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v 14. 2020

vertically upside down
의외의 유사성



>> Nov 12. 2020

사적 영역의 공적 영역화

핸드폰에서 인스타그램 앱을 지운지 좀 되었다. 대신 컴퓨터 웹사이트를 통해 굳이 매번 로그인을 하고 피드를 체크한다. 인스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불편함을 통해 일종의 심리적 버퍼를 만든 것인데 작업 루틴과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어 계속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빠르고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인스타 앱은 무언가 내겐 압박으로 다가온다. (흡사 고딩 시절 미대입시할 때 강사 선생님이 뒤에서 내가 그리는 걸 초 단위로 계속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수에게 그렇듯이) 굉장히 유혹적인데, 일상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감상과 감흥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인스타에 올릴 만한 것만 의식하고 뽑아내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정작 중요한- 실재 경험과 내 감각이 만나 기화되는 그 순간에만 얻어지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대외활동 홍보용으로는 적절한 듯싶지만, 나의 취향과 일상을 소모적인 대상으로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자기 착취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아 불편해 지워버렸다. 이와 관련해 한나 아렌트의 글이 생각나서 메모해 둔다.

사적 영역의 공적 영역화 / 아렌트의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근원을 찾아볼 수 있는 사적 영역과 공론 영역의 구분은 지금의 그것과는 다소 개념이 다르고 한국에서의 공론 영역 개념은 한국의 특수성에 의해 변화해왔다. 고대 폴리스에서 사적 영역은 가정을 의미하여 주로 여성과 노예가 담당했고 공론 영역은 정치를 의미하여 폴리스 내의 귀족과 시민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생활에 필수적인 것을 뒷받침하는 가정이 있어야 남성은 폴리스에 참여하고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가정이 없는 남자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처가 없기 때문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이 둘의 영역이 섞여 진정한 의미의 정치의 장은 사라지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 진정한 의미의 공론 영역이 사적 영역으로 흡수-소멸된 듯하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기능을 하는 까닭에 공적인 것은 사라지고 사적인 것이 유일한 공동의 관심사로 남았다. “_ p144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공적인 무대에 있는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에서 오는 강력한 빛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도 많다. 공론 영역에서는 보고 듣기에 적절하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만이 공적인 빛을 견딜 수 있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것들은 자동적으로 사적인 문제가 된다. 사적인 관심이 일반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 오직 사적 영역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안다. 예컨대 사랑은 우정과는 달리 공적으로 드러나는 한, 끝나거나 없어진다. 사랑에 내재하는 무세계성 때문에 사랑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려는 모든 정치적 시도는 우리에게 거짓되고 왜곡된 것으로 비친다.” _ p124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공적 찬사(SNS의 좋아요 버튼으로 자의적 해석함)도 사용하거나 소비할 수 있고, 음식이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듯 오늘날의 지위도 필요를 충족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음식이 배고픔을 충족시킨다면 공적 찬사는 개인의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중략.... 하지만 그것은 그 무용성 때문에 공동세계처럼 견고하고 지속적이기는 어렵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공적 찬사가 사물을 시간의 파괴로부터 구해주는 공적 공간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공적 찬사의 생산과 소비가 매일 훨씬 더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그 무용성으로 인해 가장 무용한 금전적 보상이 오히려 더욱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것이 되었다.” _ p130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잡생각/ 사적 영역이 없고 공적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사람- 정치인과 연예인- 은 추해진다던데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적 영역은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근데 또 그렇다면 이 웹페이지는 충분히 사적인가?



>> Nov 4. 2020

오랜만에 공간 사옥 감. 아라리오로 바뀌고는 처음. 인상 깊은 작품을 봄.

-작은 공간에서 진동으로 울리는 사운드
-몸의 다른 기능을 발견한 느낌
-저것이 견갑골이구나 요가 선생님이 좋아합니다
-SF 공상과학영화에서 나오는 어떠한 생경한 생명체보다도 낯섬. 에일리언보다 더 에일리언(외부자) 같은
-바닥의 재료, 전분 물 같은 고체-액체의 중간, 발 바닥을 딛고 서면 서지고 발가락으로 파고들면 바닥으로 푹 꺼지는 재밌는 물질. 뭘까?
-릭 오웬스가 떠오름
-인간의 신체에서 얼굴이 감정 표현의 주요 기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김수근 건축가 공간은 뭔가 모르게 갑자기 섬뜩한 게 있음. 벽돌 건물인데도. 얼마 전에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다녀와서 그런가. 두 건물의 원형 철제 계단을 오르내릴 때 묵직하면서도 경박하게 탕탕탕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잊히질 않음.

코헤이 나와 Kohei Nawa_ Vessel_2015




>> Nov 2. 2020

"Make America Great Again"

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 내가 공부하던 학교의 석사 과정엔 ‘멘토 위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학생들은 뉴욕 아트씬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예술가들 중 2명을 멘토로 선택하고 학기 중 2주간 인텐시브 하게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뉴욕에 캠퍼스가 있는 학교의 장점을 활용한 독특한 프로그램이었다. 선호하는 특정 예술가의 그룹에 학생들이 몰릴 경우가 있어서 학과에서는 1지망에서 3지망까지 신청을 받았는데, 운이 좋게도 나는 첫 학기부터 내가 1지망으로 원하는 멘토 그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웬만한 현대미술 책에 이미 박제될 만큼 유명한 예술가들이라 경쟁이 꽤 치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수의 학생이 그 예술가 그룹을 원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멘토로 선택한 예술가 중 한 분은 이 학교에 지원한 이유 중 하나였을 만큼 그의 작품을 좋아했고 아티스트로서 꾀나 존경했었는데, 보통 갤러리나 미술관을 함께 둘러보는 다른 예술가들의 멘토 위크와는 달리 그는 매 학기마다 독특한 멘토 위크 플랜을 준비해와서 학생들을 항상 기대하게 하곤 했다. 멘토 위크가 시작되면 그는 주로 자신의 그룹에 속한 학생들과 함께 미니 밴을 타고 뉴욕에서 멀리 떠나 이색적인 문화를 가진 지역을 방문하거나 쉽게 컨택 할 수 없는 기관과 사람들을 만나러 여행을 다니곤 했다. (지금까지도 이때의 여행만큼 프라이빗 한 투어와 방문한 기관으로부터의 환대를 받은 경험이 없는걸 보니, 새삼 유명한 예술가의 네임밸류 파워를 느낀다.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고급 정보와 그것의 활용에 그는 얼마나 다양한 접근 기회를 얻었을까. 작가로서 부러울 따름이다) 학업 때문에 뉴욕 말고는 미국의 다른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적었던 나로서는 이때의 여행이 다양한 미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여느 다른 뉴욕의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한적한 곳에 별장 겸 세컨드 하우스 같은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멘토 위크 동안 이곳도 방문하여 행-아웃, 칠-아웃 하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함께 음식을 준비해서 근사한 저녁 식사도 하고 마당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불 멍을 때리기도 했다. 그는 또한 굉장한 수집광이라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책이 집에 가득했는데 그것들은 아직 어색한 학생들 사이에서 좋은 대화거리가 되어주었다. 집 이곳저곳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적당한 때가 되면 모두 벽난로가 있는 서재에 한둘씩 모였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온갖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고백건대 사실 언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당시엔 대화의 주체로 참여하기보단 거의 리액션과 리스닝을 담당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관찰한 미국인들의 대화 패턴은 신기하게도 시답잖은 스몰 토크로 시작해서 굉장히 딥하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 작품 크리틱을 할 때도 적용된 패턴인데 후에 다른 글에서 자세히 서술해보겠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어 정치 이야기로 이어졌다. 미국 정세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걸 듣던 중, 여러 학생들 사이에서 대화에 지분이 적었던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걸 잊어버린 건지 아니면 그냥 상관없다고 생각한건지 어느 순간 그 멘토 예술가는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며 offensive 한 감정을 느꼈다. 그 공간의 누구도 나와 같이 이상한 느낌을 받진 않은 것 같았다. 항상 나이스하던 그가 속으로는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바보같이 후에 눈치챘지만, 그의 멘토 그룹엔 African-American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최소한 내가 속한 2년 동안에는) 물론 본인 나라의 위대함을 되돌리겠다는 건 국민으로서 당연하게 가질 수 있는 생각이고 이 문구는 일자리 부족과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위대한 미국을 이뤄내겠다는 취지를 가진 역대 미국 대통령 후보자들의 단골 캠페인 문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offensive 한 감정을 분명히 순간 느꼈고 이후에 그 말을 왜 그렇게 느꼈는지 항상 궁금해했다. 그때는 트럼프의 선거운동이 초반이라 그 말의 내용을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 캠페인이 인종차별적 견해, 왜곡된 애국심, 배타적 민족주의 등의 냄새를 은연중에 풍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것은 2016년 이래로 증명되었다!)

재밌게도 요즈음 미국 대선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수감 이슈가 뉴스에서 함께 나온다. 이것이 나의 오래전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켜 글로 남겨보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트럼프의 한국 버전인) 이명박의 5년을 겪었다. 그리고 그는 17년의 형을 선고받고 2020년 11월 2일 오늘 구치소에 다시 수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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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권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질문 좀 하고 싶다. 4년간의 트럼프를 겪으며 미국은 더 위대해졌는지. 전 미국 법무부 장관인 Eric Holder가 인터뷰 중 한 말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Exactly when did you think America was great?"



>> Oct 27. 2020

MMCA 소장품 하이라이트 2020+

Ich habe eine interessante Ausstellung im MMCA gesehen, in der Ich den Fluss der modernen koreanischen Geschichte durch Kunstwerke lesen konnte. Es gab einige zum Nachdenken anregende Punkte.
-Immer werden Frauen und Kinder als Arbeiter dargestellt.
-Männer nur sitzen, plaudern, rauchen, schauen sich etwas an oder sie sind Gegenstand eines Selbstporträts.
-의외로 전시구성 괜찮았음. 집중해서 보면 많은 걸 읽을 수 있는 전시. 압축해서 한국 근현대 주요 한국 미술 흐름을 잘 보여준 듯.
-김기창의 ‘정청’(1934) 작품의 재료-> 실크에 수묵담채 느낌이 오히려 신선했음.
-노동하는 사람들의 손과 발이 다소 크게 그려짐. 여기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ex. 이중섭의 ‘세사람’1943-45
  + Nov 11, 2020  "such and such strong hands have been paralyzed, as if they had been numbered by nightshade: so many strong men's courage broken, so many productive operations hindered; this and the other false direction given to labor, and lying image of prosperity set up, on Dura plains dug into seven-times-heated furnaces." p.187_unto this last_John Ruskin
-전쟁 후의 작품들-> 러프한 재료와 거친 표면이 공통적으로 나타남. 무언가 뜯기고, 망가진 느낌, 색채도 어두움
-작품에서의 인물 표현이 서양의 영향을 받아 동양인 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인처럼 보임. ex. 권진규의 조소 테라코타 ‘지원의 얼굴’ 1967
-1970-80년대 한국의 추상화를 보면서 든 생각-> 추상화는 관람자 스스로를 투영하는 일종의 요즘 셀피 같은 기능을 하는건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추상화를 선호하는건 아닐까. 작품의 중심, 크래딧이 작가에게서 감상자에게 넘어온다고 생각.
-1980년대부터 민중미술 등 노동자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그림에서 포착되는 듯. ex. 황재형의 ‘황지 330’ -> 극사실주의 보다 더 사실적인, 당시를 증언하는 증인과 같은 그림.



>> Oct 27. 2020

"Art is the highest form of hope"
교보문고에서 발견한 책. 예술가의 자기 계발서 같은 건가.
Found this book at the Kyobo bookstore. Is it a sort of self-help book for young artists?




>> Oct 26. 2020

Die Antiquiertheit des Menschen _ Günther Anders
The Outdatedness of Human Beings
인간의 골동품성 _ 귄터 안더스

가끔 핸드폰으로 엄마, 아빠, 마이클에게 무엇을 보여주곤 할 때 즉각적인 반응이 없을 때가 있었다. 알고 보니 핸드폰 속 글씨가 잘 안 보여서 그런 거였다. 멀리 실눈 뜨고 보거나 돋보기 사용하는 모습을 곁에서 목격하고 지켜보다 보니 요즘 들어 시각의 퇴화, 인간의 퇴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 주름, 흰머리 등 늙어감의 징후를 볼 때와는 다른 충격이었는데, 뭐라고 할까 눈과 같은 감각기관은 세상을 직접적으로 인지하고 수용하는 플랫폼인데 그것이 변화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시각의 상실과는 다른 차원인 시각의 퇴화.

+퇴화와 함께 에이징, 숙성, 발효 등과 같이 시간의 축척으로 인한 변화에 관심. 부정적 개념보다는 긍정으로 해석하려 노력 중.

+11/18, 2020
반면 이와 비슷하게 무언가의 변화로 인해 한 쪽에서 낙차가 발생하는 것과 관련하여,
요즘 전자 책에 익숙해져서 종이 책을 볼 때도 줌인하려고 손가락을 책에 가져가는 나를 발견할 때.
골동품성인데 그 대상이 나인지 책인지 아님 나의 인지과정인지 모르겠다.

*이 책 읽을 겸 독일어 더 배웠는데, 친절하게도 온라인에 진중권 님의 강의가 있네. what a waste of time. dumm gelaufen!



>> Aug 28. 2020

Tú eres la música que tengo que cantar

Sé que hace tiempo te buscaba el nombre
Y así despacio sin hacerme daño
Fuiste una luz iluminando a un hombre
Que anduvo a oscuras todos estos años
Qué buscarás en mí que ya no tengas
Y no me hablen de paz ni de cordura
Porque mi paz y toda mi experiencia
Me laceran de muerte tu figura

Por eso yo, quiero llenarte de color tu intimidad
Pintar de risa tu impresión de soledad
Irte cantando por el mar y la ciudad
Tú te pareces tanto a la felicidad
Que en ese ritmo tan difícil de lograr
En los matices que no hay que retocar
En la belleza del arte más natural
Tú eres la música que tengo que cantar

Lo que yo siento quisiera decirlo
Un día de julio en medio de la plaza
Oír tu nombre por los altavoces
Sentirlo rebotar de casa en casa
Y aquí me tienes tarareando un sueño
Cazando estrellas por la madrugada
Pupila alerta, guardando un silencio
Para irme a refugiarme en tu mirada


>> Jul 23. 2020

울리히는 닐 부어맨의 명품 금단 증상뿐만 아니라 명품 화형식 또한 명품 브랜드의 물신적 영향 하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명품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면 명품 화형식의 효과 또한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에 대한 저항 또한 소비의 위력을 역설적으로 재확인, 즉 반증하는 데 그칠 뿐이다. 달리 말하면 닐 부어맨과 같은 이들이 저항적 퍼포먼스를 할 때 그들은 단지 ‘소비에 대한 저항을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소비되지 않으면서 소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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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리를 따를 때 우리는 상품과 상표들로 촘촘하게 조형된 소비사회를 한걸음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저항하는 것마저도 저항의 대상을 닮아 있어 매번 소비 지옥으로 다시 끌려올 따름이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리시올, 2018)에서 이러한 악무한의 상태를 ‘반성적 무기력(reflexive impotence)’으로 정의하고 있다. 상황이 절대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행하는 반성은 끔찍한 무기력으로 되돌아온다. 이는 구체적인 적을 명시하지 않고 무엇이든 은근슬쩍 용인하는 자본주의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울리히는 삶을 연출하는 물신적 효과가 충만한 소비를 무조건 비판적으로만 접근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의 제안은 일견 순진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하나는 상품이라는 ‘물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유일신교가 지배적인 사회의 무의식적인 반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신교가 지배적이었던 고대 그리스나 인도에서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가장 적합한 신을 그때그때 소비하듯이 섬겼다고 한다. 그러니 물신에 기댈 수 있으면 기대라! 다만 그것에 완전히 지배당하지도, 무작정 등을 돌리지도 말라.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 Jul 2. 2020

두더지와 뱀 / 심리정치 _ 한병철

규율사회의 폐쇠적 시스템 속의 동물 = 두더지 = 노동자, 개방을 견디지 못함, 예속된 주체, 서브젝트,
후기 산업시대의 비물질적이며 네트워크화된 생산 형식의 신자유주의적 통제사회의 동물 = 뱀 = 경영자,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열어감, 프로젝트,
두더지 -> 뱀으로의 이행, =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전환
규율체계 - “몸”처럼 조직됨.
신자유주의 - “영혼”과 같은 양상, = 따라서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없이 확산”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위 동기의 촉발”
모티베이션, 프로젝트, 경쟁, 최적화, 자발성 = 신자유주의 체제의 심리정치적 통치술

뱀- 죄, 즉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배 수단으로 사용하는 채무를 상징.


>> Jul 2. 2020

스마트 권력 / 심리정치 _ 한병철

스마트 권력의 특징 = 조용히 작동, 자연스럽게 작용, 친절, 허용의 형태로 구현, 자발적, 호감, 의존적으로 만들기, 긍정적 감정으로 착취, 유혹, 참여, 이야기하라고 강요, 좋아요 버튼, 자발적, 저항 자체가 발생하지 않음, 저절로 이루어짐,

규율 권력의 특징 = 억압, 강제, 금지의 형태로 구현, 온순하게 만들기, 침묵 강요

좋아요-자본주의의 특성을 보여주는 문구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PROTECT ME FROM WHAT I WANT


>> Jul 1. 2020

자유의 위기 / 심리정치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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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착취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 에피소드=막간극을 의미.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삻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지속될 뿐.
그리하여 해방 뒤에 새로운 예속이 옴. 그것이 주체의 운명. 주체, Subjekt는 문자 그대로 예속되어 있는 자.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속된 존재로서의 서브젝트가 아니라 계속해서 스스로를 기획하고 창조해가는 자유로운 프로젝트Projekt라고 믿고 있음. 서브젝트에서 프로젝트로의 이행은 자유의 감정을 동반. 그런데 이러한 프로젝트 자체가 강제의 형상, 심지어 더 효과적인 예속화의 형식임이 밝혀짐. 외적 강제나 타인의 억압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프로젝트로서의 자아는 성과와 최적화의 강요라는 형식으로 작동하는 내적 강제와 자기 강제에 예속됨.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음.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마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음.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 따라서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음. 그리하여 우리는 역설적 상황에 빠짐.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 자유롭다는 것은 강제가 없음을 의미함. 그런데 이처럼 강제의 반대여야 할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고 있는 것.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과 같은 심리적 질병은 자유가 직면한 깊은 위기의 표현임. 즉 그것은 오늘날 자유가 도처에서 강제로 역전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병리학적 표징.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음.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음. 그에게 노동을 강요하는 주인은 없음. 그는 벌거벗은 생명을 절대화하고 그러기에 노동함. 벌거벗은 생명과 노동은 동전의 양면. 건강은 벌거벗은 생명의 이상임.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노예는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속에 등장하는 주인의 주권, 즉 노동하지 않고 오직 향유만 하는 주인의 자유를 알지 못함. 주인의 주권은 그가 벌거벗은 생명을 넘어서고 심지어 이를 위해 죽음마저 감수한다는 데서 나옴. 이러한 과잉, 즉 과도한 삶과 향유의 양식은 벌거벗은 생명을 염려하며 노동하는 노예에게는 낯선 것. 헤겔의 견해와는 달리 노동은 노예를 자유롭게 하지 못함. 그는 여전히 노동의 노예로 남음. 헤겔의 노예는 주인에게도 노동을 강제함.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동의 전체주의를 초래함.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음. 경영자 사이에서는 목적 없는 우정도 생겨날 수 없음.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들 곁에 있음을 의미함. 인도게르만어에서 자유Freiheit 와 친구Freund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함.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새롭게 창안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직면해 있음. 자유를 강제로 전복시키는 숙명적인 자유의 변증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말임.

신자유주의는 자유 자체를 착취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 여기서는 기분Emotion, 놀이, 커뮤니케이션 등 자유의 실천과 표현 형식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착취의 대상이 됨. 사람은 그의 의지에 반하여 착취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함. 타자의 착취는 그다지 많은 성과를 올리지 못함. 자유의 착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음.

흥미롭게도 마르크스 역시 자유를 타자와의 좋은 관계라는 면에서 정의함.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질을 모든 방향으로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함.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짐.” 따라서 자유롭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함. 자유는 성공적인 공동체와 동의어.

개인적 자유는 마르크스에게 자본의 간계, 자본의 음모로 나타남. 개인적 자유의 이념 위에 세워진 “자유 경쟁”은 “자본의 자기 관계, 즉 자본이 다른 자본과 맺는 관계이며, 자본이 자본으로서 취하는 실제적 태도”일 뿐. 자본은 자유 경쟁을 통해 자기 자신, 즉 또 다른 자본과 관계함으로써 자신의 증식을 추진함. 자본은 개인적 자유를 수단으로 또 다른 자기 자신과 교접함.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사이에 자본은 스스로 증식해 감. 개인적 자유는 스스로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노예 상태와 다름없음. 그러니까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임.”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 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함. 자본은 끊임없이 “살아 있는 새끼들”을 침. 오늘날 과도한 형태에 이른 개인의 자유는 결국 자본 자체의 과잉을 의미할 따름.



>> Jun 30. 2020

이론의 종말 / 에로스의 종말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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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즉 당신에 대한 사랑과도, 그리고 다른 면에서 나의 사유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것이 무언인지는 말하기 어렵소.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르는데,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신인 에로스의 날갯짓은 내가 사유에서 중대한 일보를 내디디며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나를 건드린다오. 오랫동안 예감했던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으로 옮겨져야 할 때, 그럼에도 말해진 것이 아직도 오랫동안 외로이 남겨져야 할 때, 나는 어쩌면 에로스의 날갯짓을 다른 때보다 더 강렬하고 오싹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소. 그것에 순수하게 부응하면서도 우리의 것을 보존하고, 에로스의 비행을 쫒으면서도 다시 잘 귀환하고, 두 가지를 같은 정도로 본질적이고 합당하게 수행하는 것, 나는 그렇게 하는 데 너무 쉽게 실패하곤 하오. 그러면 나는 단순히 감각적인 것 속으로 미끄러져 버리거나 단순한 노동을 통해 정복할 수 없는 것을 정복하려고 시도하게 된다오.”
-하이데거가 아내에게 보낸 한 편지 중.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 계산하는 사고 활동에는 아토피아의 부정성이 없음. 계산하는 사고는 긍정적인 것에 대한 노동임. 어떤 부정성도 그 것을 불안에 빠뜨리지 못함. 사유가 에로스에서 동력을 얻어 “전인미답의 지대”로, 예측할 수 없는 영역으로 과감히 나아가지 못할 때 “단순한 노동”으로 격하된다고 말하고 있음. 사유는 특히 무언의 아토포스적 타자를 언어의 영역으로 넘겨오려고 시도하는 순간에 에로스의 날갯짓과의 접촉을 “더 강하게” “더 오싹하게” 느낌.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적 사고는 아토포스적 타자의 저항을 전혀 알지 못함. 에로스 없는 사고는 단순히 반복하고 덧붙여갈 따름. 또한 에로스 없는 사랑, 에로스의 정신적 동력을 얻지 못하는 사랑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 관능”으로 전락. 관능과 노동은 동일한 질서에 속함. 여기에는 정신과 욕망이 빠져 있음.

크리스 앤더슨-> 이론의 종말, 데이터의 풍요 속에 더이상 모델, 이론이 필요하지 않음. 데이터를 순석하고 귀속 및 종속 관계를 바탕으로 거기에서 패턴을 찾아냄.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줌.

그러나 앤더슨의 테제의 근저에는 허약하고 단순화된 이론 개념이 깔려 있음.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가설이나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님.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같이 강한 이론들은 데이터의 분석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님. 이러한 이론들은 강한 의미의 사유를 바탕으로 함. 이론은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완전히 다른 빛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근본적 결단임. 이론은 무엇이 여기에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 무엇이 존재하고 혹은 존재해야 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원천적, 근원적 결단인 것.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서사이며, “전인미답의 지대”를 헤치며 열어가는 구별의 숲길임.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사유란 존재하지 않음. 데이터가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산일 뿐. 사유에는 계산 불가능함이라는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사유는 “데이터”, 즉 주어져 있는 것보다도 더 이전의 차원에 속함. 사유는 사전에 주어져 있음. 사유의 바탕을 이루는 이론은 사전 선물임. 이론은 주어져 있는 것의 긍정성을 초월하며 이를 돌연 새로운 빛 속에서 나타나게 함. 그것은 어떤 낭만주의도 아니며, 사유가 시작된 이래 변함없이 관철되어온 사유의 논리임. 오늘날 학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에 휩쓸려, 이론과 사유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있음. 정보는 그 자체 긍정적임.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함. 그러한 과학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고, 해석학적이기보다 폭로적임. 여기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적 긴장이 없음. 그리하여 실증과학은 단순한 정보들로 해체됨. 정보와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오늘날 오히려 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함. 이론은 사물이 서로 뒤섞이고 통제할 수 없이 증식하는 것을 막아주며, 이로써 엔트로피의 감소에 기여함. 이론은 세계를 설명 erklären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klären 함. 우리는 이론이 제의나 예식과 공통의 기원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음. 이들은 모두 세계에 형식을 부여함. 즉 사물들의 흐름을 일정한 형태로 빚어내고, 이들이 범람하지 않도록 경계를 만들어 줌. 오늘날 정보의 더미는 형식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함.

정보의 더미는 세계의 엔트로피, 혹은 소음 수위를 엄청나게 높임. 사유는 고요함을 필요로 함. 그것은 고요함 속으로의 탐험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이론의 위기는 문학과 예술의 위기와 많은 공통점을 지님.
미셀 뷔토르Michel Butor (프랑스 누보로망의 대표자) -> 정신의 위기를 확인. 그것은 문학의 위기로도 나타남.
“경제만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문학의 위기도 겪고 있습니다. 유럽 문학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유럽에서 경험하는 것은 정신의 위기입니다.” 무엇에서 정신의 위기가 드러나느냐는 질문에 뷔토르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는 정보의 더미,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소음으로 표출된다. 투명사회, 정보사회는 소음 수위가 매우 높은 사회이다. 하지만 부정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오직 동일자뿐임. 정신Geist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실증과학은 어떤 인식Erkenntnis도, 어떤 진리도 산출하지 못함. 정보는 그저 알아두기Kenntnis의 대상일 뿐임. 하지만 알아두기는 인식이 아님. 알아두기는 긍정적이며,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함. 긍정성으로서의 정보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선포하지 못함. 정보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함. 반면 인식은 부정성임. 인식의 본질은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하는 데 있음. 인식은 기존의 것 전체를 뒤흔들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함. 과다한 알아두기에서는 아무런 인식도 산출되지 않음. 정보사회는 체험사회임.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함.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됨.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 따라서 체험은 완전히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지 못함.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 않음. 사랑이 긍정적 체험의 도식으로 전락할 때, 남는 것은 성애뿐. 성애 역시 가산과 축적의 원리를 따름.

플라톤의 ‘대화편’ -> 소크라테스는 유혹자, 연인으로 등장. 그 유일무이한 개성으로 인해 아토포스라고 불린다. 그가 펼치는 담론(로고스)은 그 자체가 에로틱한 유혹이다. 그래서 그는 사튀로스인 마르시아스와 비교된다. 사튀로스와 실레노스 들은 디오뉘소스를 수행하는 무리에 속함.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피리 부는 마르시아스보다 더 경이롭다. 그는 그저 말만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도취시키기 때문.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으면 누구나 열광에 빠짐. 알키비아데스(아테네의 정치가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을 때면 코뤼반트(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땅의 여신 키벨레의 시종)들의 난무에 사로잡힌 이들보다 심장이 더 강하게 뛰었다고 함. 그는 소크라테스의 지혜로운 말에 마치 뱀에 물린 것처럼 상처를 입음. 소크라테스의 말은 눈에서 눈물이 터져나오게 함. 그 자체로 놀라운 사실, 즉 철학과 이론의 역사가 막 시작될 무렵 로고스와 에로스가 이토록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함. 에로스의 힘을 동반하지 못하는 로고스는 무기력함. 알키비아데스는 페리클레스나 다른 명연설가들이 오더라도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을 때와 같은 격한 감동이나 불안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함. 그들의 말에는 에로틱한 유혹의 힘이 들어 있지 않은 것.

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거쳐가게 함.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니는 마력은 아토피아의 부정성에서 나옴. 하지만 그것은 아포리아(해결 불능의 난제)로 귀착되지 않음. 에로스는 포로스의 아들답게 사유에게 길을 일러줌. 철학은 에로스를 로고스로 변역한 것. 사유에 근본적인 전진을 이루어 전인미답의 지대로 나아가는 순간 에로스의 날갯짓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을 느낀다고 말하는 하이데거는 바로 플라톤의 에로스 이론을 계승.

플라톤-> 에로스를 철학자(필로소포스), 즉 지혜의 친구하고 부름.
철학자 = 친구, 사랑받고 사랑하는 연인, 하지만 이 연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개인도 아니고, 어떤 경험적 사태도 아님. 그것은 “사유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내적 현존,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하나의 생동하는 범주, 초월적인 경험”임. 오직 친구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음. 에로스 없는 사유는 모든 생명력과 불안정성을 상실한 채, 반복적이고 반작용적인 것으로 전락함.

*들뢰즈와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 에로스를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조건으로 끌어 올림. “친구가 사유를 실행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이때 ‘친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는 연인이란? 차라리 연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친구 자신이 그동안 순수한 사유에서 배제되어 있다고 여겨져온 타자와의 생동하는 관계를 사유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까?



>> Jun 30. 2020

에로스의 정치 / 에로스의 종말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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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에 관한 플라톤의 학설->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 생성”하도록 영혼에 자극과 동력을 가함. 에로스에서 정신적 추진력이 발원함. 에로스에서 동력을 얻은 영혼은 보편적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행위를 산출함. 흔히 생각하듯이 감각과 쾌락에 대해 적대적이기만 한 이론은 아님.
오늘날 성애로 비속화된 사랑은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의 보편적 성격을 잃어버림.

에로스는 영혼을 조종-충동epithymia, 용기thymos, 이성logos을 전반적으로 지배.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함. 오늘날엔 충동이 영혼의 쾌락 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 이에 따라 용기를 동력으로 하는 행동은 드물어짐. 용기- 기존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임.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함.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둠.
+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함.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음. 우리는 결코 충동과 에로스를 혼동해서는 안됨.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함. 아마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 용기도, 에로스도 사라진 오늘날의 정치는 단순한 사무로 전락.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함.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임. 각자 고립된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짐.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음.

물론 사랑의 정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임. 정치는 언제나 적대적인 성격을 지님. 바디우Alain Badiou->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인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 같은 것이 있다고 봄.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사랑은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킴.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함.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habiter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함.” “사건”은 “진리”의 계기로서, 기존 상황 속에, 살아가는 습관 속에, 새로운, 완전히 다른 존재방식을 도입함. 사건은 상황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일으킴. 그것은 타자를 위해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킴.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는 다절의 부정성에 있음. 사건적인 성격을 통해 사랑은 정치 또는 예술과 결합됨. 이들은 모두 사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함. 이러한 초월적 충실성은 에로스의 보편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변신의 부정성, 완전히 다른 것의 부정성을 성애는 알지 못함. 성적 주체는 늘 동일. 그에게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음. 소비 가능한 성적 대상은 타자가 아니기때문.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함. 성애는 동일자를 재생산하는 습관적인 것의 질서에 속해 있음. 그것은 한 개별자의 다른 개별자에 대한 사랑임. 여기에선 “둘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이질적인 것의 부정성을 찾아볼 수 없음.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함.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음.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함.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음. 여기에는 어떤 예의Anstand도, 어떤 거리 Distanz도 없음.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함.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 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임.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함.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함.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음.

사랑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핵심 관심사였음.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사랑의 정의는 예술적, 실존적, 정치적 행동으로서 의미를 지님.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에로스에서 보편적 힘을 봄.
“인간과 우주에 값하는 유일한 예술, 그를 별보다 더 멀리 이끌어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은 에로티즘이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에로스는 언어와 현실의 시적 혁명을 위한 매체다. 에로스는 갱신의 에너지원으로 숭배되며, 정치적 행위도 그러한 에로스에서 양분을 얻어야 함.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음.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남.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 줌.



>> Jun 26. 2020

포르노 / 에로스의 종말 _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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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 털실 뭉치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쥐를 다루듯이 털실 뭉치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는-오래된 종교적 상징이나 경제 영역에 속하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아이와 똑같이- 먹이 사냥의 행태를 사용한다. ....

그것이 아무 성과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을 완벽하게 의식한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사냥 행태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고, 쥐 대신에 털실 뭉치를 대상으로 하는 덕택에 ... 그날카로움이 완화되면서 새로운 사용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아감벤은 모든 목적 속에 강제가 있다고 추측한다. 사물은 그러한 강제에서 해방되어 “목적 없는” 순수한 “수단”으로 속화되어야 한다.

박물관은 전시의 장소로서, 예배를 위한 장소인 사원의 반대 형상이다. 관광 역시 순례와 대립된다. 순례가 장소에 묶여 있다면, 관광은 “비-장소”를 양산한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거주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본 장소에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 역사, 기억, 정체성이 장소의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지나쳐버릴 뿐 머무르지는 않는 관광의 “비-장소”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아감벤은 벌거벗음에 대해서도 신학적 명령 체계의 피안에서, 즉 “은총의 특권과 타락한 자연의 유혹 너머에서” 사유하려고 시도함. 이때 전시는 벌거벗음을 속화할 수 있는 탁월한 가능성으로 간주됨. “모델, 포르노스타, 그 외 모든 프로 전시꾼이 무엇보다도 먼저 습득해야 할 것은 바로 뻔뻔한 무관심이다. 내보이는 것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즉 매체에 절대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 전시된 얼굴은 구체적인 표현성의 피안에 놓여 있는 순수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용도, 즉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형식에 봉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비밀도, 표현도 없이 구경거리로 전시된 벌거벗음은 포르노적 노골성에 가까워진다. 포르노적 얼굴 또한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한 얼굴에는 표현성도, 비밀도 없다. “하나의 형식에서 다음 형식으로 나아감에 따라, 그러니까 유혹에서 사랑으로, 욕망에서 성애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저 단순한 포르노로 전진해감에 따라, 그만큼 더 강력하게 비밀과 수수께끼는 위축된다. 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전시는 모든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이 점에서 비속화는 아감벤이 말하는 속화와 구별되지 않는다.

비속화 과정은 제의의 해체, 신성성의 해체와 함께 진행된다. 오늘날 제의적 공간과 행동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세계는 더 노골적이고 음란해진다. 바타유가 말한 “신성한 에로티즘”은 제의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나타난다. 신성한 에로티즘에는 제의적 축제와 놀이가 포한되어 있다. 그것은 특수한 공간, 격리의 공간을 요구한다. 그저 따뜻함, 친밀함, 안락한 자극을 넘어서지 않는 오늘의 사랑은 신성한 에로티즘이 파괴되었음을 암시한다. 포르노에서 완벽하게 배제되는 에로틱한 유혹 역시 환상의 연출, 가상 형식과의 유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보드라야르는 심지어 유혹이 사랑과 대립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제의는 유혹의 질서에 속한다. 사랑은 제의적 형식의 파괴, 제의적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이러한 형식의 해체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제의적 성격을 상실한 사랑은 결국 포르노에서 완성된다. 속화라는 아감벤의 구상은 제의적 공간을 격리의 강제 형식이라고 의심함으로써,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의 탈제의화, 포르노화 과정을 더욱 부추긴다.



>> Jun 25. 2020

벌거벗은 삶 / 에로스의 종말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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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을 묘사한다. 뒤에 가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정, 독립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초월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로 인해 타자에게 굴종하고 결국 노예가 된다. 그는 죽음의 위험 대신 노예 상태를 선택한다. 그는 벌거벗은 삶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신체적 우위에 있는 쪽이 꼭 투쟁의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오히려 “죽음의 능력”이다. 죽음을 향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데리고 죽음에까지 가는” 대신에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주인인 동시에 노예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이야기한 헤겔도 생각하지 못한 치명적인 통일성이다. 자기 착취의 주체는 타자 착취의 주체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영리를 가정 관리의 과업이라고 여기고, 화폐 자산을 잘 보존하든가 무한히 증식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줄기차게 옹호한다. 이러한 신념의 기반은 부지런히 삶을 돌보려는 노력이지만, 그것은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버림으로써 무한한 가속화 과정에 빠진다. 방향을 상실한 운동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다.

헤겔의 타자에 대한 감수성

헤겔에게 절대자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의미한다. “내용의 면에서 볼 때 사랑 속에는 우리가 절대 정신의 근본 개념으로 제시한 계기들이 담겨 있다. 즉 자신의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 절대적이라는 것은 곧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원하기에 타자에게서 등을 돌리는 정신은 제한된 정신이다. 절대적인 정신은 이와 반대로 타자의 부정성을 인정한다. “정신의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 삶이다. 정신이 생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죽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절대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긍정성”이 아니다. 정신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는다. 정신은 절대적이다. 정신은 극단적인 데까지, 극도의 부정성에 이르기까지 과감하게 들어가 이를 자기 안에 끌어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완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순수한 긍정성만이 지배하는 세계, 긍정성이 과잉으로 치닫는 세계에서 정신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헤겔의 “절대적인 것의 정의” = 결론을 맺는 것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면 정신은 타자의 부정성에 상처 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버릴 것이다. 모든 결론, 모든 끝맺음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헤겔의 노예는 의식이 제한되어 있다. 그의 의식은 절대적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 즉 죽을 줄 모르기 때문.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우울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성과주체 역시 결론을 맺지 못하고, 완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더 많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바스러진다.

마르실리오 피치노: 사랑이란 타자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피치노는 사랑하는 자가 다른 자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만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심지어 “소유”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유는 곧 타자의 선물일 것이다. 타자가 우선한다는 점에서 에로스의 힘은 아레스의 폭력과 구별된다. 권력 관계, 혹은 지배 관계 속에서 나는 타자에 맞서 나 자신을 주장하고 관철하기 위해 타자를 내게 굴복시키려 한다. 반면 에로스의 힘Macht은 무력함Ohn-macht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어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나르시시즘적이고 상상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흘러넘치고, 그것의 경계를 해체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그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죽음의 충동으로 표출된다. 벌거벗은 삶의 끝이 죽음의 전부는 아니다. ‘나’의 상상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도, ‘나’에게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적 질서를 폐기하는 것도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어쩌면 벌거벗은 삶의 끝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갈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죽음의 근본적인 매혹이 작용한다. 에로티즘의 핵심은 언제나 구성된 형태들의 해체다. 다시 말하면, 뚜렷하게 구분된 개별자들의 불연속적 질서를 구성하는 사회적, 규칙적 형태들의 해체.”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반대된다. 자아의 충동과 성과의 충동이 전혀 엊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질서 속에서 에로스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죽음의 부정성을 밀어내버린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 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생동성은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생동성은 벌거벗은 삶의 활력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 생존하는 자는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 산송장과 비슷한 존재다.

*네덜란드인의 배- 바그너의 오페라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 오늘의 피로사회에 대한 비유. “목적지도, 휴식도, 평화도 없이” “화살처럼 날아가는”
성과주체가 누리는 자유는 자기 자신을 영원히 착취해야 하는 저주스러운 운명임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적 생산 역시 목적지가 없다. 그것은 더이상 좋은 삶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동일자의 지옥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종말의 도래를 갈구함.
“심판의 날, 최후의 심판!
언제야 너는 나의 밤 속에서 동터올 것이냐
언제 울릴 것이냐
세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저 파괴적 충격은
언제 죽은 자들이 모두 소생할까?
그러면 나는 무 속에서 소멸하리라!
그대 세계들이여, 운행을 멈추어라!”

젠타 Senta-> 맹목적인 생산과 성과의 사회에는 에로스도 행복도 없다.
“윙윙 빙빙
너 착한 바퀴야
힘차게, 힘차게 돌아라
자아라, 자아, 천 가닥의 실을
착한 바퀴야
윙윙 빙빙!”

가산과 축적 밖에 모르는 자본주의 경제를 초월하는 절대적, 숭고한 결론의 형식 = 사랑고백, 젠타의 사랑을 위한 자결. 충실한 마음은 그 자체로 시간 속에 영원을 들여오는 결론의 형식. 충실함이란 시간 속에 감싸여 있는 영원. 사랑의 본질은 충실함. 사랑의 행복은 시간이 영원을 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



>> Jun 19. 2020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 / 아름다움의 구원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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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에로스을 가진 미 예찬, 아름다움을 미, 존재, 진리와 연관하여 설명. 만족만 충족하는 오늘날의 미의 위기를 비판. 에로스적 미는 구속력이 있는 선물. 미의 구원은 구속력의 구원임.]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 중 미의 단계들: 아름다운 몸을 보는 것 -> 미 자체로까지 올라감. 아름다운 몸을 좋아하는 경향이 오히려 미 자체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의 본질적, 필수적 시작임.

플라톤의 미 이론: 인간은 미에 대해 수동적, 소비적이 아니라, 적극적 산출적인 태도를 취함. 미에 직면하여 영혼은 스스로 미를 산출하도록 자극함. 미를 볼 때 에로스는 영혼 속에서 산출력을 일깨움. 에로스=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tokos en kalo)”

에로스가 낳은 “불멸의 자식들” = 작품(erga) 문학철학적 작품 + 정치적 작품도 포함, 호메로스, 헤시오도스와 같은 시인들 + 솔론, 리쿠르고스와 같은 통치자의 작품도 플라톤은 예찬. 아름다운 법률도 에로스의 작품. 철학자, 시인 + 정치가도 에로틱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 . 아름다운 정치 행위도 철학적 작품과 같이 에로스의 덕택에 가능. 에로스의 인도를 받는 정치는 미의 정치.

에로스는 사유를 축성祝聖해줌.
소크라테스- 디오티마Diotima에 의해 축성을 받고 “에로스의 신비”로 들어감.
에로스의 신비는 인식(episteme)에서도, 담론(logos)에서도 벗어남.
하이데거- 에로틱함을 추구.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른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에로스는 신들 가운데 두번째로 나이가 많은 신이다. 내가 사유 속에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무도 걷지 않은 곳으로 용기 내어 나아갈 때마다 이 신의 날갯짓이 나를 스친다.”
에로스가 없으면 사유는 “단순한 노동”으로 전락함. 에로스와 대립하는 노동은 사유로부터 축성을, 마술을 빼앗음.

하이데거 -> 아름다움을 미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으로 분류함. 그는 플라톤주의자. 미= “존재의 시적 이름” 에로스는 존재와 관계된 것. 존재론 적인 축성이 미에 베풀어짐.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함. 존재자는 모든 있는 것임. 그러나 존재자는 존재 덕분에 의미를 갖게 됨. 존재는 존재자의 발생 근거가 아니라 의미와 이해의 지평임. 이 지평의 조명하에서만 존재자에 대한 이해의 태도가 비로소 가능해짐.

하이데거-> 미를 미적 만족의 바깥에 있는 진리의 현상으로 파악함. “진리는 존재의 진리임. 미는 이 진리 곁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님. 진리가 자신을 작품 속으로 옮길 때 미가 나타남. 이 나타남이 - 작품 속의, 그리고 작품으로서의 이 진리의 존재로서- 바로 미. 그러므로 미는 진리의 일어남에 속함. 미는 단지 만족과 관계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 오로지 만족의 대상인 것도 아님. 존재의 진리로서의 진리는 존재자에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사건이며 생기生氣임. 새로운 진리-> 존재자에게 아주 다른 빛을 비추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꿔놓음. 새로운 진리는 모든 것이 다르게 나타나도록 함. 진리의 생기는 무엇이 실제로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새롭게 정의함. 그것은 다른 있음을 산출함. 작품은 진리의 생기를 수용하고 체현하는 장소임. 에로스는 미에, 진리의 현상에 애정을 갖고 있음. 이런 점에서 에로스는 만족과 다름. 만족이, 좋아요가 지배하는 시대는 에로스가 없는, 미가 없는 시대.

진리의 생기로서의 미는 생산적, 산출적, 창작적. 그것은 볼 것을 준다. 이 선물은 아름답다. 제작된 것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진리의 드러남이 아름답다. 미는 관심 없는 만족까지도 초월함. 미적인 것은 강한 의미에서의 미에 전혀 접근하지 못함. 진리의 드러남으로서 미는 현상 뒤에 숨기 때문에 도드라지지 않음. 플라톤도 미 자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형상을 어느 정도 외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함.

오늘날은 미가 전혀 축성받지 못함. 미는 더 이상 진리의 생기가 아님. 어떤 존재론적 차이도, 어떤 에로스도 미를 소비로부터 보호해주지 않음. 미는 이제 단순한 존재자에, 자신의 자명성 속에 그저 놓여 있는, 현전하는 것에 불과함. 우리는 그것이 직접적 만족의 대상으로서 놓여 있는 것을 그저 발견할 뿐. 미 속에서의 산출은 제작된 것으로서의 미에, 소비와 미적 만족의 대상으로서의 미에 의해 축출됨.

미는 구속력이 있음. 미는 지속성을 만들어냄. 플라톤 왈 “미 자체”는 “영원히 존재하는”(aei on) 것. “존재의 시적 이름”으로서의 미도 그저 만족을 주는 대상이 아님. 그것은 구속력이 있는 것, 기준을 부여해주는 것. 기준을 선물함 그 자체임. 에로스는 구속력이 있는 것을 향한 추구. 바디우는 이 추구를 “충실함”이라고 부를 것. ‘사랑 예찬’에서 그는 이렇게 씀.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연이였던 것으로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지속성을, 완강함을, 의무를, 충실함을 만들 것이다. 여기서 나는 충실함이라는 말을 그 일상적인 맥락에서 떼어내어 나의 철학적 용어로 사용한다. 여기서 충실함이라는 말은 어떤 우연적인 조우로부터 하나의 구성으로 넘어가는 이행을 가리킨다. 너무나 견고하여 거의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구성으로 말이다.”

충실함과 구속성은 서로를 제약함. 구속성은 충실함을 요구함. 충실함은 구속성을 전제로 함. 충실함은 무조건적. 여기에 충실함의 형이상학이, 나아가 초월성이 있음. 일상이 점점 더 미학화됨에 따라 미를 구속성의 경험으로 경험하는 일이 불가능해짐. 미학화는 한순간의 덧없는 만족의 대상들만 산출함. 금융시장에서만 휘발성이 증가하는 것이 아님. 이제는 사회 전체가 휘발성을 지니게 됨. 불편하고 지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 근원적인 우연성에 직면하여 우리는 일상성을 넘어선 구속성을 향한 갈망을 느끼게 됨. 미는 만족의 대상으로, 좋아요의 대상으로, 임의적이고 편안한 것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짐.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미의 위기를 맞고 있음.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임.



>> Jun 18. 2020

회상으로서의 미 / 아름다움의 구원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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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적경험-> 새로운것 x, 재인식, 기억, 회상, 그것의 지속성의 경험, = 향기나는 시간의 결정, 과거의 사소한 지점과 기억의 풍성한 연결망-> 내러티브 형성, ‘미는 느릿느릿한 화살’-재회, 재인식으로서 미는 일어남.]

발터 벤야민은 기억을 인간 실존의 정수로 높이 세움. “내면화된 현존의 모든 힘”이 기억으로부터 생겨남. 기억은 또한 미의 정수임. 아무리 “만개”하더라도 기억이 없다면 미는 “허황”한 것이 되어버림. 직접적인 광휘의현재가 아니라 나중에야 빛을 발하는 기억의 있었음이 미에 본질적임.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서술된 말들은 이를 증언함.
‘그런데 방금 비의예식에 참가했다가 온 사람으로서 거기서 피안의 많은 것을 본 사람이 미를 잘 모방한 신적인 얼굴이나 어떤 몸의 형상을 보게 되면, 우선은 그때 체험한 곤경을 떠올리면서 당혹감에 휩싸이겠지만, 그 다음에는 그것을 향해 똑바로 다가가 그것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것을 신처럼 숭배하게 될 것이네. 왜냐하면 기억이 미의 이념으로 올라가 미가 분별 옆의 성스러운 땅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일세.’
아름다운 형상에 직면하여 우리는 있었던 것을 기억함. 플라톤은 미의 경험이 있었던 것의 반복, 다시 말해 재인식이라고 봄.

기억으로서의 미의 경험은 아주 다른 시간성에 의해 지배되는 소비에서 벗어남. 언제나 소비되는 것은 새로운 것이지 있었던 것이 아님. 재인식은 심지어 소비에 해를 끼칠 것. 소비의 시간성은 ‘있었음’이 아님. 기억과 지속성은 소비와 합치하지 않음. 소비는 분산된 시간을 먹고 삶. 소비는 자신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속성을 파괴함. 정보의 홍수도, 눈에게 신속한 소화를 강요하는, 커팅된 화면들의 급속한 연쇄도 한곳에 머무르는 기억을 허용하지 않음. 디지털 영상들은 그 시각적 자극들을 신속하게 부어내고는 빛이 바램.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에게는 보리수 꽃잎 차에 적신 마들렌의 맛이 제공해준 지속성의 경험이 결정적인 경험임. 그것은 기억의 일어남이었음. “아주 작은 한 방울”의 차가 “기억의 거대한 건조물”로 확장됨. 프루스트는 “순수한 시간의 작은 양”을 체험함. 시간은 향기 나는 시간의 결정으로, “향기로 충만한 병”으로 농축되고, 이 병은 그를 시간의 덧없음으로부터 해방시켜줌. “이전에는 몰랐던 행복감이, 온전히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복감이 나를 관통해 흐름. 그리고 순식간에 삶의 우여곡절들이, 삶의 파국들이 사소한 불운으로 변했고, 삶의 짧음도 우리 감각의 단순한 속임수로 변했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서는 원래 사랑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가 근사한 물질로 채워진다고 느꼈다. 혹은 이 물질이 내 안에 있다기보다는 내가 그 물질 자체였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고, 우연에 지배되고,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꼈다.”

프루스트의 이야기하기는 모든 것이, 심지어 예술조차도 “잠시 연결”될 뿐인 “급한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지속성을 만들어내는 시간의 실천임. 그것은 “사물의 영화적인 진행”에 현재 지점들의 신속한 연쇄로 분산되는 영화의 시간에 맞섬. 행복을 주는 지속성의 경험은 과거와 현재의 융합에서 비롯됨. 현재는 기억에 의해 만져지고, 활성화되고, 나아가 수태됨.
“행복을 주는 그 다양한 인상들을 서로 비교해봄으로써 나는 이제 그 원인을 알게 됨. 그것들의 공통점은 내가 그 인상들을 현재의 순간과 먼 순간에 동시에 체험했다는 것, 그리고 결국 과거가 현재에 간섭하자 즉시 내가 그 두 순간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

사물의 직접적 현존과 현재성은 아름답지 않음. 미에 본질적인 것은 긴 시기를 넘어서서 일어나는, 사물들과 표상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통신임. 프루스트는 삶 자체가 하나의 관계망이라고 생각함. 그리고 “삶이 사건들 사이에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 끈을 짓고” “조직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이 끈을 두 배로 늘여 우리 과거의 아주 사소한 지점과 모든 다른 지점들 사이에 기억의 풍성한 망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연결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라고 믿음. 미는 사물들이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서로 관계를 맺는 곳에서 발생. 미는 이야기함. 미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있는 사건임. 작가가 서로 다른 두 대상을 취하고, 그것들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아름다운 양식의 불가결한 고리 속에 담아내는 순간 비로소 진리가 시작됨. 심지어 작가가 삶이 그렇게 하듯 두 가지 감각에 공통적인 성질을 지시할 때,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과 하나의 은유 속에 결합하고, 그것들을 단어 결합의 말할 수 없이 효과적인 끈으로 연결함으로써 그것들의 정수를 처음으로 드러낼 때 비로소 진리가 시작됨.

사물들을 망으로 연결하는 “사물의 인터넷”에는 내러티브가 없음. 정보 교환으로서의 소통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음. 그저 계산할 뿐. 내러티브가 있는 결합들은 아름다움. 오늘날에는 합산이 내러티브를 몰아냄. 내러티브가 있는 관계들이 정보들의 결합에 밀려남. 정보의 합산으로부터는 아무런 내러티브도 생겨나지 않음. 은유는 내러티브가 있는 관계들임. 은유는 사물과 사건들이 서로 대화하게 함.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 시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임. 작가들의 시적인 시선은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결을 발견해냄. 미는 관계의 사건임. 미에는 특별한 시간성이 내재함. 미는 직접적인 향유를 거부함. 사물의 미는 훨씬 나중에 다른 사물의 조명을 받아 회상으로서 나타나기 때문. 미는 인광을 발하는 역사적인 퇴적물들로 구성됨.

미는 망설이는 자이며 늦둥이다. 미는 순간적인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다. 이런 신중함 덕분에 미는 품위를 지니게 된다. 즉각적인 자극과 흥분은 미로 접근하는 길을 막는다. 사물들은 우회로를 거쳐 사후에야 비로소 그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그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미는 오랫동안, 천천히 걷는다. 즉각적인 접촉 속에서는 미를 만날 수 없다. 오히려 미는 재회로서, 재인식으로서 일어난다. “미의 느릿느릿한 화살. - 우리를 갑자기 열광시키지 않고, 맹렬하게 도취시키는 공격을 하지 않고(이런 공격은 역겨움을 초래하기 쉽다), 천천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이 가장 고상한 종류의 미다.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도 못한 채 가지고 다니다가 언젠가 꿈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그런 아름다움 말이다.



>> Jun 17. 2020

아름다움에 머무르기 / 아름다움의 구원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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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축제와 비교한 예술작품의 시간경험- 과정, 지나감, 관조, 머무름, 도착, 영원 / 오늘날의 예술작품 가치의 전복, 경배의 대상->전시 구경거리]

파우스트의 주문 “머무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
머무르기로 초대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관조적인 머무르기를 방해하는 것은 의지.
그러나 미에 직면할 때 의지는 후퇴함.
미의 관조적인 측면-쇼펜하우어의 예술관
“미에 대해 느끼는 미적 기쁨의 주요한 측면은 그 기쁨의 대부분에 걸쳐 우리가 순수한 관조 상태로 접어들면서 한순간 모든 의지, 다시 말해 모든 소망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자신을 탈피함.” 미는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음. 자아는 미 속으로 침잠함. 미에 직면하여 자아는 자신에서 벗어남.

시간이 흐르도록 하는 것은 의지, 관심, 그리고 코나투스conatus(라틴어의 노력)
미 속으로 관조적으로 침잠할 때 의지는 후퇴하고 자아는 자신을 철회함. 이 침잠이 시간을 고요하게 만들고, 정지된 상태를 만들어냄. 의지와 관심의 부재가 시간을 고요하게 만들고, 정지하게 함. 정적은 미적 직관을 단순한 감각적 지각과 구별시켜줌. 미에 직면함으로써 본다는 것은 도착함. 더 이상 떠밀려가지도, 쓸려가지도 않음. 도착은 미에 본질적.

시간을 극복하는 머무르기에서 “현재의 영원함”은 타자를 향함. “그것은 타자의 현존. 그러므로 그러한 머무르기에서 영원성이 타자 위로 번지는 빛으로 나타남.
스피노자 “사물을 영원성의 측면에서 파악할 때, 정신은 영원하다” -> 예술의 과제는 타자를 구원하는 것.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 “예술은 타자를 그 현전성Vorhandenheit에 고정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자를 구원함. 전적인 타자로서의 미는 시간의 힘을 제거함.
오늘날 미의 위기는 미가 그 현전성으로, 사용가치와 소비가치로 환원되는 데에서 비롯됨,. 소비는 타자를 파괴한다. 예술미는 소비에 대한 저항임.

니체: 최초의 예술=축제의 예술, 예술작품들은 흘러 지나가는 일상적인 시간이 사라지는, 한 문화의 활홀한 순간들이 물질화된 증언들임. “우리가 보다 높은 저 예술, 즉 축제의 예술을 잃어버린다면 예술작품에 담긴 우리의 온갖 기예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과거에는 모든 예술작품들이 드높고 황홀한 순간들에 대한 기억의 기호이자 기념비로서 인류의 드넓은 축제의 거리에 전시됨. 지금은 예술작품이 인류의 거대한 고통을 거리에서 지치고 병든 불쌍한 자들을 꾀어 옆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 욕정을 채워주는 데 사용됨. 그들에게 짤막한 도취와 광기를 제공. 예술작품들은 일상적인 시간이 효력을 상실하는 드높은 시간Hochzeit의, 고양된 시간Hoch-zeit의 기념비들임. 고양된 시간으로서 축제의 시간은 평범한 노동시간이었을 일상의 시간을 정지시킴. 영원성의 광취가 여기에 깃들어 있음. “축제의 거리”가 “고통의 거리”로 대체되면, 드높은 시간은 “짧막한 도취”에 빠져드는 “한순간”으로 추락한다.

페리아에feriae - 종교적, 제의적 행위를 위해 정해진 시간을 의미
파눔Fanum -신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장소를 의미
축제는 세속적인(이를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profan의 말 그대로의 의미는 ‘성스러운 영역 앞에 있음’) 일상의 시간이 멈추는 지점에서 시작됨. 인간은 축성을 받고 축제의 고양된 시간에 참가함. 성스러운 것을 세속적인 것과 갈라놓는 저문턱, 통로, 축성이 사라지면 오로지 일상적이고 흘러 지나가는 시간만이 남게 되며, 이 시간은 노동시간으로 착취됨. 오늘날에는 전면화된 노동시간에 밀려 고양된 시간이 완전히 사라짐. 휴식시간마저 노동시간에 묶여 있음. 휴식시간은 노동시간의 짤막한 중단에 불과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회복한 후에 다시 자신을 온전히 노동 과정에 제공하기 위한 것임. 휴식시간은 노동시간의 타자가 아님. 그래서 시간의 질을 고양시켜주지 않음.

가다머: ‘미의 현재성’, 예술을 축제와 연결. 독일에서 축제를 행하는 것을 축제를 “걷는다 begeht”라고 표현하는 언어적 특수성에 대해 지적. 걷는다는 것은 축제의 특별한 시간성을 보여줌.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걷는 자가 향하는 목표의 표상을 확실하게 제거함.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어디에 도착하기위해 우선 걸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함. 축제를 걸음으로써 축제는 언제나, 줄곧 거기에 있는 것이 됨. 그것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장기적으로도 서로 교체되는 순간들로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축제의 시간성임. 축제에서는 다른 시간이 지배함. 흘러 지나가는 덧없는 순간들의 순차성으로서의 시간이 제거됨. 그것을 향해 걸어가야 할 목표가 없음. 어떤 것을 향해 걸어갈 때, 시간은 흘러 지나감. 축제를 걷는 것은 흘러 지나감을 제거함. 축제에는, 이 성대한 고양된 시간에는 어떤 불멸성이 내재함. 예술과 축제는 유사함. “예술이 제공하는 시간경험의 본질은 우리가 머무르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데 있음. 아마도 이것이 영원이라고 불리는 것의, 우리에게 허용된 한에서의 모습일 것.

예술작품은 전시되는 순간 그 경배가치를 잃어버림. 전시가치는 경배가치를 몰아냄. 예술작품은 축제의 거리에 세워지는 대신 미술관에 전시됨. 전시는 축제가 아니라 구경거리임. 미술관은 예술작품의 골고다 언덕임. 여기서 사물들은 보여질 때만, 주목의 대상이 될 때만 가치를 지니게 됨. 반면 경배의 대상들은 흔히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음.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그것들의 경배가치가 오히려 커짐. 경배는 주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 주목의 전면화는 경배적인 것을 파괴함.

오늘날 예술작품은 주로 시장의 거리, 거래소의 거리에서 거래됨. 여기서 예술작품은 경배가치도, 전시가치도 지니지 않음. 다름 아닌 예술작품의 순수한 투기가치가 그것을 자본에 복속시킴. 오늘날에는 투기가치가 최고의 가치로 드러남. 거래소는 오늘날의 경배장소임. 구원은 절대적 수익금에 의해 대체됨.



>> Jun 17. 2020

포르노그래피 연극 / 아름다움의 구원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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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에로틱함 vs 포르노그래피의 개념 구분, 오늘날 사회-> 탈심리, 탈주체, 탈내면화가 가능한 유희공간이 제거되고 친밀함, 자기과시, 자기중심적 포르노그래피적 장소가 되어가고 있음.]

에로틱한 작가= 완곡하고 우회적, 장면의 거리szenische Distanzen, 대상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암시로 만족, 에로틱한 것은 암시적이며, 격정적이지 않음.

에로틱한 것의 시간적 양태 = 지체, 지연, 우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순환함. 폭로될 수 없는 비밀들-- 은폐된, 숨겨진 정보들과는 다름. 이것들은 폭로될 수 있음.

포르노그래피의 시각양태= 즉시, 지시적인 것, 사물을 곧장 가리키는 것, 폭로극, 진리나 투명성으로까지 나아가는 폭로야말로 포르노그래피적임.

포르노그래피적인 연국에는 대화적인 것이 빠져 있음. 슈트라우스 “사적인 정신병적 사업”이라 칭함. 지금은 대화 능력, 타자를 향하는 능력, 경청하는 능력이 모든 차원에서 사라지고 있음. 오늘날의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모든 것을 오로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만 지각함. 타자를 그 타자성 속에서 볼 능력이 없음. 대화란 서로를 발가벗기는 연출이 아님. 고백도 누설도 에로틱하지 않음.

오늘날의 사회는 대화에 강력하게 몰입하지 않음. 무대에서 대화적인 것이 사라지면 격정의 연극이 생겨남. 격정에는 대화적인 구조가 없음. 격정에는 타자의 부정이 각인되어 있음.

감정Gefühl에는 내러티브가 있음. 이와 달리 감흥Emotion은 일시적. 감흥도 격정도 내러티브를 위한 공감을 열어놓지 않음. 격정의 연극은 이야기하지 않음. 그 대신 다량의 격정을 직접적으로 무대 위에 올려놓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연극은 포르노그래피적임. 감정은 시간적으로도 감흥이나 격정과 다름. 감정은 어떤 지속성을, 내러티브를 위한 길이를 갖고 있음. 감흥은 감정보다 훨씬 빨리 휘발됨. 격정은 한 순간에만 제한됨. 감정만이 대화적인 것에, 타자에 다가갈 수 있음. 그래서 공감, 즉 공통감정이라는 게 있는 것임. 이에 반해 공통감흥이나 공통격정이라는 것은 없음. 격정이나 감흥은 모두 개별화되고 독백만 하는 주체의 표현임.

오늘날의 친밀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심리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객관적인 유희형태와 유희공간을 제거해나가고 있음. 친밀성은 유희적인 거리에, 연극적인 것에 대립. 유희에 결정적인 것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객관적인 형식들임. 엄격한 유희 혹은 의례는 영혼의 짐을 덜어줌. 그것은 영혼의 포르노그래피를 위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음. “여기서는 과도한 자기 과시, 광적인 자기중심주의, 흥분 상태가 나타나지 않음. 우아함과 엄격한 유희가 감흥의 독단과 영혼의 나체주의와 정신병적 상태를 배척함. 유희하는 여자는 탈심리화, 탈주체화, 탈내면화되어 무명의 인물이 됨. 무명의 인물(라틴어로 nemo)에게는 폭로할 영혼이 없음. 슈트라우스는 포르노그래피적인 영혼의 나체주의와 정신병적인 것에 맞서 무명주의적인 자기초월성을 요구함. 이 초월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서 타자에게 다가가고, 스스로를 타자에 의해 유혹받도록 함. 에로틱한 연극은 유혹이, 타자를 위한 환상이 가능한 장소임.



>> Jun 16. 2020

미의 정치 / 아름다움의 구원 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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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아름다움을 자유로운 정치행위, 나아가 정의, 선의 개념과 연결. 윤리적 공정성과 미의 공정성을 같은 위치에 놓음. 나르시시즘적인 중심성이 아닌 타인의 타자성을 위해 자신의 주체성을 옆으로 비켜놓는 것을 통해 미적경험을 할 수 있다고 봄.]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
“재치” ingenium = “두뇌의 사치”
재치는 곤궁과 필연성에서 해방된 자유의 공간에서만 가능함.
“자연이 꽃을 가지고 주로 놀이를 하는 듯 보이는 것처럼. 이에 반해 자연은 열매를 가지고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꽃의 아름다움은 모든 경제로부터 자유로운 사치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강제나 목적이 없는, 자유로운 유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노동과 작업에 대립한다. 강제와 욕구가 지배하는 곳에는 유희를 위한 자유공간이 없는데, 유희는 미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는 사치의 현상이다. 다만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인, 필요한 것은 아름답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유로운 남자란 삶의 욕구와 강제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남자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세 자기 삶의 방식은 모두 ‘아름다움’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것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이루어진다.” 아름다운 사물들을 향유하는 데 집중하는 삶과 폴리스에서 아름다운 행위들을 산출하는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연구하면서 영구적인 미의 영역에 머무르는 철학자의 관조적 삶이 여기에 속한다.

정치가의 삶bios politikos을 구성하는 것은 행위다. 이 행위는 필연성과 유용성의 판결에 종속되지 않는다. 노동도 제작도 정치가의 삶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유로운 남자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의 형태, 그 안에서 자유가 표현되는 삶의 형태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과 제작은 오로지 생존에 필요한 것과 유용한 것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것들 자체를 위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유가 없고 외적인 것에 의해 규정되기 떄문에 그것들은 아름답지 않다. 인간의 공동생활에는 사회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이런 사회조직들과 관련된 행위는 고유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다. 필요성도 유용성도 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정치가들은 삶에 필요하고 유용한 것들을 넘어서서 아름다운 행위들을 산출해야한다. 정치적 행위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시작되도록 하는 행위다.

모든 강제와 필요성의 형태들은 행위로부터 미를 앗아간다. 필요성과 유용성에 지배되지 않는 사물과 활동만이 아름답다. 자유로운 남자의 삶의 형태들은 필요한 것과 유용한 것들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그것들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에서 전부 사치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름다움 to kalon을 미적감각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함.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의 윤리학은 미의 윤리학. 정의 또한 아름답기 때문에 추구됨. 플라톤은 정의가 가장 아름다운 것들to klliston 중 하나라고 주장. ‘행복의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칼로카가티아 Kalokagathia, 즉 아름다운 선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도입함. 여기서 선은 미에 종속됨. 이상적인 정치는 미의 정치다.

지금은 미의 정치가 불가능함. 시스템의 강제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 아무런 자유공간이 없음. 미의 정치는 자유의 정치임. 오늘날의 정치는 대안이 없는 상황에 족쇄가 채워진 채 작업하며, 이런 상황은 고유한 정치적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정치는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하는 것. 정치는 대안을, 진정한 선택을 제공해야 함. 그렇지 않을 때 정치는 독재로 추락. 시스템의 하수인이 된 정치가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

페어fair 의 의미는 다차원적. 정의롭다 + 아름답다 라는 뜻도 지님.
파가르fagar 도 아름다움 을 뜻함.
페겐fegen ‘쓸다’ 윤기가 나게 만든다 라는 뜻.
페어의 이중적 의미는 미와 정의가 원래 동일한 표상으로부터 비롯됨을 보여줌.
정의는 아름다운 것으로 지각됨. 특별한 공감각이 정의를 미와 연결시킴.
일레인 스캐리 Elaine Scarry ‘미와 정의로운에 대하여’ 에서 미의 윤리적, 정치적 함의를 서술하면서 윤리적 경험에 미적으로 접근하는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함. 미의 지각, 미의 현존은 “윤리적 공정함fairness으로의 초대”를 내포함. 미의 특정한 속성들이 직관적인 정의감을 날카롭게 만들어 줌.
“지금까지 우리는 아름다운 대상에 속하는 속성들이 정의를 실현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보여주었다.” 정의 이념의 기초이기도 한 대칭은 아름답다. 정의로운 상태는 반드시 대칭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완전한 비대칭은 추의 감정을 유발한다. 불의는 극단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스캐리는 주체를 탈나르시시즘화하고 탈내면화하는 미의 경험에 대해 지적한다. 미 앞에서 주체는 뒤로 물러난다. 주체는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어준다. 이렇게 타자를 위해 자신을 근본적으로 철수시키는 것은 윤리적 행동이다.
시몬 베유Simone Weil - 미는 우리에게 ‘자신이 세상에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것’을 요구함.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의 중심에 서 있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님. 미 앞에서 주체는 측면의lateral 위치를 차지함. 주체는 측면의 형상lateral figure이 됨. 타자를 위해 자신을 후퇴시킴.
미 앞에서 겪게 되는 이런 미적 경험은 윤리적인 것으로 이어짐. 주체의 후퇴는 정의에 본질적. 정의는 공존의 아름다운 상태. 미적 기쁨은 윤리적인 것으로 넘어갈 수 있음. “모든 면에서의 대칭을 요구하는 윤리적 공정성이 미적 공적성에 의해 크게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적 공정성은 모든 참여자들이 스스로 측면에 자리 잡은 채 lateralness 기쁨의 상태를 느끼도록 한다.”

오늘날 미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적. 측면성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중심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리고 소비주의에 빠진다. 소비의 대상에 대해 우리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기한다. 이 소비주의적인 태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파괴한다. 우리는 타자를 위해 옆으로 물러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소비주의적인 태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비동일성을 파괴한다.

섹시함도 공정성과 화합하지 않는다. 섹시함은 어떠한 측면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주체의 중심적 위치를 뒤흔드는 미의 경험이 불가능하다. 미 자체가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나아가 비미학적으로 된다. 미는 단순히 미적인 것을 넘어서서 윤리적인 것, 정치적인 것에 자신을 연결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초월성, 의미심장함, 가치성을 모조리 잃어버린다. 윤리적, 도덕적 판단력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미는 소비의 내재성에 자신을 내맡긴다.



>> Jun 15. 2020

진리로서의 미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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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미학도 두 가지 방식으로 읽기 가능
1. 어떤 바깥도, 어떤 재앙도 모르는 주체의 내면성을 중심에 놓는 것으로
2. 자유와 화해의 차원을 좇아가는 것으로

특히, 헤겔의 사유로부터 주체성의 코르셋을 벗기면 아주 흥미로움.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헤겔 비판은 이 측면을 모두 외면함.

헤겔의 미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개념”. 이는 미를 이상화하고 미에 진리의 광휘를 부여함. 미는 감각적인 것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개념, 혹은”개념과 그 현 실태의 직접적인 통일로서의 이념”이다. 헤겔이 말하는 “개념”은 추상적인 것이 아님.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형식으로서, 이 형식은 현실을 관통하여 붙잡음으로써 현실을 구석구석까지 형성함. 개념은 현실의 부분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적인 전체성으로 통일 시킴. 개념을 통해 형성된 전체성은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파악함. 다시 말해 움켜쥔다. 개념에는 모든 것이 총괄되어 있다. 이 모음, 이 하나로의 조합은 아름답다. 이 조합은 흩어져 있는 수천의 개별성들을 소환하여 하나의 표현으로, 하나의 형상으로 집중 시킬 수 있다. 개념은 조합하고, 매개하고, 화해시킨다. 그러므로 개념은 “무더기와는 전혀 다른 것.” 어떤 “무더기”도 아름답지 않다. 개념은 전체가 “무더기”로 해산되는 것을, 흩어지는 것을 막는다.

헤겔의 전체 관념에 대해 주로 포스트모던에서 제기되는 비판 중 하나는, 그것이 하나의 총체성으로서 개별 부분들을 지배하고, 이 부분들의 다원성과 이실정을 억합한다는 것. 그러나 이런 비판은 전체성 혹은 개념에 대한 헤겔의 관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됨. 헤겔이 말하는 전체성은 지배의 형성물이, 부분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총체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로소 부분들에게 운동과 행동의 공간을 열어주고, 그럼으로써 자유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해준다. “전체는 .... 부분들을 그 자유 속에서 묶어 자기 안에 지니는 하나다.” 전체성은 매개와 화해의 형상이며, 조화로운 통일이자 “모든 부분들의 고요한 균형”이다. 전체성은 화해시키는 것. 개념은 하나의 통일성을 수립하며, 이 통일성 안에서 “특수한 측면들과 대립자들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실제적인 자립성과 견고성을 고수하는 대신, 오직 자유로운 일치로 화홰된 관념적 계기들로만 존재할 뿐.” 화해는 철학 전체의 과제다. “철학은 ... 서로 모순되는 규정들 한 가운데로 들어서서 이 규정들을 그 개념에 따라 인식한다. 다시 말해 이 규정들의 일면성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해소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 규정들을 조화와 통일 속에 놓는데, 이 조화와 통일이 바로 진리다.” 진리는 화해다. 진리는 자유다.

개념은 조화로운 전체성을 산출함. 미는 부분들이 강제 없이 일치하여 하나의 전체성을 만들어낸 것. “아름다운 대상에는 두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수한 측면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개념에 의해 정립된 필연성이 그 하나이며, 이 특수한 측면들이 통일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생겨난 부분들로서 지니는 자유의 외관이 나머지 하나이다.” 하나의 통일성 혹은 전체성 속에서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부분들의 자유는 미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아름다운 대상은 주체 또한 그것에 대해 자유로운 관계를 획득하게 되는 상대다. 주체가 대상에 종속되어 있거나, 대상을 자신의 목적과 관심에 복종시키려고 하는 가운데 그것의 저항에 부딪치는 한, 주체는 대상에 대해 자유롭지 않다. 미적인 것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사이에서 중간과 매개의 위치를 갖는다. “이론적인 것의 경우에 주체는 그 독립성이 전제되어 있는 대상들로 인해 유한하고 자유롭지 않다. 실천적인 것의 경우에 주체는 외부로부터 야기된 충동과 정열의 일면성, 그리고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대상의 저항으로 인해 ... 유한하고 자유롭지 않다.” 이론적인 것의 경우, 주체는 사물의 독립성으로 인해 자유롭지 않다. 실천적인 것의 경우, 주체는 사물을 자신의 충동과 정열에 복종시키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않다. 사물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미적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주체는 자유롭게 된다. 미적 관계는 대상 또한 해방시켜 각자의 특수성을 갖게한다. 자유와 강제 없음은 예술 대상의 특징이다. 미적 관계는 어떤 측면에서도 대상을 압박하지 않으며, 대상에게 어떤 외적인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예술은 자유와 화해의 실천이다. “자신의 대상이 그 자체를 위해 자유롭게 존재하도록 내버려둔다는 점에서 예술적 관심은 욕망의 실천적 관심과 다르다. 욕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상을 파괴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예술적 관찰은 학문적 지성의 이론적 관찰과는 반대 방식으로 구별된다. 예술적 관찰은 대상의 개별적인 실존에 관심을 가지며, 대상을 보편적 생각이나 개념으로 변화시키려고 활동하지 않는다.”

미는 종속성과 강제의 모든 형태가 사라진 대상이다. 순수한 자기목적으로서 미는 일체의 외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롭다. 외적 규정에 구속될 때 대상은 “유용한 실행도구로서 외적 목적에 봉사하게 되고, 이런 목적의 실행에 맞서 자유를 잃고 저항하거나 낯선 목적을 수용하도록 강요받는다.” 아름다운 대상은 “우리한테서 압박이나 강요를 받지” 않는다. “완전히 실현된 개념과 목적”으로서의 미 앞에서 주체는 스스로 그것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린다. 주체의 “욕망”은 뒤로 물러난다. 주체는 대상을 자신을 위해 도구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체는 “대상 앞에서 자신의 목적을 버리고, 대상을 자신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자기목적으로 간주한다.” 그럴 때 미에 대한 주체의 태도는 내버려두기, 나아가 초연함일 것이다. 미가 비로소 관심 없이 머무르기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미의 관찰은 자유주의적인 성질을 띤다. 대상을 자기 안에서 자유롭고 무한한 자로서 내버려두며, 대상을 유한한 욕구와 의도에 유용한 것으로서 소유하려 하거나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미 앞에서는 주체와 객체, 자아와 대상 사이의 분리도 사라진다. 주체는 관조적으로 객체 속으로 침잠하며, 객체와 합일하고 화해한다. “객체와의 관계에서 자아 역시 더 이상 주의와 감각적 직관과 관찰의 추상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자아는 지금까지 자아와 대상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추상적이었던 측면들을 그 구체성 속에서 통일시키고 이 통일이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도록 만듦으로써, 자기 안에서 이 대상 속의 구체성을 얻는다.”

미에 대한 헤겔의 미학은 진리와 자유의 미학이며, 이 미학은 미를 일체의 소비로부터 분리시킨다. “진리”도 “개념”도 소비되지 않는다. 미는 자기목적이다. 미의 광휘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위한 것이다. 미는 어떠한 외적목적에도, 어떠한 외적 사용관계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미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는 자신 안에 머무른다. 헤겔은 어떤 실용품도, 어떤 소비의 대상도, 어떤 상품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에는 미를 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내적 독립성과 자유가 없다. 소비와 미는 서로를 배척한다. 미는 자신을 광고하지 않는다. 미는 향유하라고, 소유하라고 유혹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는 관조적인 머무르기로 초대한다. 미는 욕망도, 관심도 사라지게 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모든 것을 소비와 투기에 종속시키는 자본주의와 화합할 수 없다.

진리는 “무더기”와 반대되는 형상이다. 진리의 무더기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진리는 무더기로,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진리는 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형식인 반면, 무더기는 형식이 없다. 헤겔은 “바로크식 연결”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바로크식 연결이 무더기를, 연관이 상실된, 다시 말해 개념이 없는 병존을 낳기 때문이다. 서로 개념적으로 먼 사물들이 결합되어 있다. 바로크적인 것에는 하나를 향한 지향, 즉 개념이 빠져 있는데, 미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개념이다.

진리는 엔트로피를, 다시 말해 소음의 수위를 낮춘다. 진리가, 개념이 없다면 현실은 소란스러운 무더기가 되고 만다. 미도, 진리도 비범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흔하지 않다. 산출하는 차단이 이것들의 특징이다. 이론도 산출하면서 차단한다. 빅데이터와 같은 데이터 무더기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추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로부터는 인식도 진리도 생겨나지 않는다. 크리스 앤더슨이 역설하는 “이론의 종말”은 이론을 모조리 데이터로 대체시킨다. 이는 진리의 종말, 내러티브의 종말, 정신의 종말을 의미한다. 데이터는 오로지 더하기만 할 줄 안다. 더하기는 내러티브와 대립하는 것이다. 진리에는 어떤 수직성이 내재한다. 이에 반해 데이터와 정보에 내재하는 것은 수평성이다.

미는 자유와 화해를 약속한다. 미 앞에서는 욕망과 강제가 사라진다. 그래서 미는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해준다. 아름다움에 대한 헤겔의 미학은 오늘날의 미적 통치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신자유주의적인 미의 통치는 강제들을 낳는다. 보톡스와 신경성 과식증, 성형수술은 미의 통치의 테러를 반영한다. 여기서 미는 무엇보다도 자극을 만들어내야 하고,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헤겔이 판매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예술조차 이제는 자본의 논리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예술의 자유는 자본의 자유에 자신을 복속시킨다.



>> Jun 14. 2020

미의 이상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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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내가 기존에 가진 휘발성 소비, sns에 대한 거부감의 근본적 이유에 대한 설명]

높은 수준의 교양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인륜적 이념들을 시각화할 수 있는 구상력의 힘이 필요하다.

개성과 심리적인 특성들을 궁극적으로 섹시함에 종속시킨다.

성적인 매력을 근거로 하는 자아는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소비문화는 미를 점점 더 자극과 흥분의 도식에 종속시킨다. 미의 이상은 소비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미의 추가적 가치는 모조리 제거된다. 미는 매끄러워지고, 소비에 종속된다.

섹시함은 도덕미나 개성미에 대립. 도덕과 덕성, 개성은 특별한 시간성을 갖고 있다. 이것들은 지속성, 견고성, 불변성에 기초한다. 개성은 원래 낙인찍힌 기호,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의미한다. 불변성이 개성의 주요한 특성이다. 개성은 심다, ‘새기다, 인각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diarassein에서 유래되었다.

견고성과 지속성은 소비에 적합하지 않다. 소비와 내구성은 서로를 배제한다. 유행의 가변성과 휘발성이 소비를 가속화한다. 그래서 소비문화는 내구성을 감소시킨다. 개성과 소비는 서로 대립한다. 이상적인 소비자는 개성이 없는 인간이다. 이 개성 없음이 무차별한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사람이 개성이 없고 형상이 없을 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 된다. 페이스북은 개성 없음의 시장이다.

카를 슈미트 _ ‘대지의 노모스’, 대지의 견고성을 찬양함. 이 견고성은 분명한 경계 긋기, 구별하기, 울타리 쌓기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 견고성 덕분에 대지 위에 경계석 담장과 요새를 세울 수 있다. “여기에서 인간의 공동생활의 질서와 위치 정하기가 분명해진다. 가족, 씨족, 부족, 신분, 소유와 이웃관계의 종류, 나아가 권력과 지배의 형태가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슈미트가 말하는 “대지의 노모스”는 우리가 디지털 방식을 선택하면서 이미 오래전에 폐기한 패러다임이다. 디지털 질서는 존재의 모든 매개 변수들을 이동시킨다. “소유”와 “이웃관계” “씨족” “부족” “신분”은 모두 땅의 질서에, 대지의 질서에 속한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씨족과 부족과 이웃관계를 해체한다. 공유 경제는 “소유”도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소유를 가입으로 대체한다. 디지털 매체는 어떠한 고정된 선도, 표시도 새겨 넣을 수 없는 개성 없는 바다와 같다. 디지털 바다 위에는 어떠한 요새도, 문턱도, 담장도, 참호도, 경계석도 세울 수 없다. 견고한 개성은 네트워크화하기 힘들다. 그것은 연결능력, 소통능력이 없다. 네트워크와 세계화, 소통의 시대에 견고한 개성은 그저 장애이자 단점일 뿐이다. 디지털 질서는 새로운 이상을 예찬한다. 그 이상이란 바로 개성 없는 인간, 개성 없는 매끄러움이다.



>> Jun 12. 2020

재앙의 미학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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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주, 더 끈질기게 숙고 할수록 항상 새롭고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_ 칸트 ‘실천이성 비판’

칸트의 별이 빛나는 하늘에는 비성이 뜨지 않는다.

재앙 Desaster 의 문자 그대로의 뜻-> 별이 아닌 것 Unstern (라틴어 des-astrum) =비성

칸트는 재앙을 알지 못한다. 자연현상의 위력 앞에서 조차 주체는 바깥의 모든 것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이성의 내면성 속으로 자신을 구출한다. 칸트는 주체의 자기애적인 내면성에서 벗어나는 바깥에 맞서 시종일관 자신을 면역시킨다. 모든 것을 주체의 내면 속에 가두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사유가 내세운 정언명령이다.

헤겔의 예술의 과제 “모든 형상의 가시적인 표면의 모든 지점을 눈으로 변환시키는 것” “그 눈에는 자유로운 영혼이 지닌 무한한 내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상적인 예술작품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이며, 환하고 영혼이 깃든 공간이다. *플라톤 ‘나의 별이여, 그대가 별들을 쳐다보고, 내가 하늘이라면 / 천 개의 눈으로 너를 내려다볼 텐데!’ 이와 반대로 예술은 자신의 모든 조형물을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로 만들어 내면의 영혼과 정신성이 모든 지점에서 보여질 수 있도록 한다. 정신 자체가 만물에 빈틈없이 빛을 비추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다. 천 개의 눈을 가진 헤겔의 하늘은 어떤 비성도, 어떤 바깥도 허용하지 않는 칸트의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유사하다. 헤겔의 “정신”과 칸트의 “이성”은 모두 재앙에 대해, 바깥과 전적인 타자에 대해 맞서는 주문들이다.

재앙은 비성으로서 “별들의 공간”에 침입한다. “근본적인 이질성”이, 바깥이 정신의 내면성을 열어젖힌다. “나는 재앙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재앙은 절대자로부터 방향감각을 빼앗는다. 재앙은 와서 노마드적인 교란을 일으키고는 다시 가지만, 바깥의 눈치채기 힘든, 그러나 강렬한 돌연성을 지니고 있다. 재앙은 헤겔이 말하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변을 감시한다. “재앙이 감시한다고 말할 때, 나는 감시에 주체를 부여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감시가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앙은 “별들의 보호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블랑쇼Maurice Blanchot: 별이 빛나는 하늘과 반대되는 형상으로서의 텅 빈 하늘을 자신의 ‘유년 시절의 근원적 장면’으로 생각했다. -> 전적인 타자의, 내면화할 수 없는 바깥의 아토피아Atopie를 보여줌. *아토피아 Atopie: ‘장소 없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이는 기존의 경험과 관념 속으로 포섭할 수 없는 독특한 것, 희귀한 것, 탁월한 것은 묘사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음을 뜻한다.

자신의 내면성으로부터 떼어내진 아이는 아토피아적인 바깥을 향해 탈경계화되고 비워진다. 재앙이 행복의 공식임이 들어난다.

재앙의 미학은 주체가 자신을 향유하는 만족의 미학에 대립한다. 재앙의 미학은 사건의 미학이다.
사소한 사건도 자아를 비우고, 탈내면화하고, 탈주체화하고, 그럼으로써 행복을 주는 공허의 사건도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런 사건들은 자아를 몰수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재앙은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자기애적인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보들레르 Charles-Pierre Baudelaire 의 ‘악의 꽃’ 중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
아름다움: 별들의 질서를 교란하는 재앙. 나방이 그것에 다가갔다가 타버리는 횃불(flambeau) - 무덤(tombeau) = beau 아름다움
재앙의 치명적인 것의 부정성은 아름다움의 한 계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아름다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끔찍한 시작일 뿐’
끔찍한 것의 부정성은 미의 모체이자 심층이다. 미는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견딜 수 없는 것, 혹은 견딜 수 있게 만든 견딜 수 없는 것. 그것은 우리를 끔찍한 것으로부터 보호해준다. 그러나 끔찍한 것이 미를 통과하여 비친다. 그래서 미는 양면적이다. 미는 형상이 아니라 막이다.

아도르노
아름다움: 끔찍한 것의 부정성이 미에 본질적이라고 봄. 미는 형식 없는 것, 구별되지 않는 것에 기입되는 형식이다. “미적으로 형식을 부여하는 정신은 자신이 작업하던 것으로부터 오로지 자신과 유사한 것, 자신이 파악한 것, 혹은 자신과 같게 만들고자 하는 것만을 통과시킨다. 이 과정은 형식화의 한 과정이다.” 미는 형식을, 다시 말해 차이를 정립함으로써 형식 없는 것, 끔찍한 것,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하나이면서 차이를 지닌 미의 형상은 전체이면서 차이가 없는 압도적인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생성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가상은 끔찍한 것을 완전히 추방하지 못한다.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차단하는 밀폐”, 형식 없는 것을 차단하는 밀폐는 완벽하지 않다. 형식 없는 것은 “포위된 도시의 방벽을 에워싼 적들처럼 바깥에 진을 치고 도시를 굶겨 죽인다.”

미와 끔찍한 것 사이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미는 끔찍한 것을 단순히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미는 끔찍한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식을 부여하는 정신은 죽은 가상으로 굳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적인 형식 없는 것을 필요로한다. 형식을 부여하는 합리성은 형식 없는 것, 끔찍한 것에 바짝 다가가는 미메시스에 의존한다. 정신에는 “정복된 것을 향한” 미메시스적 “동경”이 내재한다. 그리고 이 정복된 것이란 다름 아닌 끔찍한 것이다. 미는 재앙과 우울, 끔찍한 것과 좀비(das Untote, 죽었으나 산 자들 사이로 되돌아와 산 자 행세를 하는 존재), 타자의 습격과 동일자로의 응고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아도르노의 자연미 관념은 바로 이렇게 형식이 동일성으로 응고되는 것에 맞선다. 그것은 비동일적인 것에 대해 증언한다. “자연미는 동일성이 보편적으로 구속하는 가운데 사물에 남아 있는 비동일적인 것의 흔적이다. 이 구속이 지배하는 한, 어떤 비동일적인 것도 긍정적으로 실재할 수 없다. 그래서 자연미는 그것이 약속하는 것, 모든 인간 내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각나고 불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부서짐의 부정성은 미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적대적이고 부서진 일치성”에 대해 말한다. 부서짐의 부정성이 없다면 미는 왜소해져 매끄러움이 된다. 미적 형식의 일치성의 핵심은 “일치하지 않음”에 있다. 미적 형식은 “분기分岐(나뉘어서 갈라짐)”과 “모순”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것의 통일성은 부서져 있다. 그것은 “자신의 타자에 의해” 중단된다. 미의 심장은 부서져 있다.

건강함은 매끄러움의 표현형식이다. 건강함은 역설적으로 어떤 병든 것, 생명이 없는 것을 발산한다. 죽음의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굳어져 죽은 것이 된다. 그리고 매끄럽게 다듬어져 좀비가 된다. 부정성은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힘이다. 미에는 허약함이, 연약함이, 부서짐이 내재한다. 미가 매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성 덕분이다. 이에 반해 건강한 것은 매력이 없다. 그것에는 어떤 포르노그래피적인 성질이 있다. “건강의 창궐은 그 자체로 언제나 병이기도 하다. 이 병의 해독제는 자신을 의식하는 병이며 삶자체의 제한이다. 그런 치유력을 지닌 병이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삶을 저지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쇠멸을 저지한다. 삶만을 추구하느라 병을 부정하면, 그렇게 실체화된 삶은 다른 계기로부터 맹목적으로 분리되어 바로 이 계기로, 파괴적이고 악한 것, 뻔뻔스럽고 우쭐대는 것으로 변하고 만다. 파괴적인 것을 증오하는 자는 삶 또한 증오해야 한다. 건강함과 매끄러움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Kalokratie가 바로 미를 철폐한다. 그리고 오늘날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간한 삶은 죽은 것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 Jun 4. 2020

상처의 미학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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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보는 것을 통한 상처의 경험을 긍정하기. 롤랑바르트의 스투디움/풍크툼 개념-> 미적거리가 없고 매끄러운 포르노그래피적 사진과 상처를 주고 ’은신처’가 있는 에로틱한 사진의 차이를 설명. 오늘 날의 무언가를 본다는 것=아펙툼 개념 도입]

롤랑 바르트-> 상처의 에로틱
“내게는 피부가 없다(애무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를 패러디하여 - 깃털 달린 존재가 아니라 피부가 없는 존재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피부 없음의 에로틱은 근본적인 수동성에 기초함. 피부가 벗겨진 존재는 노출된 존재보다 더 무방비 상태에 놓임. 이 상태는 고통과 상처를 의미함. “피부 없음. 사랑하는 자의 특별한 감수성은 그를 쉽게 상처 입는 존재로 만든다. 가장 깊숙한 내면까지 가장 쉽게 상처를 입는다.”

오늘날의 긍정사회 -> 더욱더 상처의 부정성을 축소시킴. 상처를 초래할 수 있는 큰 도박은 전부 회피됨. 성적 충동의 에너지는 파산을 막기 위해 자본 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산 투자됨. 지각 또한 부정성을 점점 더 회피함. 좋아요가 지각을 지배.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보는 것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함.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음.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함.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 감수성이란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뜻함. 상처란 보기의 진리계기라고 말할 수도 있음. 상처가 없으면 진리Wahrheit도, 나아가 지각 Wahr-nehmen 조차도 없음. 동일자의 지옥 안에는 진리가 없음.

릴케의 ‘말테의 수기’ -> 본다는 것 = 상처.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 내 자아의 미지의 영역 속으로 침범하도록 온전히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 그러므로 보기를 배우는 것은 전혀 적극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은 과정임. 오히려 그것은 내버려두기 혹은 어떤 사건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말함.

경험은 반드시 전율과 엄습의 부정성을, 상처의 부정성을 수반함. “사고가 없는 시, 상처처럼 벌어지지 않는 시, 그리고 또한 상처를 입히지 않는 시란 없다.” 상처 없이는 문학도 예술도 없음. 사유도 상처의 부정성에 의해 촉발됨.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동일한 것, 친숙한 것, 익숙한 것이 계속됨. “경험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그 고통 속에서 현존하는 것의 실체적인 타자성이, 익숙한 것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바르트의 사진 이론-> 상처의 미학. 사진의 두 가지 요소
1. 스투디움studium: 학습. 학습해야 하는 정보의 넓은 영역, 근심 없는 소망들, 목적 없는 관심, 두서없는 성향의 영역. 나는 좋아한다/나는 싫어한다 라고 말할 때의 영역. 관찰자는 스투디움의 영역에서 즐기면서 거닐고, 흥겹게 시간을 보냄. 눈요기를 하듯이 사진을 즐김. 스투디움은 to love 가 아니라 to like 의 만족한다의 장르에 속함. 이에는 어떤 격렬함도 어떤 전율도 없음.

사진은 문화적 코드를 갖음. 스투디움은 이런 이런 코드를 좇으면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이런 즐거움은 “결코 나의 쾌감도, 나의 고통도 아니다.” 스투디움은 어떤 열정도, 어떤 정열도, 어떤 사랑도 불러일으키지 않음. 그저 “절반의 욕구, 절반의 욕망” “막연하고 피상적이며 무책임한 관심”이 이끄는.

2.풍크툼punctum: 관찰자에게 상처, 상해를 입히고 전율을 낳음. “이번에는 내가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반면 나는 스투디움의 영역에서는 주권적인 의식을 갖고 돌아다님), 거꾸로 그 요소가 자신의 맥락으로부터 화살처럼 발사되어 나를 관통함. 풍크툼은 내 온 관심을 장악함. 풍크툼 읽기는 “짧고도 적극적이며, 도약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음.” 풍크툼은 나를 노려보는, 내 눈의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 맹수의 시선으로 자신을 알림. 눈요기로서의 사진을 온통 꿰뚫어 너덜너덜하게 만듦.

풍크툼은 시각의 빈틈을, “눈먼 영역”을 표시함. 풍크툼을 지닌 사진=은신처 이런 사진이 에로틱하고 매력적인 것은 이 때문. “이 눈먼 영역의 존재(그것의 역동성)가 에로틱한 사진을 포르노그래피적인 사진과 구별시켜준다는 것이 내 생각. 포르노그래피적 사진에서 나는 풍크툼을 발견하지 못하며, 기껏해야 재미를 느낄 뿐(하지만 이 재미마저 금세 지루함으로 바뀌고 만다). 에로틱한 사진은 “교란된, 갈라진” 사진임. 반면 포르노그래피적 사진에는 굴절도, 균열도 없음. 그것은 매끄럽다.
오늘날의 모든 사진들은 많건 적건 포르노그래피적임. 그것들은 투명하다. 거기에는 시각의 빈틈이 없다. 은신처도 없다.

풍크툼의 또 하나의 측면은 근본적인 불투명성. 그것에는 어떤 이름도, 기호도 갖다 붙일 수 없음. “내가 이름을 붙일 수있는 것은 나를 정말로 매혹할 수 없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내면의 불안에 대한 확실한 표현임. “ 풍크툼은 나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나의 지점을 찾아옴. 그래서 그것은 섬뜩하다. “작용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기호도, 이름도 없다. 그것은 나를 꿰뚫지만, 나는 그것이 상륙한 내 자아의 지점을 특정할 수 없다.”

평이한 사진에는 풍크툼이 없다. 이런 사진은 오로지 스투디움의 대상일 뿐. 풍크툼은 상처의 부정성을 갖고 있지만 쇼크와는 다름. “보도 사진들은 흔히 아주 평이한 사진들이다(평이한 사진이라고 해서 모두 다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 사진들에는 풍크툼이 없다. 쇼크는 있다. 있는 그대로의 실제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혹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런 사진은 ‘고함’을 지를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쇼크와는 달리 풍크툼은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을 사랑하며, 비밀을 보호함. 그 정적에도 불구하고 풍크툼은 상처로 나타남. 모든 의미, 의도, 의견, 평가, 판단, 연출, 포즈, 몸짓, 코드, 정보가 사라지면 풍크툼이 고요한, 노래하는 잔여로 드러나 우리를 당혹시킴. 풍크툼은 재현 뒤에 남아 있는 완강한 잔여이며, 의미와 의미 부여를 통한 매개를 거부하는 직접적인 것이며,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정념적인 것, 무의식적인 것이며, 나아가 상징적인 것에 대립하는 실재적인 것임.

영화의 영상들은 그 시간성으로 인해 풍크툼을 갖지 못함. “스크린 앞에서 나는 눈을 감는 자유를 취할 수 없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미 다른 영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쉴 새 없이 탐식을 강요받는다. 온갖 다른 특성들이 활동하지만, 숙고는 없다. 그래서 나는 포토그램에 관심으 갖는다.” 영상의 게걸스러운 소비는 눈을 감을 수 없게 한다. 풍크툼은 보기의 금욕을 전제로 함. 그것에는 어떤 음악적인 것이 내재하고 있음. 이 음악은 눈을 감을 때, “정적을 위한 노력” 속에서 비로소 소리를 냄. 정적은 소통의 “일상적인 잡음들”로부터 영상을 해방시켜줌. 눈을 감는다는 것은 “정적 속에서 영상이 말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함.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카프카르 인용-> “어떤 사물의 사진을 찍는 것은 그것을 의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위한 행위다. 내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
풍크툼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음. 그것은 눈을 감았을 때 펼쳐지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서서히 성숙함. 그 속에서 사물들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진행됨. 풍크툼의 언어는 상상에 의한 꿈의 기록임.

가속화가 진행될수록 직접적 현존이 세계를 더욱더 완전하게 장악함. 그리고 모든 잠재성이 밀려남. 무엇이든 당장 제시되어야 함. 그러나 풍크툼은 즉각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회상 속에서, 사후에야 비로소 나타남. “그러므로 풍크툼이 그 모든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사후에야 비로소, 사진이 더 이상 눈앞에 없는 상태에서 내가 그 사진을 다시 떠올릴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님. 바로 눈앞에 보고 있는 사진보다 기억 속에서 떠올리는 사진을 내가 더 잘 아는 경우가 생길 수 있음. 풍크툼이 아무리 직접적이고 강렬하다고 해도 우리는 일정한 잠재기를 보낸 후에야(그러나 결코 어떠한 정밀한 조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비로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결국 나는 알게 되었다.”

디지털 영상의 지각은 전염으로, 정념으로, 영상과 눈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진행됨. 이 점에서 그것은 외설적임. 그것에는 미적 거리가 전혀 없음. 전염으로서의 지각은 눈을 감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 바르트의 개념쌍이 스투디움/풍크툼에 아펙툼affectum*을 추가할 필요가 있음. 영상과 눈의 직접적 접촉은 오로지 아펙툼만 허용함. 디지털 매체= 정념의 매체. 정념은 감정이나 담론보다 더 빠름. 아펙툼은 스투디움에 필요한 참을성도 모르고, 풍크툼을 알아볼 감수성도 모름. 아펙툼에는 풍크툼에 핵심적인 능변의 정적, 언어로 충만한 침묵이 없음. 아펙툼은 고함을 지르고, 격양시킴. 그것은 직접적인 만족을 주는, 언어 없는 흥분과 자극만 불러일으킴.

*아펙툼: 대상을 자극하여 영향을 미침으로써 대상에 어떤 특정한 상태를 야기하는 것을 말하는 라틴어 아피케레afficere에서 유래한 용어.



>> Jun 3. 2020

은폐의 미학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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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 은폐, 숨김, 비밀, 은유, 가상, 에로틱, 유혹, 거리두기, 유희
vs 포르노그래피-> 노출, 폭로, 고백, 단도직입적, 지식, 포르노, 진리]

미= 은신처, 은폐가 본질적, 투명성과 화합하지 못함. 필연적으로 가상임. 불투명함이 내재함. 즉,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뜻. 폭로는 미에서 마술을 제거하고 미를 파괴함. 따라서 미는 본질적으로 폭로되지 않는 것.

포르노그래피 = 덮개가 없음. 비밀이 없는 노출. 미와 대립. 이상적인 장소는 쇼윈도. “포르노그래피적인 사진보다 더 동질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순진하고 의도성이 없으며 계산이 없다. 단 하나의 장신구에만 빛을 비춰 보여주는 쇼윈도처럼 포르노그래피적인 사진은 오로지 단 하나의 사물을 노출시키는 데만 집중한다. 바로 성기가 그것이다. 반쯤 은폐하고, 지연하고, 방향을 전화시키는, 또 하나의 방해하는 모티프는 일체 없다.” 은폐, 지연, 방향전환은 미의 시공간적인 전략이기도 함.반쯤 숨겨지도록 하는 계산은 유혹적인 광휘를 산출함. 미는 현상하기를 망설임. 방향전환은 미를 직접적인 접촉으로부터 보호해줌. 이런 방향전환은 에로틱한 것에 본질적임. 포르노그래피에는 방향전환이 전혀 없음. 곧장 대상으로 직진함. 방향전환은 포르노그래피를 에로틱한 사진으로 바꾸어놓음. **메이플소프: 성기 클로즈업+팬티의 소재도 촬영->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으로부터 에로틱한 것으로 넘어가도록 함. 나의 관심이 소재의 구조로 향하게 되면서 사진은 더이상 단조롭지 않게 됨. 사진작가는 의도적으로 시선의 방향을 대상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놓음. 그는 부수적인 대상을 중심 대상으로 바꾸거나, 중심 대상을 부수적인 대상에 종속시킴. 미 또한 중심 대상 옆에서 부수적인 대상 속에서 발생함. 아름다운 중심 대상이란 없음.

벤야민: 괴테의 문학은 “베일로 덮인 빛 속의 내부 공간”을 향함. 이 빛은 “가지각색의 조각들 속에서 굴절됨.” 괴테는 “미의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애쓸 때” 베일을 거듭하여 흔듦.
**괴테의 파우스트:
“네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들을 꽉 붙잡으라.
그 옷을 놓지 마라. 저기 벌써
악력들이 끝단을 온통 잡아당기며
옷을 저승으로 찢어 가져가려 하지 않는가. 그러니 꽉 붙잡으라!
네가 잃은 것은 더 이상 여신이 아니다.
하지만 그 옷은 신적인 것이다.”
옷은 신적이다. 숨김은 미에 본질적임. 그러므로 미는 옷을 벗지도, 폭로되지도 않음. 벗길 수 벗음이 미의 본질임.

베일에, 덮개에 싸여 있을 때, 은신처에 숨어 있을 때 = 대상은 아름다움. 아름다운 대상은 덮개에 싸여 있을 때만 자신을 유지함. 덮개가 벗겨지면 그 대상은 “무한히 보잘것없게” 되어버림. 아름다운 존재란 근본적으로 은폐된 존재임. 따라서 벤야민은 예술비평에 대해서도 은폐의 해석학을 요구함. “예술비펑은 덮개를 들어 올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님. 오히려 덮개르 가장 정확하게 덮개로 인식함으로써 미를 처음으로 진정하게 직관하는 데로 나아가야 함. 이른바 감정이입이라는 것은 결코 그런 직관에, 비밀로서의 미를 직관하는 데 도달할 수 없음. 보다 순수한 소박한 관찰도 단지 불완전하게만 그런 직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임. 진정한 예술작품은 결코 폭로될 수 없는 비밀로 나타날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파악된 적이 없음. 궁극적으로 반드시 덮개로 덮여 있어야 하는 대상을 표시하는 말은 비밀이라는 말밖에 없음. 미는 직접적인 감정이입에도, 소박한 관찰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이 두 가지 접근 방식들은 덮개를 들어 올리거나 덮개를 관통하여 그 안쪽을 들여다보고자 함. 그러나 비밀로서의 미는 오로지 덮개를 덮개 자체로 인식하는 것을 통해서만 직관할 수 있음. 덮여 있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덮개에 주목해야 함. 덮개는 덮여 있는 대상보다 더 본질적임. 은폐는 텍스트도 에로틱하게 만듦. *아우구스티누스: 신이 은유를 통해, “비유의 외투”를 통해 성서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듧으로써 성서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함. 은유로 지어놓은 아름다운 옷은 글을 에로틱하게 만듦. 그러므로 옷은 글에, 나아가 아름다움에 본질적임. 은폐의 기술은 텍스트의 즐거움을 최대화하고, 독서를 사랑의 행위로 만듦.

토라(유대교 성경 타나크의 첫 부분, 구약의 모세5경에 해당)도 은폐의 기술을 사용함. “토라는 성궤에서 말 하나를 밖으로 꺼내지만, 그 말은 한순간 나타났다가 즉시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이렇게 한순간 나타났다가 즉시 모습을 감추는 이유는 오직 토라를 인식하고 토라를 잘 아는 사람들만을 위해서다. 왜냐하면 토라는 자기 궁전의 숨겨진 방에 숨어 지내는, 아름답고 잘 성장한 애인과 같기 때문이다. 토라에게는 아무도 정체를 알지 못하고 항상 숨어 있는 단 한 명의 연인이 있을 뿐.” 토라는 “드러나 있고 숨어 있다.” 토라는 “알레고리적인 말들의 얇은 베일을 통해” 말함. 그리고 연인에게 “태초부터 자신의 가슴속에 있어온 모든 숨겨진 비밀들과 모든 숨겨진 자신의 길들”에 대해 이야기함.

정보= 원칙적으로 숨겨지지 않음. 본질적으로 투명. 일체의 은유를,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일체의 옷을 거부함. 단도직입적으로 말함. 이 점에서 정보는 다시 비밀 속으로 물러날 수 있는 지식과도 다름. 정보는 전혀 다른 원칙을 따름. 정보는 폭로를, 최종적인 진리를 지향함. 따라서 정보는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래피적임.

*바르트: 은폐=에로틱의 본질. “드러냄과 숨김의 동시적 연출”이 에로틱함. 벌어진 틈, 균열, 사이가 에로틱한 것을 만들어냄. 텍스트의 에로틱한 즐거움은 계속 진전되는 노출에서 비롯되는 “스트립쇼를 하는 몸을 보는 즐거움”과 다름. 최종적인 폭로, 마지막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읽기 쉬운 소설도 포르노그래피적임. “모든 흥분은 성기를 볼 수 있다는, 혹은 이야기의 끝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 에로틱한 것은 진리 없이도 성립됨. 그것은 가상이며, 베일의 현상임.

유혹= “그 자체로서 타자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것, 내가 결코 알지 못할 것, 그럼에도 비밀로 봉인된 채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대한 “예감”을 가지고 유희함. 유혹에는 “거리 두기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니체의 후기 저작에 등장하는 표현, 귀족적이고 높은 신념을 지닌 인간이 하급의 인간에 대해 취하는 태도)” 나아가 은폐의 파토스가 내재함. 사랑의 친밀성은 이미 유혹에 본질적인 비밀스러운 거리를 축소시킴. 그리고 마침내 포르노는 이 거리를 완전히 제거해버림.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계속 나아갈수록, 유혹에서 사랑으로, 욕망에서 성으로, 그리고 결국 단순하고 조잡한 포르노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비밀의 축소와 수수께끼의 위축을 향해, 고백과 표현과 폭로를 향해 더 세계 나아가게 됨.”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노출됨. 영혼의 포르노그래피는 유혹의 최종적인 종말임. 유혹은 진리보다는 유희에 가까움.



>> Jun 3. 2020

디지털 미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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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자연의 숭고 앞 자아의 유한성, 제한성을 인식 / 자연미 vs 디지털 미, / 예술미=자연미가 가진, 아직 오지 않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방 / 디지털 미= 타자로부터 단절되어 자기애적인 시각의 공간에 갇혀 오직 자기 자신에 만족을 느낄 뿐]

칸트의 주체: 영구희 자기 안에 머무름. 결코 자신을 상실하지도, 소모하지도 않음. 자기애적인 내면성이 그것을 타자 혹은 바깥의 모든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줌.

반면 아도르노: 자연의 숭고에 직면하여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를 인지함. 자연의 숭고는 자기 안에 갇힌 주체를 바깥으로 끌어냄. “자연 앞에서 정신은 칸트가 바라던 대로 자신의 우월성을 인지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자연성을 인지함. 이 순간 주체는 숭고 앞에서 눈물을 흘림. 자연을 상기함으로써 주체는 더 이상 자기정립으로 맞서지 않음. “눈물이 솟구치고, 대지는 다시 나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자아는 자기 안의 감금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벗어남.” 주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옴. 아도르노에게 고유한 미적 경험= 주체가 자신을 확인하는 만족이 아니라, 전율과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에 있음. “일반적인 체험 개념에 날카롭게 대립하는 전율은 자아의 단편적인 만족이 아니며, 쾌감과도 비슷하지 않음. 오히려 그것은 자아가 청산되는 순간이며, 이때 전율에 휩싸인 자아는 자신의 제한성과 유한성을 깨닫게 됨.”

“자연미”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만족을 주지 않음. 그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말하는 것이 아님. 자연미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지각에 자신을 드러냄. “아직 현존하지 않는 것의 암호”로서 자연미는 “말 그대로 현장에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표시함. 아도르노는 “자연미 앞에서 느끼는 수치심”에 대해 말함. 이 수치심은 “아직 현존하지 않는 것을 현존하는 것 속에서 붙잡음으로써 그것을 훼손한다”는 데에서 유래함. 자연의 존엄성은 “자신의 표현을 통해 의도적인 인간화를 거부하는, 아직 현존하지 않은 것”의 존엄성임. 이런 존엄성은 일체 사용되기를 거부함. 그래서 자연미는 소비와 “소통”에서 완전히 벗어남. 소통은 “정신을 유용한 것에 순응”시킬 뿐이며, “이런 순응의 결과, 정신은 상품의 일원이 됨.” (*요자: 자연 앞에서 우리는 왜 수치심, 작아짐, 겸손함을 느끼고 이러한 자연의 존엄성과 특징은 무엇인지, 이런 자연미의 특징때문에 소비와 소통에서 벗어남을 이야기함.) 자연미는 언제나 어떤 자기애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단순한 만족을 주지 않음. 오로지 고통만이 자연미에 접근 할 수 있음. 고통은 주체를 자기애적인 내면성으로부터 떼어냄. 고통은 완전히 다른 타자가 그것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균열임. “자연을 경험할 때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는, 미 앞에서의 고통은 미가 약속하는 것을 향한 갈망이기도 함.” 자연미를 향한 갈망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다른 상태, 완전히 다른, 폭력 없는 삶의 형태를 향한 갈망임. 디지털 미는 자연미에 대립함. 디지털 미에서는 타자의 부성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음. 전적으로 매끄러움. 어떠한 균열도 있어선 안 됨. 부정성 없는 만족,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든다라는 것이 디지털 미의 징표임. 어떠한 낯섦도, 비동일성도 허용하지 않는, 동일한 것의 매끄러운 공간을 형성함. 어떠한 외부도 없는 순수한 내재성이 디지털 미의 현상 방식임. 자연조차 자기 자신의 창으로 만들어버림. 존재의 전면적인 디지털화 덕택에 전면적인 인간화가, 절대적인 주체성이 달성되고, 그 안에서 인간 주체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만날 뿐. 시간적으로 자연미는 아직의 이미를 표시함. 자연미는 다가올 것의 유토피아적 지평선에서 나타남. 이에 반해 디지털 미는 시간적으로 미래가 없는, 나아가 역사가 없는 직접적인 현재를 표시함. 그저 여기에 있을 뿐. 자연미에는 먼 것이 내재함. 그것은 “가장 가까운 순간 속에 자신을 은폐함” 자연미는 아우라 속의 멂을 표시하기 때문에 전혀 소비될 수 없음. “규정에 맞서는, 규정되지 않는 것, 그런 것으로서 자연미는 규정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음악과 비슷함. 음악에서처럼 자연에서도 아름다움은 한순간 번득일 뿐, 그것을 붙잡으려는 시도 앞에서 즉시 사라져버림.” 자연미는 예술미와 대립하는 것이 아님. 오히려 예술은 “자연미 자체”를 “자연의 언어의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방함. 그럼으로써 자연미를 구원함. 예술미는 “자연이 말하는 오직 한 가지 길, 즉 침묵을 모망한 형상”임. 자연미는 “보편적인 동일성의 속박 속에서도 사물에 남아 있는 비동일성의 흔적”임이 밝혀짐. 디지털 미는 비동일성의 모든 부정성을 추방함. 그리고 오로지 소비하고 사용할 수 있는 차이들만을 허용함. 비동일성은 잡다함으로 대체됨. 디지털화된 세계는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의 망막으로 뒤덮은 세계임. 인간이 펼쳐놓은 막에 에워싸인 세계는 영구적인 자기 반사로 이끔. 막이 더 촘촘해질수록 세계는 타자로부터, 바깥으로부터 더 철저하게 단절됨. 디지털화된 망막은 세계를 영사막과 통제 화면으로 바꾸어놓음. 이 자기애적인 시각의 공간, 이 디지털화된 내면성 속에서는 어떤 놀라움도 느낄 수 없음.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에 만족을 느낄 뿐.



>> Jun 2. 2020

매끄러운 몸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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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셀피 비판-공허한 형태의 자아의 표출. 오늘날 해체되고 데이터화된 몸, 내러티브가 사라진 몸, 탈마술화 탈권력화된 몸 = 매끄러운 몸]

클로즈업->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나타나게 함.

발터 벤야민: 클로즈업을 여전히 언어적이고 해석학적인 실천으로 간주.
클로즈업은 몸을 읽는다. “클로즈업은 공간을 팽창시키고, 슬로모션은 운동을 팽창시킴. 확대는 ‘그냥 봐도’ 불분명하게나마 보이는 것을 또렷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재의 완전히 새로운 구조 조성을 드러냄.

클로즈업될 때 배경은 완전히 흐릿-> 세계의 상실을 초래. 클로즈업의 미학은 스스로 클로즈업 사회가 되어버린 하나의 사회를 반영. 얼굴은 자기 안에 갇혀 자신만을 지시한다. 더 이상 세상을 함유하고 있지 않음. 다시 말해 더 이상 표현하는 바가 없다. 셀카가 바로 이런 공허하고 표현 없는 얼굴임.
셀카 중독-> 자아의 내면적 공허를 표시함. 오늘날 자아는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자신에게 확고한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안정된 표현 형태들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함. 모든 것이 지속성을 잃어버림. 이 불안정성이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자아를 불안하게 하고 동요시킴. 바로 이런 불안함, 자신에 대한 근심이 셀카 중독을, 자아의 공회전을 낳음. 내면의 공허를 덮기 위해 셀카의 주체는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애씀.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임. 셀카는 공허를 재생산함.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나 허영심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을 낳음. 스스로를 사랑하는 안정된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없음. 오히려 부정적 나르시시즘임.

얼굴은 클로즈업되면 매끄러운 페이스face가 됨. 페이스에는 깊음도 얕음도 없음. 그저 매끄러움. 페이스는 파사드Fassade/facies를 의미함. 페이스를 파사드로 내보이는 데에는 초점 심도가 필요하지 않음. 이는 오히려 파사드를 훼손함. 따라서 조리개를 완전히 열어놓음. 열린 조리개는 심도, 즉 내면성을, 시선을 제거함. 이는 페이스를 외설적으로,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만듦. 드러냄의 의도성은 시선의 내면성을 구성하는 감춤을 파괴함. 스스로를 드러내는 페이스에는 시선이 없다.

오늘날 몸: 포르노그래피적인 신체 부위들로 분해됨 + 디지털화된 데이터 기록들로 변환됨. 생명을 측정하고 정량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함. “정량화된 자아Quantified Self” 운동도 이 믿음을 숭상함. -> 이는 몸을 통제받고 감시받는 스크린으로 변화시킴. 데이터주의는 몸을 데이터로 해체하고, 데이터화할 수 있게 바꾼다. 또한 몸은 성기와 유사한 국부적인 대상으로 분해됨. 투명한 몸은 더 이상 상상적인 것의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무대가 아님. 여기서 몸은 데이터나 국부적 대상들의 합산임.
디지털 네트워크는 몸을 네트워크에 연결시킴. 자동운전 자동차는 정보들의 이동 단말기에 지나지 않으며, 나는 그거 거기에 연결되어 있을 뿐. 그 결과 자동차 운전은 순수한 조작적 과정이 됨. 속도는 상상적인 것과 완전히 격리됨. 자동차는 더 이상 권력과 점유와 전유의 환상들로 채워진, 연장된 몸이 아님. 자동운전 자동차는 남근Phallus가 아님. 카셰어링도 자동차에서 마술성과 성스러움을 제거함. 나아가 몸도 탈마술화함. 남근에는 함께 쓰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음. 남근은 점유과 소유와 권력의 상징 그 자체이기 때문. 연결 혹은 가입과 같은 함께 쓰기 경제의 범주들은 권력과 전유의 환상을 파괴함. 나는 그저 세계와 연결된 소통네트워크 안에 있는 하나의 인터페이스에 지나지 않음.



>> Jun 2. 2020

매끄러움의 미학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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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숭고의 부정성의 긍정]

아름다움의 미학 = 근대의 독특한 현상.
근대 미학에서야 비로소 미와 숭고가 분리됨.
강력해지는 근대의 자아는 미를 만족의 대상으로 긍정화 함.
이 과정에서 미=숭고에 대립
숭고는 부정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직접적 만족을 주지 않음.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가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다시 긍정성으로 바뀜.
숭고는 바깥이,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표현 형식이 됨.

아름다움에 대한 근대의 미학이 매끄러움의 미학으로 시작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 에드번드 버크: 매끄러운 것이 아름답다고 봄. 촉각에 즐거움을 제공하려면 물체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아야 함. 매끄러운 것은 부정성이 없는, 최적화된 표면임. 그것은 어떠한 고통도, 저항도 섞이지 않은 느낌을 낳음. 누구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물은 거의 예외없이 매끄러움. 거칠고 모난 사물들이 감각기관을 자극하고 방해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 그런 사물들은 힘줄들을 급격하게 긴장시키거나 수축시켜 고통의 감정을 초래하기 때문.

고통의 부정성은 미의 감정을 약화시킴. “견고함”이나 “강함”도 미의 감정을 약화시킴. “부드러움”이나 “연함” 같은 특징이 아름다움. 몸은 “어떠한 거칠거칠함도 보이지 않고 눈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는” “매끄러운 부분들”로 구성될 때 “연하다.” 사랑과 만족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몸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짐. “감동과 연약함의 내면적 감정을 수반함”

버크는 매끄러움을 미의 본질적 특징으로 격상시킴. “어떤 아름다운 대상을 가져와서 그것의 표면을 이리저리 갈라놓거나 거칠게 만들어놓으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어떤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움의 기초들을 아무리 제거하더라도 오직 이 한 가지 성질(매끄러움)만 남겨놓는다면, 그것은 이 성질을 지니지 않는 모든 다른 대상들보다 여전히 더 마음에 들 것이다.”

날카로운 모서리도 미를 훼손함. “모든 거칠거칠함, 모든 갑작스러운 돌출, 모든 날카로운 모서리는 실제로 미의 관념과 지극히 모순되기 때문.” 모든 전환과 마찬가지로 형태의 변화도 미에 도움이 되지만, 이런 변화는 급격하고 갑작스럽게 일어나서는 안 됨. 미는 오로지 형태의 부드러운 변화만 허용.

미각에 있어서 매끄러움에 상응하는 것은 달콤함임. 매끄러움과 달콤함은 근원이 같음. 이들은 순수한 긍정성의 현상들임. 그래서 단순히 만족을 주는 데서 그침.

에드먼드 버크: 미를 모든 부정성으로부터 해방시킴. 미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즐거움”을 제공해주어야 함. 이에 반해 숭고에는 부정성이 깃들어 있음. 아름다운 것은 작고 어여쁘고, 밝고 연함. 매끄러움과 고름이 미의 특징임. 반면 숭고는 크고 육중하고 어둡고 거칠고, 매끄럽지 않음. 숭고는 고통과 공포를 야기함. 그러나 마음을 격렬하게 운동시킨다는 점에서는 건강에 도움이 됨. 이에 반해 미는 마음을 이완시킴. 버크는 숭고에 직면할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고통과 공포의 부정성을 다시 긍정성으로 바꿔놓음. 이 부정성이 우리를 정화해주고,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것. 따라서 숭고는 주체에 전적으로 이로운 것. 이에 따라 숭고는 그 타자성과 낯섦을 일어버림. 그리고 주체에 완전히 흡수됨.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고통과 공포가 완화되어 직접적인 상해를 입히지는 않는다면, 고통이 정말로 격렬하지는 않고, 공포가 그 개인의 직접적인 파멸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면 - 그렇다면 이런 흥분들은 기쁨을 낳을 수 있음. 왜냐하면 이 흥분들은 우리 몸의 섬세하거나 조야한 특정 부위들을 위험하고 고생스러운 장애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런 흥분들이 낳는 기쁨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안도감 섞인 경악, 혹은 경악이 가미된 일종의 평온함이라고 해야 할 것임.

칸트도 버크처럼 미를 긍정성 안에 가둬놓음. 그가 말하는 미도 긍정적인 만족을 줌. 그러나 식도락의 향락 차원은 넘어서는데, 이는 칸트가 미를 인식 과정과 결부된 것으로 보기 때문. 인식을 생산하는 데에는 구상력과 오성(기쁨, 노여움, 욕심, 두려움, 근심)이 함께 참가함. 구상력이란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잡다한 감각 데이터들을 하나의 통일된 형상으로 요약해내는 능력을 말함. 오성은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추상 단계에서 작업함. 오성은 형상들을 개념으로 요약해 냄. 미에 직면할 때 인식능력들, 즉 구상력과 오성은 자유로운 유희 상태로, 조화로운 합동 유희의 상태로 들어감. 미 앞에서 인식능력들은 유희함. 그리고 아직 인식의 생산을 위해 작업하지는 않음. 다시 말해 미 앞에서 인식능력들은 유희의 태도를 취하는 것. 그러나 이 자유로운 유희도 완전히 자유롭거나 모든 목적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음. 왜냐하면 이 유희는 노동으로서의 인식을 위한 전희이기 때문. 하지만 아직은 유희를 함. 미는 유희를 전제함. 미는 노동 이전에 생겨남.

미는 인식능력들의 조화로운 합동 유희를 자극하기 때문에 주체에게 만족감을 줌. 미의 감정이란 바로 “인식능력들의 조화로 인한 쾌감”. 인식 노동에는 필수적인, 인식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가 낳는 쾌감임. 칸트는 궁극적으로 유희를 노동에, 나아가 “사업”에 종속시킴. 미는 스스로는 아무런 인식도 생산하지 않지만, 인식장치들을 활동하게 함. 주체는 미 앞에서 스스로에 대한 만족을 얻음. 그러므로 미는 자기애적인 감정임. 이는 대상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감정임. 미는 주체를 사로잡는 타자가 아님. 미에 대한 만족은 주체의 자신에 대한 만족임. 아도르노: 자신의 미학 이론에서 칸트 미학의 바로 이러한 자기애적인 특징을 부각시킴. “자신의 타자에 대한 고려 없이 주체의 합법칙성에만 복종하는 형식적인 것은 타자에 의해 동요되지 않은 채 만족을 주는 성질을 유지함. 여기서 주체성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지배력을 향유함.

미와는 반대로 숭고는 직접적인 만족을 전혀 낳지 않음. 숭고가 주는 최초의 느낌은 고통과 불쾌감임. 숭고는 구상력에게 너무 위력적이고, 너무 큼. 구상력은 그것을 파악할 수 없고, 하나의 형상으로 요약할 수 없음. 그래서 주체는 숭고 앞에서 동요하고 압도당함. 여기에 숭고의 부정성이 있음. 위력적인 자연현상을 보면서 주체는 우선 자신의 무력함을 느낌. 그러나 주체는 저 “아주 다른 종류의 자기보존”에 힘입어 다시 자신을 추스름. 주체는 이성의 내면성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구원함. 이성이 지닌 무한성의 이념에 비하면 “자연 안의 모든 것이 작음”

자연의 위력적인 현상들조차 주체를 뒤흔들지 못함. 이성은 그런 현상들보다 더 위에 있음. 숭고에 직면하여 주체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 “생명력의 제동”은 오래 지속되지 않음. 이성의 내면성 속으로, 이성의 이념 속으로 후퇴하면 그런 것들이 다시 쾌감으로 바뀜. “따라서 폭풍에 휩싸여 들끓는 드넓은 대양이 숭고하다고 말할 수 없음. 그런 대양의 모습은 끔찍함. 그런 광경을 보면서 그 자체로서 숭고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려면 우리는 마음속을 이미 여러 이념들로 채워놓았어야 함. 이런 감정이 숭고한 것은 이때 마음이 감각성을 벗어나서 더 높은 합목적성을 지닌 이념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자극받기 때문임.”

숭고에 직면하여 주체는 자신이 자연을 넘어선 숭고한 존재라고 느낌. 왜냐하면 실제로 숭고한 것은 이성 안에 있는 무한성의 이념이기 때문. 이 숭고함이 대상에, 이 경우에는 자연에 잘못 투사됨. 칸트는 이 혼동을 “사취(남의 것을 거짓으로 속여서 빼앗음) Subreption”라고 부름. 미와 마찬가지로 숭고도 대상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주체 자신에 대한 감정임. 자기애적인 주체-감정인 것.

“미가 주는 만족은 긍정적”인 반면, 숭고가 주는 만족은 “부정적”임. 미가 주는 만족이 긍정적인 것은, 그것이 주체를 직접적으로 만족시켜주기 때문. 이와는 달리 숭고 앞에서 주체는 우선 불쾌감을 느낌. 그래서 숭고가 주는 만족은 부정적.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 앞에서 주체가 자신의 타자에 직면하고, 타자를 향해 자신의 바깥으로 끌려나가고, 탈아의 상태에 처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님. 주체의 자기애를 방해할 타자의 부정성은 숭고에도 없음. 주체는 영구적으로 자기 안에 머무름. 숭고로부터도 벗어나는 전적인 타자는 칸트에게 끔찍하고 기괴하고 파멸적인 것이었으리라.

미도 숭고도 주체의 타자가 아님. 거꾸로 그것들은 주체의 내면성에 흡수됨. 자기애적인 주체성 바깥의 공간이 허용될 때만 다른 미가, 나아가 타자의 미가 다시 확보될 수 있을 것. 미 전체를 소비문화의 싹으로 보고 의심하거나, 포스트모던의 방식에 따라 숭고를 미와 대립시키는 시도는 별로 도움이 못 됨. 미와 숭고는 근원이 같음. 그러므로 숭고를 미에 대립시키는 대신 해야 할 일은 내면화 할 수 없는, 탈주체적인 숭고를 다시 미에 반환하고, 미와 숭고의 분리를 철회하는 것.



>> Jun 1. 2020

매끄러움 / 아름다움의 구원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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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움은 현재의 징표다. 매끄러움은 제프 쿤스의 조형물들과 아이폰과 브라질리언 왁싱을 연결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왜 매끄러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

스마트폰도 매끄러움의 미학을 좇는다. 밀착성과 무저항성이 매끄러움의 미학의 본질적인 특징들.

디지털 장치들을 거쳐 이루어지는 소통도 매끄럽게 다듬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주로 기분 좋은 것들, 긍정적인 것들을 주고받기 때문. 셰어링과 좋아요는 소통을 매끄럽게 해주는 도구다. 부정적인 것들은 제거된다. 가속화된 소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제프 쿤스는 매끄러운 표면의 대가다. 앤디 워홀 역시 아름답고 매끄러운 표면을 좋아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의 예술에는 아직 죽음과 재앙의 부정성이 각인되어 있다. 그의 예술의 표면은 완벽하게 매끄럽지는 않다. *죽음과 재앙 연작의 핵심은 여전히 부정성이다. 그러나 제프 쿤스의 경우에는 어떤 재앙도, 상처도, 깨어짐이나 갈라짐도, 심지어 봉합선도 없다. 모든 것이 부드럽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듬어지고 연마된 것, 매끄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 외에 해석할 것도, 해독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다. 그것은 좋아요의 예술이다.

그의 예술은 의도적으로 유아적이고 평범하며, 흔들림 없이 평온하고, 우리를 이완시키고 편안하게 해준다. 어떤 깊이도, 어떤 얕음도, 어떤 심오함도 없다. “관찰자를 포옹하라”. 이것이 그의 좌우명이다. 관찰자에게 충격을 주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제프 쿤스는 예술이란 오로지 “아름다움”과 “기쁨”과 “소통”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매끄러운 조형물들 앞에 서는 “촉각 강박”이 생겨난다. 그의 예술에는 거리를 두게 하는 부정성이 빠져 있다. 오로지 매끄러움의 긍정성만이 촉각 강제를 불러일으킨다. 이 긍정성은 관찰자를 거리 없애기로, 터치touch로 이끈다. 그러나 미적 판단은 관조적인 거리를 필요로 한다. 매끄러움의 예술은 이 거리를 없앤다.

헤겔은 예술이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고수하며, 따라서 예술에서의 감각성을 “이론적 감각들인 시각과 청각”에 제한시킨다. 이 두 가지 감각만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반대로 후각과 미각은 예술의 향유에서 배제된다. 후각과 미각은 오로지 “쾌적한 것das Angenehme”만 수용할 수 있으며, 이 “쾌적한 것”은 “예술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후각과 미각과 촉각은 물질적인 것 자체, 그리고 이 물질적인 것의 직접적인 감각적 성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후각은 물질이 공기 중으로 휘발되는 것과 관련된 것이고, 미각은 대상의 물질적인 용해와, 촉각은 온기와 냉기, 매끄러움 등과 관련된 것이다.” 매끄러움은 그저 쾌적한 촉각만 전달해줄 뿐인데, 이 촉각은 그 어떤 의미나 심오함과도 결합될 수 없다. 매끄러움이 낳을 수 있는 것은 “와!”라는 말뿐이다.

*일상의 신화 _ 롤랑 바르트 언급
그는 촉각이 “가장 마술적인 감각인 시각과는 반대로 여러 감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탈신비화하는 감각”이라고 말한다. 시각은 거리를 유지하는 반면, 촉각은 거리를 제거한다. 거리 없이는 신비도 있을 수 없다. 탈 신비화는 모든 것을 즐기고 소비할 수 있게 해준다. 촉각은 완전히 다른 타자의 부정성을 파괴한다. 자신이 만지는 것마다 세속화한다. 시각과 달리 촉각은 경이로움을 느낄 능력이 없다. 그래서 매끄러운 터치스크린도 탈신비화와 전면적인 소비의 장소다. 터치스크린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을 만들어낸다.

제프 쿤스의 조형물들은 거의 거울처럼 매끄러워서 관찰자는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관찰자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만들고자 한다. “나는 거울처럼 반사하는 소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런 소재가 자동적으로 관객의 자기 확신을 강화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어두운 공간에서는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상 바로 앞에 서게되면, 관찰자는 자신이 반사된 모습을 보고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풍선 개는’ 트로이의 목마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 매끄러운 표면 안쪽에 숨겨진 내면성이 전혀 없다.

매끄럽게 반들거리는 조형물들을 보면서 타자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만날 뿐. 제프 쿤스는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과 너 자신의 역사를 신뢰하는 방법을 배워라. 우리는 자신의 삶에 애착을 느껴야 한다. 예술은 내가 나 자신을, 나의 실존을 확일 할 수 있는 반향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타자 혹은 낯선자의 비동일성 혹은 부정성은 완전히 제거된다.

그의 예술은 구원론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예술은 구원을 약속한다. 매끄러움의 세계는 미식의 세계, 순수한 긍정성의 세계이며, 그 안에는 어떤 고통도, 상처도, 책임도 없다. 제프 쿤스의 마리아-‘풍선 비너스’. 그녀가 출산하는 것은 어떤 구원자도, 가시관을 쓰고 온몸이 상처로 뒤덮인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도 아니다. 단지 페리뇽 로제 빈티지 와인 한 병. 제프 쿤스는 구원을 약속하고 세례를 베푸는 자로 자신을 연출한다. 그의 1987년 연작 세례Baptism. 그의 예술은 매끄러움의 성화를 추구한다. 그는 매끄러움과 사소함의 종교를, 단적으로 말해 소비의 종교를 연출한다. 이 종교를 위해서는 일체의 부정성이 제거되어야 한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부정성이 예술에 본질적이라고 봄. 부정성은 예술의 상처다. 거기에는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특별한 것 하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초과’를 만들어낸다. *릴케-‘그런 것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 이 사실성은 또한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의미 기대에 맞서는 극복할 수 없는 저항이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이 점을 인정하라고 강요한다. ‘거기에는 너를 보지 않는 지점이 전혀 없다.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 특수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타격이며, 타격으로 인한 쓰러짐이다. 모든 예술적 경험이 그런 특수성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예술작품으로부터 타격 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은 관찰자를 타격하여 쓰러뜨린다. 매끄러움은 전혀 다른 것을 의도한다. 그것은 다정스레 관찰자에게 밀착하여 그로 하여금 좋아요라고 말하게 한다. 그것은 오로지 관찰자에게 만족을 주고자 할 뿐, 타격을 가하여 그를 쓰러뜨릴 생각이 없다.

오늘날에는 아름다움으로부터 일체의 부정성이, 전율과 상해의 모든 행태들이 제거됨으로써 아름다움 자체가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아름다움은 만족을 주는 것으로 제한된다. 미학화가 실은 비미학화임이 드러난다. 이 미학화는 지각을 진정시킨다. 그러므로 제프 쿤스가 말하는 “와!”도 비미학적인 반응이다. 이 반응은 타격과 타격으로 인한 쓰러짐이라는 부정적 경험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미의 경험이 불가능해졌다. 만족과 좋아요가 전면에 나서는 곳에서는 경험이 마비된다. 부정성이 없으면 경험도 불하능하기 때문이다.

매끄러운 시각적 소통은 어떤 미적 거리도 없는 전염으로 진행된다. 대상의 빈틈없는 가시성은 시선도 파괴한다. 현존과 부재, 은폐와 폭로의 율동적인 교체만이 시선을 깨어 있게 한다. 에로틱한 것 또한 “드러냄과 가림의 연출,” “상상의 파동운동”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가시성이 포르노그래피적으로 지속되면 상상이 파괴된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진다.

오늘날에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도 매끄러워진다. 추 또한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혹은 끔찍한 것의 부정성을 잃어버리고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추는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것을 돌러 변화시키는 메두사의 시선을 완전히 상실했다. 세기말의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활용했던 추에는 무언가 심원하고 악령과 같은 것이 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적인 추는 도발이자 해방이었다. 그들은 전승된 지각 관습을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바티유Georges Bataille는 추에서 탈경계와 해방의 가능성을 보았다. 추는 초월로 들어서는 길을 열어준다. “누구도 성행위가 추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희생제의에서의 죽음처럼 교미의 추함은 우리에게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공포가 커질수록 탈경계의 의식도 더 강력해지고, 이 의식은 희열의 분출을 낳는다.” 이에 따르면 성의 본질은 방종(제멋대로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음)과 위반이다. 성은 의식의 경계를 허문다. 여기에 성의 부정성이 있다.

역겨움은 원래 “비상상태, 동화시킬 수 없는 타자성에 직면하여 자기주장이 맞게되는 긴급한 위기, 말 그대로 존재와 절멸이 걸려 있는 경련이자 투쟁”이다. 이런 역겨움은 전혀 소비할 수 없는 것이다. 로렌크란츠Karl Rosenkranz도 역겨움에는 실존적 차원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삶의 타자, 형태의 타자이며, 부패하는 것이다. 시체는 파렴치한 현상이다. 실제로는 형태가 없으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형태 때문에 생명의 가상을 유지한다. “역겨운 것은 (끔찍한 것의) 실제적인 측면이다. 현상의 아름다운 형식이 육체적 혹은 도덕적 부패로 인한 무형식에 의해 부정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죽은 것에서 유지되는 생명의 가상이 역겨운 것 속의 무한히 혐오스러운 것이다.” 무한히 혐오스러운 것으로서의 역겨움에 대해서는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 오늘날 ‘정글캠프Dschungelcamp(독일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에서 보여주는 역겨운 것에는 실존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일체의 부정성이 빠져있다. 역겨운 것이 소비에 맞는 형태로 윤색된 것.

위생강제는 다른 영역들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위생이라는 명목으로 금지조치가 행해진다. *로베르트 팔러Robert Pfaller ‘더러운 성스러움과 순결한 이성’ : 부지불식간에 우리 문화에서 불가능해진 것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아보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리 문화가 이것들을 흔히 혐오스러운 것, 더러운 것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위생적인 이성의 조명하에서는 모든 애매성, 모든 비밀이 더러운 것으로 지각된다. 순수한 것은 투명성이다. 정보와 데이터의 매끄러운 흐름에 순응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데이터에는 무언가 포르노그래피적이고 외설스러운 점이 있다. 데이터에는 내면성이, 뒷면이, 애매함이 없다. 이런 점에서 데이터는 완벽히 정확한 초점을 허용하지 않는 언어와는 다르다. 데이터와 정보는 완벽한 가시성에 자신을 내맡기며,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만든다.

데이터주의가 2차 계몽을 이끌고 있다. 1차 계몽은 자유의지를 전제하는 행위를 신조로 삼았다. 2차 계몽은 이런 행위를 조작으로, 데이터에 의해 진행되는 과정으로 다듬는다. 이 과정은 주체의 자율성과 연출이 전혀 없이 일어난다. 조작으로 바뀔 때, 계산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과정에 예속될 때, 행위는 투명해진다.

정보는 지식의 포르노그래피적인 형태다. 정보에는 지식의 특징인 내면성이 없다. 지식은 흔히 일정한 저항을 극복해야만 쟁취할 수 있고, 이런 점에서 지식에는 부정성 또한 내재한다. 지식은 아주 다른 시간 구조를 갖고 있다. 지식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펼쳐진다. 이에 반해 정보에 내재된 시간은 무차별한 현재 지점들로 구성된, 매끈해진 시간이다. 사건도 운명도 없는 시간이다.

매끄러움은 그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일 뿐이다. 그것에는 저항이라는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더 이상 내게 맞서는 대상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소통 또한 매끄러워진다. 그것은 더 이상 내게 맞서는 대상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소통 또한 매끄러워진다. 소통은 정보의 원활한, 즉 마찰 없는 교환이 되어 매끄러워졌다. 매끄러운 소통에는 타자와 낯선 자의 부정성이 일절 끼어들 수 없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반응할 때, 소통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타자로 인해 발생하는 저항성은 동일한 것의 매끄러운 소통을 방해한다. 매끄러움의 긍정성은 정보와 소통과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한다.



>> Apr 2. 2020

천사의 시간 / Darf der Zeit 시간의 향기_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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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확언한 바 있는 거대 서사의 종언은 서사적 시간의 종언이다. 사건들을 하나의 서사 궤도상에 줄 세우고 이로써 하나의 연관성 있는 맥락을, 중요한 의미를 짜내는 플롯으로서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종언은 무엇보다 시간의 위기다. ... 이야기 Erzählen의 종언이 반드시 삶을 단순한 셈Zählen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바깥에서, 의미와 꾸며내기를 추구하는 플롯의 바깥에서 비로소 존재의 깊은 층이, 그렇다, 존재 자체의 모습이 분명히 드러난다. 의미의 위기에 직면하여 료타르 역시 존재로의 전환을 결행한다. 이때 그는 서사적 의미의 공허를 특별한 존재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의미와 존재 사이의 구별에서 존재론적 차이가 나온다. ... 사건들은 더 이상 그 서사적 의미 내용, 즉 무엇 Was을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는 것Dass’ 이 된다. 서사적 연쇄의 해체에 따라 시간은 단선궤도에서 이탈한다. 하지만 단선적, 서사적 시간의 붕괴가 꼭 재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각이 이야기의 족쇄에서, 서사적 강제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지각은 떠돌기 시작하고, 그렇게 떠도는 상태로 머물게 된다suspens. 그리하여 서사적 구속에 엮이지 않은 사건들, 본래 의미에서의 사건을 위한 여유가 생겨난다. 지각은 이제 서사 궤도상에 자리를 잡지 못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일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떠도는 지각은 “미지의 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을 따른다. 의미 있는 시간의 붕괴에 대한 료타르의 대답은 흔히 볼 수 있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특별한 종류의 애니미즘이다. 감각이 받아들이는 원초적 느낌에는 의식이 테마로 다룰 만한 내용이 담겨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느낌은 영혼을 깨워 살아 움직이게 한다. 그것은 영혼을 죽음에서, 감각의 자극이 없었다면 헤어 나오지 못했을 무기력의 늪에서 끌어낸다. “아니마는 오직 자극받음으로써만 존재한다. 유쾌한 감각, 불쾌한 감각을 통해 아니마는 자신이 어떤 자극도 받지 않는다면 존재조차 하지 않을 것임을, ‘움직여지지animiert’도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영혼은 어떤 소리, 어떤 색깔, 어떤 냄새처럼 흥분시키는 어떤 감각적 사건을 만나지 않는 한 냉담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술의 과업은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데 있다. “아이스테톤aistheton(감각할 수 있는 것,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영혼은 아이스테톤의 자극을 받을 때에만 존재하며, 아이스테톤이 없다면 영혼 없는 허무 속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예술작품은 이런 놀랍고도 불안정한 전제 조건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영혼은 아이스테톤, 즉 감각적 사건에 의지하여 존재한다. 아이스테톤이 없다면 마비 상태만이 찾아올 것이다. 미학은 마비의 위협에 저항하기 위한 처방이다. 존재의 깊이는 동시에 존재의 절대적 빈곤이다. 그러한 존재에게는 거주의 공간이 전혀 없다. 료타르가 말하는 존재의 신비는 오직 거기 있음의 신비일 뿐이다. ... 료타르가 말하는 분열되고 불연속적인 시간, 존재의 심연 앞에 놓인 사건의 시간은 삶의 시간, 즉 거주의 시간이 아니다. 삶이란 연명, 혹은 단순한 깨어 있음 이상의 것이다. 서사적 시간의 종언이 필연적으로 연명의 시간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사적이지도 않고 단순한 생존에 그치는 것도 아닌 삶의 시간, 테마와 트라우마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 Apr 2. 2020

Darf der Zeit 시간의 향기_ 한병철
향기로운 시계: 고대 중국으로의 짧은 여행 中

중국에서는 향인이라고 불리는 향시계가 19세기까지 사용 되었다.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 을 비워낸 정신이다.
바로 이러한 비움이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에 깊이를 준다.
시간의 깊이는 모든 순간을 온 존재와, 그 향기로운 영원성과 결합한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서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 Mar 31. 2020

결국 예술가는 AI로 대체될까?

최근 인터넷에서 AI가 만든 그림들 -예를 들어 인상파 화가의 스타일을 참고한-이 유행하면서 창작의 영역도 AI로 대체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 염려?를 하는 것 같다. AI처럼 사고하는 사람들에게는 AI가 만든 그림이나 결과물이 예술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결국 AI는 데이터를 통해 보편적 이미지를 추출해 내 그것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AI는 자아가 평균 값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여 평균 값을 벗어나는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 반면 인간은 아무리 같은 정보를 가르치고 받아들여도 각기 다른 결과를 내놓는다. 유니크한 자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내놓는다. 아무리 같아지려고 해도 같아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자아와 관련하여 AI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가 존재한다.
보편으로의 회귀 vs 유일성으로의 벗어남, 나아감
과거 지반적 vs 미래 지향적
목적 지향적 vs 의미 지향적 혹은 무-목적성
유용성 vs 쓸모없음
1-ai_Mar31_2020

2-ai_Mar31_2020




>> Oct 4. 2019

Ich und die Anderen- Isolde Charim, 나와 타자들 - 이졸데 카림
아마도 나에겐 2019 올해의 책이 될 듯.
푸코 저항 역사 담론
냉엄한 현실과 희미한 상상 사이의 관계
작업에서 연결되지 않던 부분들이 이 책에서 하나의 담론 안에 엮여 있음.



>> Aug 29. 2019

용산 미군 기지 투어

오늘은 미군 기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투어가 당첨되어 다녀왔다. 항상 지나다니던 길 옆 담벼락을 보며 저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막상 그 벽 안쪽에서 보니 그다지 특별할 것도, 어떤 감상에 젖을 만큼 인상이 크지는 않았다. 벽을 내부에서 볼 때와 외부에서 볼 때 갖는 감정의 온도차가 있는 것 같다.

몇 가지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을 적어본다.
-LA 한인타운에 온 듯 기묘하게 섞인 한국식 기와 장식과 미국식 건축물
-건물별 성격을 나타내는 표시와 숫자. 예) T4130 -> temporary 일시적 건물, S4539 -> semi-temporary 반-일시적 건물 등 철거될 건물의 수명을 염두에 두고 부여한 건물 명칭이 흥미로움. (반환할 생각은 있었구나?)
-건축재료적 면에서 일본군이 건설한 건물들은 붉은 벽돌을 주로 사용했고 미군이 건설한 건물들은 큰 사이즈의 벽돌이나 건물을 임시로 사용할 경우엔 얇은 골함석의 컨테이너를 재료로 사용. 일본군과 미군, 두 국가의 군대가 한 나라 수도의 중심에 주둔을 했을지라도 임시로 군정을 맡아서 혼란을 수습할 계획이었던 미군과 견고한 붉은 벽돌로 건물들을 지어 영구적으로 주둔할 계획이었던 일본군, 두 나라의 한국 주권에 대한 태도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임.
-현 용산 지역에는 사실 용산이 아니라 둔지산이 있다는 점(해설사분이 계속 강조). 본래의 용산은 지금의 효창공원을 지나 마포나루 쪽으로 산맥이 있었음. 하여 신용산역 명칭의 탄생 비화 이해됨.
-기지 안 만초천은 오픈 후 랜드마크가 될 가능성이 큼. 아름다움.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이 생각남.
-당연한 소리지만 여러 시대의 역사 레이어가 중첩된 장소/공간이라는 점에서 용산 미군 기지의 상징성과 의미를 잘 살려서 계획을 수립해야 할 듯. 개인적으로 뉴욕의 센트럴파크(생태자연보존, 시민문화활동)+ 베를린 곳곳의 역사적 장소, 뮤지엄(유대인 박물관, 홀로코스트 기념비 등)을 결합한 형태로 재건이 되었으면 함.

여담/ 가수 정엽 씨가 버스 뒷좌석에 앉은 것도 모르고 투어 내내 저분 참 정엽 씨 닮았네라고 생각. 투어 끝나고 해설사분이 사인받는 것 보고 알아차림. 건승하시길.



>> Jul 25. 2019

Finally finished reading 'The Human Condition' with a help of a lecture at ‘philosophy Academy’ in Seo-chon. This book would be one of the top 3 among the most influential books in my life. 혼자 읽다 포기할뻔했지만 강의 찾아 듣고 그나마 이해해서 다행이다.



>> Jul 3. 2019

A Farewell to Arms
무기[武器;Arms]여 잘 있거라
-Ernest Hemingway

Farewell, Aragog, king of
arachnids. Though your body will
decay, your spirit lingers on in
the quiet, web-spun places of your
Forest home. May your many-eyed
descendents ever flourish and your
human friends find solace for the
loss they have sustained.
-Harry Poter

A Farewell to Arms
(To Queen Elizabeth)

HIS golden locks Time hath to silver turn'd;
O Time too swift, O swiftness never ceasing!
His youth 'gainst time and age hath ever spurn'd,
But spurn'd in vain; youth waneth by increasing:
Beauty, strength, youth, are flowers but fading seen;   5
Duty, faith, love, are roots, and ever green.

His helmet now shall make a hive for bees;
And, lovers' sonnets turn'd to holy psalms,
A man-at-arms must now serve on his knees,
And feed on prayers, which are Age his alms:   10
But though from court to cottage he depart,
His Saint is sure of his unspotted heart.

And when he saddest sits in homely cell,
He'll teach his swains this carol for a song,—
'Blest be the hearts that wish my sovereign well,   15
Curst be the souls that think her any wrong.'
Goddess, allow this agèd man his right
To be your beadsman now that was your knight.
-George Peele. 1558?–97



>> Jun 26. 2019

"Shock and Awe"

Bart: [At the airport] What's up with the Canadian sticker on your backpack?

Lisa: Well, some people in Europe think that America has made some stupid choices for the past, oh, five years. So for the next week, I'm from Canada.

Bart: Uh, I think Dad may blow your cover.

Homer: [pushing through the crowd] That flag is mine! [takes an American flag off the conveyor belt and stands on top of suitcases, waving the flag around] Don't mess with Texas! Shock and awe, losers! Shock and awe!

-The Simpsons_ The Italian Bob

shock&awe_Jun26_2019



>> Jun 10. 2019

Somebody tell me what that means.
"BRMC." What does it mean?
Black Rebels Motorcycle Club.
Isn't that cute?
Hey Johnny, what are you rebelling against?
What have you got?
Hey Kathy, aren't they wonderful?
Did you hear what I said?
I said, "What does 'BRMC' mean?"
and he said, "Black Rebels Motorcycle Club."
I asked, "What are you rebelling against, Johnny?"
And he said, "What have you got?" "What have you got?” haha

등에 쓰여 있는 B.R.M.C.가 무슨 뜻이죠? 무슨 약자예요?
검은 반항아들의 오토바이 클럽
귀엽네요
쟈니, 무엇에 반항하는 건가요?
당신이 가진게 뭔데?
캐시, 이 사람들 정말 멋지지 않니?
내가 한 말 들었어?
B.R.M.C.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검은 반항아들의 오토바이 클럽이라는거야
그래서 쟈니에게 무엇에 반항하냐고 물어봤지
당신이 가진 게 뭐냐고 하는거 있지. 내가 가진 거에 반항 하나 봐!
-The wild one (1953)



>> May 26. 2019

말테의 수기 中 p12.

"이제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겠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변해 가고 있다는 걸 무엇 때문에 알려야 하는가? 내가 변하면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와는 다른 무엇이다. 그러니 이제 내게는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야 없는 것이지."



>> Mar 22. 2019

개인전 언제 하세요?라는 말은 작가에게 흡사 애는 언제 가질 생각이에요? 혹은 결혼 안 하세요? 와 동급의 질문이다. 고로 상대방이 먼저 언급하기 전에 되도록이면 묻지 말자.



>> Mar 15. 2019

릴케, 말테의 수기 中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 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양념을 모아야 한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릴케는 말테의 입을 빌려 10대 후반 즈음에 쓴 작품을 회고한다. 전통적인 규범과 관습에 의존한 시, 감흥이 향하는 대로 장황한 어구를 늘어놓은 시는 무의미하다. 시는 잘 단련한 언어의 조형물이다. 뛰어난 장인의 기술처럼 완벽하고 자연과 예술 작품처럼 애매함 없이 자립해 있어야 한다.



>> Mar 1. 2019

일기
너 아직도 그런 거 하냐?라는 말의 의중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나에게 무언가 새로운 걸 기대했으나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본인은 이제 가지 않는/갈 수 없는 길을 계속 가는 친구에게 하는 질투 섞인 말일 수도 있겠다고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는 건 빗겨맞은 화살일지라도 화살 촉에 오래 남을 독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독을 담아 던진 말은 무방비 상태에선 손쓸 도리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 부위가 더 깊숙한 곳으로 퍼진다. 결국엔 그 말과 그 말을 전달한 사람을 회상하게 하는 상처 부위 전체를 도려내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 관계의 절단이 일상화되는 순간이다.

작업을 보여 줬을 때 의미 있는 회답을 받기란 좀처럼 어렵다. 더구나 작업의 실물이 없는 상황에서 나누는 대화는 핵심을 짚지 못하고 주변을 부유하다 먼 곳으로 흘러간다. 이미 대화가 갈라진 걸 알아채지 못하고 이쪽으로 흘러가는 게 맞니 저쪽으로 흘러가는 게 맞니 하는 동상이몽 논쟁이 시간을 소모한다. 술을 마시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부각된다.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간 대화는 각자에게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곤 종국에 '역시 우린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이상적인 사이 야'라며 만족하고 헤어진다.



>> Feb 19. 2019

‘불안’- 알랭 드 보통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헌신 때문에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지 몰라도,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식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었다.

돈과 실용적인 직업이 영혼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또는 스탕달의 말을 빌리자면 “부드러운 감각”을 향유하는 능력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보헤미아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소로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있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 Jan 24. 2019

“눈으로 뿐 아니라 코와 귀와 모든 감각으로 느껴지는 체험, 작품과 관람자의 직접적인 교감, 말이나 글로 쓰는 것이 아닌 온 몸으로 느끼는 감흥”이 심미적 경험.”이라고 설명한 권미원 교수는 현대에는 그런 교감을 주는 작품이 점점 없어져간다고 안타까워했다.

“현대인의 삶 자체에 그런 경험이 없어지거나 제한돼 있기 때문일 거예요. 학생들을 보아도 다들 스마트하고 정보는 무척 많은데 뭘 진지하게 보거나 묘사하거나, 자기 경험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일에 서툴러요. 그러나 저는 그런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자신의 심미적 경험을 자기가 믿지 못하고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겁니다”

“교환의 비율(EXCHANGE RATE: On the Economy of Obligation and Reciprocity in Contemporary Art)” 현대미술의 중요한 방식으로 대두한 참여미술에서 미술가, 관객, 그리고 참여자의 새로운 역할의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이며, 나아가 미술 실천에서 ‘상호적인 관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



>> Jul 30. 2017

Coding Community 코딩 커뮤니티
Sim Boseon 심보선
Poet 시인

What type if community does art represent? How does art represent a community? Which voices are used to represent a community through art? The quintessential answer to these questions can be found in Aristotle’s Poetics, which is a “representative regime,” in the theory of Jacques Ranciére. According to Aristotle, the primary function of art is to unite the state, audience, and world in one single homogeneous continuum.

Aristotle argues that the audience comes to feel immersed in this homogeneous continuum through. In such case, the narrator must be a hero, representing “good”. In other words, the principal agent of the narration cannot be a woman, a slave, or any other representative of the “bad.” Aristotle’s “representative regime” arranges agents of narration into the virtual order of central and peripheral, high and low, thus assigning them different importance. Accordingly, the audience is fascinated by the lives of some people or characters, while being averse to the lives of others. In this way, the audience confirms the desirable forms and members of a community.

Words are one of the most common elements of representation. Words are tools, materials, and symbols. Through words, we can build models of a community. Words are a medium of communication, and simultaneously a code that guides our perception. By creating and interpreting this code, we come to understand the relational patterns between ourselves and others. Thus, we cannot help but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words.

Plato strictly distinguished between the words of a slave and the words of a master, asserting that only a master’s words were worthy of participating in a political community. Extending and elaborating on his teacher’s distinction, Aristotle distinguished speech from voice and sound, since speech is unique to humans, while many animals are capable of voice and sound. Thus, it is only through speech that we can discern what is good and just. Only speech can provide the words that may form the foundation of communities, including our families and the state. The representation of community emerges from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order of words and the social order, as well as from the principle of synthesis between these two distinguishing systems.

How can we challenge this synthesis, to imagine and realize different communities? In the history of representing communities, do excluded people have a stage or platform? Where are their words located? There is a radical and yet simple answer to all these questions. The voices of excluded people may be thought of as a non-linguistic language expressed through mad carnivals, secret meetings in the dead of night, and the actions of a revolt. These voices build their own independent stages outside, underground, or on the edges of the existing stages. In order to discover the origin and genealogy of these voices, we have developed and utilized the concepts and methodologies of folk culture, national history, and oral history.

But the order of representation is not eternally fixed and unchangeable. There is a stage within a stage, and they collide with one another. The distinction between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between the high and low, is flexible and unstable. For example, Homer’s Iliad cannot be reduced to the tales of its heroes. Homer threatens this narrational consistency by introducing the memories and regrets of the dying unknown soldiers in the descriptions of the Trojan War. Mikhail Bakhtin has argues that elements of carnivals (i.e., candid, cynical, explicit, and bizarre language that freely combines praises and curses) began to spread through medieval art and literature, which clearly challenged the synthesis between the order of words and the order of community. Bakhtin further claimed that the existence of carnivals served to liberate human actions, motions, and words from the power of class hierarchy.


But is such mixing and overthrowing of language and non-language truly subversive? Given that the excluded people were evidently invited to occupy a space within the narration, is their mere participation sufficient?

The dominant language discredits and destroys the spontaneous political discourse of the dominated. It leaves them only silence or a borrowed language, whose logic [is] unable to express anything true, real or “felt,” [and thus] dispossesses the speaker of the very experience it is supposed to express. It forces recourse to spokesmen, who are themselves condemned to use the dominant language...

Pierre Boudieu accepts Plato and Aristotle’s assertions about language and society, but in a somewhat seditious way. Bourdieu supports the resistance of excluded groups who have been forced to confront a community’s order, but he also acknowledges the strong barriers that oppose such resistance, as well as the gravitational power that constricts them through the order of words. Thus, they are doubly oppressed by the rigid order and code of society. According to Bourdieu, the indomitable code of social reality can only be overcome through the mediation of code-makers and code-analysts, namely, experts with advanced knowledge and intelligence.

It is at this point that artists and intellectuals can get involved. Such representatives support the resistance of ruled and excluded people by translating and deciphering their non-linguistic code into a refined, universal language. However, according to Bourdieu, the code that these representatives use still originates from their own world, rather than that of the excluded. Thus, when the conditions of the excluded are represented by intellectual intermediaries, they still have to go through silence and alienation. In such case, the excluded are no more than uncomfortable and awkward guests invited into the ruling order.
+Nov 30, 2020 / p.251 The Location of Culture_ Homi K. Bhabha
... 만일 차별의 효과가 시선을 권위에 쏠리게 하여 권위를 유지시킨다면, 권위가 분열되며 증식되는 차이는 그 시선을 피하면서 감시에서 달아난다. 그같은 피차별자의 저항은 본능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차별의 효과 역시 권위의 직접성과 분절성의 (재)인식을 강요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일종의 방해효과인데, 그것은 식민주의적 담론이 차별받는 주체들을 주시하는 순간 그 담론을 고역스럽게 하는 머뭇거림의 반복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중국인의 ‘불가사이함’, 인도식 의례의 ‘언어도단’의 절차, 호텐토트의 ‘형언할 수 없는’ 관습 등이다. 이 예들은 권위의 목소리가 언어를 찾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식민지 담론이 그 대상의 혼성성에 직면함으로써, 권력의 ‘현존’이 인식의 규칙이 단정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This pessimism becomes distinct in the circumstances surrounding a monument. A monument is erected in the middle of a square. There is a ceremony to unveil the monument. Through the spectacular form of the monument, the message of a community hero spreads among the crowd. Through forms and words, the crowd is elated, seeing the future and fate of the community is at-hand. But ultimately, isn’t this merely a virtual sensation? Don’t people intuitively understand that their bodies don’t correspond to the monument? Don’t they know that the monument will eventually fall and be replaced by another equally irrelevant landmark?

To overcome such dissonance, some artists have attempted to create “anti-monumental” monuments. Such projects seek to evince a visual virtuality that we experience through our bodies, which simultaneously laments dead heroes and the conditions of the living. One of the most famous examples is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1982) by Maya Lin, an installation that has stirred public controversy, as I discussed in an earlier article:

Unlike conventional monuments, Maya Lin’s Vietnam Veterans Memorial does not soar upward, but sinks below the ground. This structure forces visitors to walk alongside the black marble wall, which gradually becomes deeper and wider. The wall is inscribed with the names of 58,195 missing or deceased veterans of the Vietnam War. While most monuments are embossed, Lin’s Vietnam Veterans Memorial is incised, in all of its aspects... The ends of the V-shaped marble wall point to the Washington Monument and Lincoln Memorial (respectively), implying some commentary about American history and the Vietnam War.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is situated as a black bridge/abyss, both connecting and dividing two magnificent architectural structures honoring the two most famous heroes of American history. While the Washington Monument and the Lincoln Memorial orally enunciate the history and values of the U.S.,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reveals the darker side of those principles, in the form of an “anti-monumental monument.” In addition, while walking along the wall reading the names of those who died or were lost in the war, visitors can see their own faces reflected in the black marble. As such, the names of the dead overlap with the faces of the living.

Maya Lin’s “anti-monumental monument” awakens us to the importance of a work’s form and arrangement. Many artworks, including those with a radical political message, still function through the conventions of art appreciation, such as contemplation and silent reading. Artworks that attempt to convey the words and forms of the excluded in such way are inevitably trapped within the standard produc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dominant code. Thus, the issue here is “coding,” which relates to the process of choosing the materials, and deciding how to treat and organize them. “Coding” os not related to the collective effects that the work produces. On this topic, Ranciére wrote:

What it produces is not rhetorical persuasion about what must be done. Nor is it the framing of a collective body. It is a multiplication of connections and disconnections that reframe the relation between bodies, the world they live in and the way in which they are “equipped” to adapt to it. It is a multiplicity of folds and gaps in the fabric of common experience that change the cartography of the perceptible, the thinkable and the feasible. As such, it allows for new modes of political construction of common objects and new possibilities of collective enunciation.

According to Ranciére, the restructuring of community or the common is possible through the coding method he called the “aesthetic regime.” This new coding system, which opposes the representative regime, nullifies the existing distinction between central and peripheral, high and low, and then assigns them different significance and weight. As such, the ordinary becomes the extraordinary, daily life becomes the stage for struggle and adventure, and common products found in the streets become the source of poetic inspiration. The hierarchy of language and non-language collapses and is reorganized. After all, it is through literature and art that anyone can say anything about anything. Everyone is qualified by having been disqualified. This is how a new democracy and community are constituted.

From this perspective, we can evaluate attempts to utilize artistic materials to achieve the maximum degree of freedom and equality, and to restructure the common. An excellent example is media art. By using technology to maximize audience participation and interactivity, media art seeks to experiment with and realize democracy through perception and representation that transcends the political system.

But the mere presence of technology does not guarantee democracy. Katie Mondloch traces the origins of media art to Le Corbusier’s Poème électronique (composed by Edgard Varèse) presented in the Pavillon Philips at Expo ’58 (Brussels World’s Fair). According to Mondloch, the attitude of Poème électronique was far from democratic; in fact, it was the complete opposite. The work was entirely planned and performed by the dictatorial maestro called Le Corvusier, as an attempt to deliver the outcry of a restored community, the passion of drama, and the sense of trust between collective souls. The goal of Poème électronique was to stir a communal passion in the audience through a vivid sensational experience. Like Wagner’s “Gesamtkunstwerk” (total work of art), Poème électronique also positions itself in Aristotle’s representative regime. Through a spectacular, authoritative, and monumental appearance, it attempted to educate the audience about community.



Another relevant development of media art is “locative media,” which seems to propose the possibility of an alternative community. Locative media enables users to directly compose their own narration using advanced technology, such as mobile and GPS devices. In this way, locative media enables new experiments with maps, perceptions, relations, and networks related to space. At present, however, locative media has been co-opted for use in corporate marketing strategies. In fact, many corporations and governments have developed an affinity for locative media through various research projects on urban culture and the interactions of urban residents. For example, on its website, the locative media group Blast Theory boasts that they have provided innovative marketing strategies to corporate clients, and carried out various commercial projects focused on interactive experiences for television, clothing, and telecommunication companies.

Locative media reveals an alternative community in opposition to the elitist and authoritarian society, a microcosm where individuals can compose their own words and forms. But as soon as this microcosm assumes the appearance of a democratic alternative to the existing authoritarian community, it becomes a platform for consumerism. At that point, the words and forms provided by locative media are chosen not as tools for acquiring rights and powers for the ordinary, but as resources for circulating immaterial commodities and services.

In sum, media art is located within a spectrum, with the existing political community at one end, and the capitalist consumer community on the other. Traveling back and forth between these poles, media art experiments with its political potential. Media art is capable of restoring lost communities or realizing new communities, but the same can be said of any work of art. Depending on how its materials are chosen and employed, art can provide a site that further alienates excluded people or one that manifests their words and forms. But no matter what type of site art initially seems to provide, before long, it will almost certainly be occupied by yet another silence or alienation.

Every new technology that emerges during the evolution of art is inevitably accompanied by hopes for new democratic possibilities. This cycle has been constantly repeated through time. With the invention of the printing press, scriptures and law books were publishing in vernacular language, resulting in the appearance of new coding principles. Accordingly, a community was redefined and restructured. Indeed, democracy itself might be defined as a new communal coding method that emerges from such process. In due time, however, this new code is corrupted by various symbolic, economic, and political groups that reinstill it with the dogma of the existing market and hierarchy. Groups of experts, patrons, and aficionados form a dominant bloc, enshrouding their own tastes and profits in an aura of universality. The same struggles and dynamics also marked the emergence of media art and digital technology.

History repeats itself, but it also expands. In time, two vectors can be perceived at the same time. Hence, art rushes toward non-art. Through technology, art actively embraces ordinary symbols and narrations, and then utilizes them as tools for non-systematic communication and open confession. The stage of art has expanded beyond the walls of museums and theaters. However, the elements of non-art have now been reclaimed into the discourse of art, being defined as the aesthetics of “post” or “post-post”. Today, artists are inevitably expected to attain some identity outside the field of art. Activists become artist, and artists become activists. A stage is moved outside of art, but then it reenters the stage by adding another stage. At present, there is no single program that can code for a community. Or there may be one program that codes for multiple communities. In the midst of this unprecedented chaos, art is involved in a community, and only through such involvement can art define its own autonomy and responsibility for the community, if only temporarily.

© 2016 Jiwoon Yoon