. As such, the ordinary becomes the extraordinary, daily life becomes the stage for struggle and adventure, and common products found in the streets become the source of poetic inspiration. The hierarchy of language and non-language collapses and is reorganized. After all, it is through literature and art that anyone can say anything about anything. Everyone is qualified by having been disqualified. This is how a new democracy and community are constituted.

From this perspective, we can evaluate attempts to utilize artistic materials to achieve the maximum degree of freedom and equality, and to restructure the common. An excellent example is media art. By using technology to maximize audience participation and interactivity, media art seeks to experiment with and realize democracy through perception and representation that transcends the political system.

But the mere presence of technology does not guarantee democracy. Katie Mondloch traces the origins of media art to Le Corbusier’s Poème électronique (composed by Edgard Varèse) presented in the Pavillon Philips at Expo ’58 (Brussels World’s Fair). According to Mondloch, the attitude of Poème électronique was far from democratic; in fact, it was the complete opposite. The work was entirely planned and performed by the dictatorial maestro called Le Corvusier, as an attempt to deliver the outcry of a restored community, the passion of drama, and the sense of trust between collective souls. The goal of Poème électronique was to stir a communal passion in the audience through a vivid sensational experience. Like Wagner’s “Gesamtkunstwerk” (total work of art), Poème électronique also positions itself in Aristotle’s representative regime. Through a spectacular, authoritative, and monumental appearance, it attempted to educate the audience about community.




Another relevant development of media art is “locative media,” which seems to propose the possibility of an alternative community. Locative media enables users to directly compose their own narration using advanced technology, such as mobile and GPS devices. In this way, locative media enables new experiments with maps, perceptions, relations, and networks related to space. At present, however, locative media has been co-opted for use in corporate marketing strategies. In fact, many corporations and governments have developed an affinity for locative media through various research projects on urban culture and the interactions of urban residents. For example, on its website, the locative media group Blast Theory boasts that they have provided innovative marketing strategies to corporate clients, and carried out various commercial projects focused on interactive experiences for television, clothing, and telecommunication companies.

Locative media reveals an alternative community in opposition to the elitist and authoritarian society, a microcosm where individuals can compose their own words and forms. But as soon as this microcosm assumes the appearance of a democratic alternative to the existing authoritarian community, it becomes a platform for consumerism. At that point, the words and forms provided by locative media are chosen not as tools for acquiring rights and powers for the ordinary, but as resources for circulating immaterial commodities and services.

In sum, media art is located within a spectrum, with the existing political community at one end, and the capitalist consumer community on the other. Traveling back and forth between these poles, media art experiments with its political potential. Media art is capable of restoring lost communities or realizing new communities, but the same can be said of any work of art. Depending on how its materials are chosen and employed, art can provide a site that further alienates excluded people or one that manifests their words and forms. But no matter what type of site art initially seems to provide, before long, it will almost certainly be occupied by yet another silence or alienation.

Every new technology that emerges during the evolution of art is inevitably accompanied by hopes for new democratic possibilities. This cycle has been constantly repeated through time. With the invention of the printing press, scriptures and law books were publishing in vernacular language, resulting in the appearance of new coding principles. Accordingly, a community was redefined and restructured. Indeed, democracy itself might be defined as a new communal coding method that emerges from such process. In due time, however, this new code is corrupted by various symbolic, economic, and political groups that reinstill it with the dogma of the existing market and hierarchy. Groups of experts, patrons, and aficionados form a dominant bloc, enshrouding their own tastes and profits in an aura of universality. The same struggles and dynamics also marked the emergence of media art and digital technology.

History repeats itself, but it also expands. In time, two vectors can be perceived at the same time. Hence, art rushes toward non-art. Through technology, art actively embraces ordinary symbols and narrations, and then utilizes them as tools for non-systematic communication and open confession. The stage of art has expanded beyond the walls of museums and theaters. However, the elements of non-art have now been reclaimed into the discourse of art, being defined as the aesthetics of “post” or “post-post”. Today, artists are inevitably expected to attain some identity outside the field of art. Activists become artist, and artists become activists. A stage is moved outside of art, but then it reenters the stage by adding another stage. At present, there is no single program that can code for a community. Or there may be one program that codes for multiple communities. In the midst of this unprecedented chaos, art is involved in a community, and only through such involvement can art define its own autonomy and responsibility for the community, if only temporarily.



© 2021 Jiwoon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